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의 인정이 배려를 만든다.

사유의 고행길에 들어서다.

by 글 쓰는 흰둥이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정말 알고 있는 게 맞을까?' 하는 의문은 때때로 우리를 너무나 먼 곳으로 데려간다.


그 의문의 여정은 고행과도 같다. 한 번 시작하면 끝나지 않는 굴레와도 같다. 물론 본인의 의지대로 그것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그 고민을 해결하려 할 때, 이전에 멈췄던 곳에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는 없다. 인간의 인지력과 기억력에는 한계가 있기에 사유의 여정을 새로 시작해야만 하며, 다시 그 고행길에 들어서야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진정으로 안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저 누군가에게 들은 것, 어딘가에서 본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을 뿐이다. 진정한 앎에 도달하려면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가령 "개미는 사람보다 작다"라는 문장을 보자. 왜 작은가? 이 평범한 질문에 제대로 답할 수 있는가. 개미는 평균 몸길이가 1~2cm이고, 사람은 평균 160cm(너무 높게 잡으면 상처받는 사람이 생길 수 있으니 조금 낮게 설정했다.) 전후이니 개미가 작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160이 2보다 큰 이유는 무엇인가? 숫자는 물질적인 무언가를 헤아리기 위해 사용되기 시작했다. 우리는 같은 질량과 부피를 가진 물체라면 1개보다 2개가 더 크다고 배운다. 그렇다면 크기를 비교할 때 왜 부피와 질량을 기준으로 삼는가?


나는 이미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 내가 가진 과학적 지식이 바닥났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이전에 했던 대답조차 현대 과학의 정론에 부합하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어렴풋이 그럴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세상 모든 일에 이런 근원적 질문을 던진다면 결코 평탄한 삶을 살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필요에 따라 이런 질문을 던질 줄 알아야 한다. 왜 이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어야 하는가? 인간이 타자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그것이 나에게 어떻게 비치는지에 따라 이로움과 해로움을 판단하고, 그 과정에서 느낀 감정을 표출한다는 뜻이다. 즉, 내가 무언가로부터 감정을 느끼고 그에 따라 행동한다면 이미 그것과 관계를 맺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내가 느끼는 감정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내가 지금 이 순간까지 보고 듣고 배운 것을 토대로 형성된다. 그렇다면 나를 가르친 누군가는 나와 관계를 맺기 전, 판단 기준이 될 지식을 어떻게 세울 수 있었겠는가? 이것은 끝이 없는 질문이자 근원적인 탐구다.


나는 내가 아는 것조차 올바르게 알지 못한다. 하지만 알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틀림'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내가 알지 못하는 타인의 기준과 삶을 종종 틀린 것으로 간주하곤 한다. 때로는 사회적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사회는 그가 우리 집단에 얼마나 필요한지, 효율적인 활동이 가능한지를 우선시하여 수용 여부를 결정한다.


이 때문에 우리는 피할 수 없는 갈등 속에서도 관계를 끊어내지 못한다. 끊어내지도 못하면서 지속하기는 싫은 마음을 간직한 채, 그로부터 발생하는 부정적인 감정을 고스란히 안고 살아가는 것이 과연 옳을까?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같은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피할 수 없다면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면밀히 분석하고 고민해야 한다.


단순히 상대를 치워버릴 방법을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왜 나에게 그렇게 나타나는가?", "나와는 무엇이 맞지 않는가?"와 같은 질문을 던지며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설령 나와 정반대의 무언가를 발견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나쁘다 말할 수 있겠는가? 나 자신조차 제대로 알지 못함을 인정한다면, 나와 대비되는 무언가가 잘못되었다고 단정 지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친다면 내면에 쌓인 해소하기 어려운 감정들을 비워낼 수 있고, 애초에 그런 감정이 발생하는 것을 억제할 수도 있다.


물론 이 과정은 고행과도 같다. 너무나 힘겹기에 대부분의 사람이 행하지 못한다. 하지만 평상시에 이를 기꺼이 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관계 속에서 큰 불화가 생겼을 때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왜?'라는 질문을 통해 얻어낸 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이해하려 노력하다 보면, 어느덧 우리는 옳고 그름의 잣대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내가 모르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태도, 그것이야말로 배려와 겸손이라는 성숙한 자세의 기반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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