우리는 왜 타인을 이야기하는가?

연대의 시작은 공감인가 아니면 구분인가

by 이수염

우리는 타인의 이야기를 통해 관계를 만든다.

이 말은 단순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하나의 구조가 숨어 있다. 우리는 직접 나를 드러내기보다, 타인을 매개로 나를 드러낸다. 누군가를 평가하고, 누군가의 선택을 말하고, 누군가의 태도를 이야기하는 순간, 우리는 동시에 나의 기준을 말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타인의 이야기는 항상 이중적이다. 겉으로는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지만, 실제로는 ‘나’에 대한 간접적인 표현이다. 이때 타인은 하나의 도구가 된다.

성찰의 도구이기도 하고, 때로는 관계를 만드는 도구이기도 하다.


타인을 통해 나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비교적 온화한 형태다. 우리는 누군가의 상황을 보며 나를 떠올리고, 그 안에서 선택을 가늠한다. 직접 나를 해부하지 않아도, 우리는 타인의 이야기를 통해 충분히 나를 돌아볼 수 있다. 이것은 일종의 우화적 사고다. 구체적인 개인을 하나의 사례로 받아들이고, 그 사례를 통해 일반적인 기준을 세운다. 이 방식의 장점은 분명하다. 우리는 상처받지 않으면서도 사유할 수 있다. 그러나 같은 구조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타인을 통한 성찰은, 쉽게 타인을 통한 구분으로 이동한다. 누군가를 보며 “나는 저렇지 않다”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자신을 그 사람과 분리시키고 있다. 이 분리는 단순한 차이를 넘어, 때로는 위계로 변한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험담이 등장한다.

험담은 단순한 비판이 아니다. 그것은 관계를 형성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함께 낮추며, 서로를 같은 위치에 올려놓는다. “저 사람은 문제다”라는 말은 동시에 “우리는 다르다”는 선언이 된다. 이 구조가 강력한 이유는 명확하다. 공감이 빠르게 형성되기 때문이다. 같은 것을 좋아하는 것보다, 같은 것을 싫어하는 것이 더 즉각적으로 사람을 묶는다. 이때 형성되는 것은 공감이라기보다, 방향의 일치다. 우리는 같은 대상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서로를 같은 편으로 인식한다.


문제는 이 연대가 대상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함께 바라보는 대상이 사라지면, 관계 역시 느슨해진다. 더 나아가 그 대상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 오늘은 함께 말하던 사람이, 내일은 말해지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래서 험담으로 만들어진 관계는 안정적이지 않다. 그 관계는 사람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방향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하나의 중요한 조건이 드러난다. 타인의 이야기를 통해 연대를 만들고자 한다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있다. 바로 피아식별이다. 우리가 말하려는 대상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존재인가. 그 질문이 빠지는 순간, 이야기는 쉽게 어긋난다. 어떤 이에게는 공감이 되는 말이, 다른 이에게는 공격처럼 들린다. 이 차이는 내용의 문제가 아니라, 위치의 문제다. 사람은 자신이 서 있는 위치에 따라 같은 말을 전혀 다르게 받아들인다.


그래서 대화 속에는 종종 미묘한 균열이 생긴다.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따라 웃고, 누군가는 조용해진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웃고 있는 쪽만 본다. 분위기를 주도하는 것은 언제나 적극적인 반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관계의 균열은, 반응하지 않는 쪽에서 시작된다. 침묵은 부재가 아니라 신호다. 그 자리에 완전히 포함되지 못했다는 신호.


결국 이런 질문이 필요해진다. 지금 이 이야기는 누구를 묶고 있는가. 모두를 포함하고 있는가, 아니면 일부를 중심으로 나머지를 배제하고 있는가. 이 질문 없이 만들어진 연대는, 오래 유지되기 어렵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다른 방식을 선택한다. 직접적인 지목 대신, 우화와 비유를 사용하는 방식이다. 특정 인물을 말하는 대신, 가상의 상황과 인물을 제시한다.

이 방식은 판단을 유보시킨다. 듣는 이는 방어하기보다 생각하게 된다. 이야기는 개인을 향하지 않고, 하나의 구조를 향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더 많은 사람이 대화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 그러나 이 방식 역시 완전히 중립적이지는 않다. 우화는 대상을 흐릴 뿐,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한다. 사람은 결국 그 이야기 속에서 현실의 누군가를 떠올린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니라 방향이다.


이야기가 향하고 있는 곳이 어디인가. 누군가를 배제하기 위한 이야기인가, 아니면 어떤 기준을 함께 세우기 위한 이야기인가. 이 둘은 겉으로는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든다. 타인의 단점을 통해 만들어진 연대는 빠르다. 그러나 그 속도만큼이나 쉽게 방향을 바꾼다. 반대로, 기준과 상황을 중심으로 한 대화는 느리다. 그러나 특정한 대상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더 오래 유지된다.


결국 우리는 선택하게 된다.

타인을 통해 나를 구분할 것인가,

타인을 통해 나를 이해할 것인가.

그리고 그 선택은 관계의 형태를 결정한다.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타인의 이야기를 할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관계를 맺는 자연스러운 방식이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타인의 이야기는 언제나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관계를 만들고, 동시에 경계를 만든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이 질문이 남는다.


우리는 지금, 타인을 말하고 있는가.

아니면 타인을 통해 누군가를 나누고 있는가.


그리고 그 나눔 속에서,

나는 과연 어느 쪽에 서 있는가.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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