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본질에 대한 재정의
시간은 흐른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시간도 과거에서 현재, 미래로 흐른다. 이것은 일종의 법칙이다. 이것에 예외는 없다. 물이 아래서 위로 흐르지 않듯이 시간도 미래에서 과거로 흐르지 않는다. 물이 흐른다는 말을 다시 풀어 설명하자면, ‘물분자의 집합체가 중력에 의해 지구 내부로 끌어당겨질 때 고도 차이로 인해 발생한 경사면을 따라 위치가 변화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시간이 흐른다는 말은 어떻게 풀어 설명할 수 있을까? 시간에 분자가 있는가? 애초에 시간은 물리적인 형태를 가질 수 없다. 필자가 생각하는 ‘시간은 흐른다.’라는 명제에 대한 설명은 이렇다.
“물질계의 무언가가 규칙적 또는 불규칙적 운동에 의해 위치가 변화되었을 때, 움직이기 전과 후를 비교하여 나타낼 수 있는 비가역적 척도이다.”
“어떤 물체가 움직이기 전과 후를 비교하는 척도이다.”라는 말은 예를 들어 A라는 물체가 xx.xx에 위치해 있었으나 운동으로 인해 xx.xz로 이동했음을 증명해 준다는 말이다. 만약 이 설명에 시간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xx.xx에 위치한 A와 xx.xz에 위치한 A가 같은 물질이라고 장담할 수 있냐는 질문이 나올 것이다.
가령 그 두 개는 완벽히 다른 것이며, 구성 성분만 똑같고 우연히 생성과 소멸이 유사한 위치에서 일어난 것뿐이라고 설명될 수도 있는 것이다. 시간 개념이 없다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은 생성과 소멸을 반복할 뿐 어떤 움직임이 없으며, 이에 따라 물질 간 상호작용은 그저 완벽한 우연의 결과물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인과관계라는 것은 애초에 성립할 수 없다.
놀랍게도 이러한 나의 이론과 가설은 실제로 일부 양자역학에서 비슷한 궤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양자역학과 일반상대성이론을 통합하려 시도했던 휠러-드윗 방정식에서는 시간을 기본 변수로 나타내지 않는다. 이 방정식은 일반 상대성 이론을 양자화하는데 집중했는데, 일반상대성이론에서는 시간도 공간과 동등한 좌표로 보고 관측자가 설정한 좌표에 따라 시간의 방향이 바뀔 수 있다. 따라서 우주에 주어진 절대적 시간이 없기 때문에 시간 변수를 둘 수 없었다.
그렇다면 양자역학은 시간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는 걸까? 아마 그것은 아니라고 짐작된다. 다만 우리는 언어로 시작해서 현대 물리학까지 수많은 학문과 지식을 습득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시간의 흐름을 규정하고, 그 규정에 따라 지식들을 중첩시켜 왔다. 그 결과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언어에는 시간의 개념이 내포되었다.
단순히 물체의 이름을 가리키는 단순 명사라도, 그 물체가 그 목적에 맞게 물리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전제하에 물체를 지칭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연필과 똑같이 생긴 물체가 있는데 실제로 흑연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니기에 글을 쓸 수 없다면, 이건 연필이 아니다. 연필은 우리가 합의한 대로 글을 쓸 수 있고 연필의 형태를 갖춘 것을 연필이라 칭한다. 단어의 의미 안에 이미 연필이라는 물체의 시간 흐름에 따른 분자 이동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시간은 반드시 동적인 형태일 것’이라는 사고를 확고히 고정시킨다. 여기서 한 가지 인간이 시간에 대해 고정시킨 인식이 하나 더 있다. 시간은 방향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다. 우리는 흔히 시간이 과거에서 현재, 현재에서 미래로 흐른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런 개념을 도식화하여 과거→현재→미래와 같이 왼쪽에서 오른쪽, 오른쪽에서 왼쪽 혹은 위에서 아래, 아래에서 위와 같이 나타내며 마치 방향이 있는 것처럼 표현해 왔다.
