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대가

인간 존재의 사회적 진화.

by 글 쓰는 흰둥이

느낌도 감정도 아닌 '사랑'은 그 의미를 명확히 규정하기 어렵다. 사랑은 물리적 감각으로 포착할 수 있는 대상도 아니며, 그렇다고 인간관계와 같은 형이상학적 사상이나 의식 속에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사랑은 이 둘 사이 어디쯤 애매모호하게 걸쳐 있다. 우리는 사랑을 느낄 수는 있지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규명하지는 못한다.


어쩌면 이것 또한 인간이 진화 과정에서 집단과 사회를 이루기 위해 선택적으로 발달시킨 능력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사회 구성을 위해 '사랑'이라는 모호한 개념을 필요로 하는 것일까? 이하의 내용은 엄격한 논리적 검증이나 자료 분석을 거친 것은 아니나, 인간 생존의 궤적을 쫓아 추론해 본 결과다.


과거 무규칙한 생태계에서 인간이라는 개체가 강한 포식자로부터 쉴 곳과 먹을 것을 쟁취하는 과정은 대단히 참혹했을 것이다. 자연에서의 부상은 곧 죽음으로 이어진다. 동물의 왕이라 불리는 사자조차 들소 무리에 쉽사리 달려들지 못하는 이유는, 아무리 사소한 부상이라도 야생에서는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포식자인 사자조차 무리를 지어 사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리적 힘이나 천부적인 무기가 없는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 나약하기 짝이 없는 존재였을 것이다.


소규모 무리를 형성하는 것에는 그리 깊은 사고 체계가 필요하지 않다. 생존 기술을 습득하기 위한 기초적인 의사소통만 가능하다면 무리의 생존 규칙 또한 쉽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무리의 규칙은 곧 생존의 기술이다. 하지만 인간은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규모를 넘어 끊임없이 무리를 확장해 나갔다.


인간만이 생존 범위를 벗어나 무리를 확장할 수 있었던 것은 보이지 않는 고유한 무기, 즉 '깊이 사고하는 능력' 덕분이다. 홀로 자연에 던져진 개체에게 깊은 고민은 사치일 뿐이지만, 집단을 이루는 순간 이 능력은 빛을 발한다. 정교한 의사소통을 통해 우리는 왜 엄격한 규칙을 준수하며 무리를 확장해야 하는지 서로를 설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본래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은 각자의 욕구를 해소하려는 맹목적인 본능이 있다. 따라서 규제가 많아질수록 다툼은 빈번해질 수밖에 없다. 다툼은 무리의 와해나 개체의 추방을 야기하는데, 특히 무리의 와해는 심각한 문제다. 무리가 와해된다는 것은 단순히 규모가 축소됨을 넘어, 비슷한 역량을 가진 강력한 경쟁자(적)를 만들어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무리의 결속을 다지고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해 각자의 욕구를 조절할 필요성을 느꼈다.


무리가 와해되어 비슷한 능력을 갖춘 적을 마주했을 때, 선택지는 두 가지뿐이다. 상대를 완전히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들거나, 더 크고 강력한 규칙 아래 흡수하는 것이다. 전자는 피해가 크지만, 대화와 규칙을 통한 확장은 생존을 보장한다. 인간의 의사소통은 바로 이 지점에서 발전한 생존 전략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규칙을 위해 욕구를 억제해야만 하는가? 단순히 "무리가 와해되면 위험하다"라는 논리만으로는 개체들을 규칙에 구속시키고 연대하게 만들기에 부족하다. 때로 규칙은 생존과 무관해 보일 정도로 세세하고 엄격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인간은 생존 본능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새로운 목표를 설정한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우리가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공격을 멈추고 화합하기로 한 그 순간의 상태를 '사랑'이라 규정한 것이다. 당시 개체들이 가졌던 제각각의 생각과 욕구, 감각들을 모두 뭉뚱그려 '사랑했다'라고 선언해 버리는 것이다. 즉, 사랑은 감정이나 느낌이 아니라 '상황 그 자체'다. 매 순간 각기 다른 생존의 기로에 서는 우리는, 역설적으로 생존하기 위해 매 순간 사랑할 수밖에 없다.


결국 생존을 위해 규칙을 지키는 행위는 '사랑하기 위해 규칙을 지키는 것'으로 포장되어 고결하고 신성한 가치로 승격된다. 이 편이 집단 통제에 훨씬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랑과 규칙에 대해 깊이 의심하지 않은 채, 이를 맹목적인 목표로 설정한다. 사랑을 위해 규칙을 지키는 것이 정의롭고 마땅히 추구해야 할 가치가 된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거대한 인간 사회가 형성될 수 있었던 이유다.


공동체적 사랑이 커다란 규칙으로 욕구를 제어한다면, 이것이 세분화된 '개별적 사랑'은 때로 지극히 배타적이고 억압적인 성격을 띤다. 관계가 세밀해질수록 이를 유지하기 위한 규칙 또한 촘촘해지기 때문이다. 개인은 집단의 규칙을 지킬 때보다 더 직접적인 제약과 규제를 받는다. 명문화된 법은 아닐지라도 관계 유지를 위해 지켜야 할 무수한 약속들이 생겨난다.


공동체적 사랑의 기준이 '집단의 의지'라면, 개별적 사랑의 기준은 '관계된 소수의 공통 의지'다. 관계의 규모가 작아질수록 그 기준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욕망에 가까워진다. 통합적인 의지가 욕망을 통제했던 집단과 달리, 개별적 의지는 억눌렸던 욕망을 해소하려는 방향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서로 다른 두 존재가 욕구를 통합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누군가의 의지는 통제당하거나 상실된다.


사랑을 위해 공동체로부터, 그리고 다시 개인으로부터 욕구와 의지를 통제당하는 것. 이 의지의 박탈은 사실상 개별적 자아의 죽음과 무엇이 다른가. 결국 인간은 사회와 집단의 유지를 위해 개인의 인격과 의지를 저당 잡힌 도구와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자아의 죽음을 대가로 사랑과 규칙을 유지하며, 그것을 가장 합리적인 생존 방식으로 받아들인다. 사랑은 단순한 축복이 아니라 의무와 책임이라는 부산물을 동반하며, 우리는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때때로 의문이 든다. 왜 우리는 이 사랑을 맹목적으로 수호해야만 했는가? 인간의 본성이 '오만함'에 있기 때문은 아닐까. 사고하는 능력을 과신한 나머지, 정작 우리가 만든 '사랑'이라는 거대한 개념에는 질문조차 던지지 못한 채 스스로 만든 사회에 포식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고민하게 된다.


(해당 글에 삽입된 삽화는 글의 분위기와 테마를 살리기 위한 ai창작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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