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정의

배트맨과 조커를 통해 바라보는 정의

by 글 쓰는 흰둥이

배트맨과 조커는 정의를 논할 때 빠지지 않는 단골손님이다. 이들의 이야기가 끊임없이 회자되는 이유는 현대 사회 정의가 지닌 모순을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악당 조커는 수많은 범죄를 저지르지만, 우리가 보기에 그에겐 특별한 동기가 없어 보인다. 그의 범죄 행위는 본인의 실리나 생활에 별다른 이득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가 범죄를 멈추지 않는 데에는 분명 다른 이유가 있다. 조커는 정의나 규칙보다 혼돈과 무질서가 사람들에게 자유를 선사할 것이라 말하지만, 사실 그것은 명분에 불과하다. 그는 자신의 존재와 계획이 정의를 수호하는 자들이 결코 꺾을 수 없는 완벽한 힘이라고 믿는다. 그로부터 느끼는 초월감과 우월감이 그를 범죄로 이끄는 동력인 셈이다.


영화 속 조커의 범죄 행위에는 두 가지 뚜렷한 특징이 있다.


1. 범죄의 결과가 그 어떤 일보다 잔혹할 것.

2. 범죄에 휘말린 이들에게 선택권을 줄 것.


첫 번째 특징은 잔혹한 범죄를 통해 대중이 최대치의 절망을 겪게 하기 위함이다. 압도적인 악(惡)은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숭고하고 순수한 정의를 갈구하게 만든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정의는 불의를 처단할 수 없다. 우리가 말하는 정의는 과거 야생의 시대에 압도적인 무력으로부터 생명을 지키기 위해 약자들이 규합하며 만든 '생명 중심적 정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극도로 순수한 정의는 그 어떤 것도 함부로 처단하지 못하는 무력함을 보인다. 조커는 영웅도 악당도 사라지지 않는 구조를 만들어, 사실상 '악의 영원한 승리'를 염원했을지도 모른다.


두 번째 특징은 더욱 섬뜩하다. 조커는 피해자들에게 선택지를 쥐어줌으로써, 그들이 수호하려는 정의와 개인의 권리 사이에서 갈등하게 만든다. 이를 통해 타인을 통제한다는 우월감을 느끼며 정의 위에 군림하려 든다. 이것이 바로 권력이 주는 본질적인 쾌락이 아닐까.


이 대결에서 배트맨은 결코 승리할 수 없다. 조커를 죽인다면 배트맨의 정의는 스스로 무너질 것이고, 죽이지 못한다면 조커는 또 다른 범죄를 저지를 것이기 때문이다. 조커는 이 점을 이용해 누구보다 대담한 범죄를 일삼는다. 배트맨이 자신을 응징해야만 하는 명분을 만들고, 결국 배트맨의 타락한 정의는 악과 다를 바 없으며 '선은 악을 이길 수 없음'을 증명하려 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사회상도 이와 비슷하다. 상위 계층은 개인주의를 강화하는 한편, 중·하위 계층에게는 공동체주의와 보편적 가치를 지키는 것이 궁극적인 삶의 태도인 것처럼 호도한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풍요로운 삶을 끊임없이 노출하여 대중에게 그들처럼 되고 싶다는 욕망을 심어준다. 욕망에 사로잡힌 이들은 기득권의 방식을 따르고 그들이 바라보는 방향을 함께 바라보며, 결과적으로 기득권의 승리 공식을 더욱 공고히 해준다. 이러한 악순환은 끊이지 않고 세력 간의 갈등만 고조시킨다.


생명의 가치만을 우선시하는 도덕과 정의는 우리의 선행을 맹목적으로 만든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도울 힘이 있고 그것이 내 삶을 지키는 길이니까"라는 식의 단순한 해석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나의 선행이 나에게 어떤 실질적인 이익을 가져다줄 것인지까지 냉철하게 바라봐야 한다.


대부분은 정의가 개인의 이익과 반대된다고 생각한다. 돈보다 생명이 중요하고, 개인의 권리보다 다수의 생명을 우선시하는 것이 결국 나를 지켜줄 것이라는 '과거의 집단 정의'를 여전히 신봉하고 있다. 그러나 국가라는 거대 집단이 개인의 생명을 보호해 주는 현재, 단순 생명 중심 사상에 기초한 도덕과 정의가 과연 우리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만드는지 깊이 고민해봐야 한다. 이러한 성찰을 통해, 기존 정의의 모순점에서 탄생한 불의와 그 불의를 발판 삼아 힘을 취하는 집단을 타도하려는 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2023년 이후부터 작성된 글들을 대체로 작성 순서에 따라 업로드하고 있습니다. 비슷한 주제가 반복되기도 하는데 그 당시 그만큼 관심을 가졌던 주제라고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해당 글에 삽입된 삽화는 글의 분위기와 테마를 살리기 위한 ai창작물입니다.)

이전 06화시간은 흐르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