어쩌면 이건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다. 시간이라는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개념을 모두가 이해하기 쉽게 만든 도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 우리는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의 움직임에는 방향이 있다는 관념을 의식 속에 심어 버렸다. 실제로 연필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굴러갔다면 그것이 움직인 속도와 이동 전후의 좌표 차이를 통해 어느 방향으로 굴렀는지 측정한다. 하지만 이런 논리가 가능한 이유는 순전히 시간의 개념 아래, 물질의 이동이 생성과 소멸이라는 우연적 확률에 근거한 현상이 아니라는 데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양한 언어 화자 간의 시간 배열방식과 은유표현 습득에 따른 시간 개념 차이를 연구했던 레라 보로디츠키의 시간 인지 실험에서도 이와 비슷한 맥락의 내용들이 나타난다. 영어 사용자와 중국어 사용자 간 시간 배열의 방향이 좌에서 우로, 또는 상에서 하로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 시간이나 사건 순서를 배열하려는 경향을 발견했다.
지금 우리 과학계에서는 물질계를 쪼개고 또 쪼개어서 더 이상 나눌 수 없을 만큼 쪼갰더니 결국 양자역학이 튀어나와 버렸다. 양자역학의 시대가 오고 수많은 과학자들과 과학계의 최고 주류에 있던 상대성 이론과의 접합점을 찾으려 이토록 애를 쓰지 않았던가. 하지만 결국 나온 결론은 “입자인 동시에 파동이다.”라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말뿐이었다. 지금도 양자역학을 가장 오래 연구한 과학자도 인간의 직관으로 양자역학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에는 어려움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실정이다.
모든 것을 설명해 줄 줄 알았던 과학이 한걸을 물러선 지금 나는 철학적 사유로 다른 결론을 내려보려 한다.
인류가 양자역학을 발견하기 이전부터 우리는 모든 사물과 현상, 그것을 정의하는 언어와 체계, 그것들을 집대성한 학문 속에도 그 의식의 기반에 시간의 방향성과 동적인 흐름을 전제하고 있었다. 이러한 전제를 기준으로 삼아 우리는 눈앞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에 그럴싸한 이유들을 맞춰 나가기 시작했다. 우리의 언어도 문화도 학문도 시간의 개념에 알맞은 형태로만 정의되고 있던 것이다.
만약 처음 시간을 정의할 시점에 우리가 양자역학을 알았다면, 시간은 방향성을 가지며 끊임없이 흐르고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현상들을 규명할 수 있었을까? 결국 우리의 과학은 수많은 이론을 통해 실재를 밝혀낸 게 아니라, 현상들을 우리 인식 편의에 맞게 정립한 게 아닐까 한다.
과학은 늘 무언가의 성립을 위해 무언가를 가정한다. 물론 언제든지 이론과 사고는 비판받을 수 있으며, 그러한 비판에 대단히 수용적이다. 수용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나의 현상 앞에 수많은 가정과 전제하에 설명이 가능하다. 그 과정에서 실재하는지 여부를 밝힐 수 없는 요소들마저 추가하는 지경이다. 스스로도 한계를 직시한 만큼 수용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모든 오류가 ‘시간은 방향성을 가지며, 항상 동적인 특성을 띠고 있다.’는 인간 인식의 편의적 발상에서 시작된 것이라면, 필자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보고 싶다.
강력한 중력을 가진 블랙홀 주변에서는 시간과 공간의 역할이 뒤바뀌기도 한다. 또한 시간이 멈추기도 하는데, 강력한 중력에 의해 시간 왜곡이 강해진다는 말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느끼는 평범한 시간의 흐름은 적당한 중력과 물질 배치가 만들어낸 질서의 한 형태일지도 모른다.
시간은 방향성을 가지고 흐르며 물질과 중력에 의해 그 경로가 왜곡되는 것이 아니라, 물질과 중력의 영향으로 시간의 방향과 동적인 움직임이 생성되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