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의 깊이와 순수함

직관의 순수함과 통찰의 무게

by 글 쓰는 흰둥이

웹서핑을 하던 중 우연히 악동뮤지션 이찬혁의 인터뷰를 보게 되었다. 그는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데뷔할 당시부터 참신하고 혁신적이면서도 대중성을 놓치지 않는, 마치 동전의 앞뒷면을 동시에 보여주는 듯한 놀라운 작사·작곡 능력을 인정받아 왔다.


인터뷰의 내용은 이러했다. 어릴 적에는 대중과 심사위원, 비평가들로부터 찬사를 받을 만큼 본인이 원하는 단어와 감정, 상황을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노래에 담아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노래를 쉽게 쉽게 만들어 내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그때처럼 곡을 쓰는 것이 어렵다고 그는 고백했다.


인터뷰 속 그 말을 듣고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무엇이 그에게서 천재성을 앗아갔는가. 어릴 적 순수한 의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때에 비해 너무 많은 것을 보고 듣고 알아버린 탓일까. 우리가 믿어온 세상의 아름다움이 사실은 복잡하고 교활한 가면 속에 타락해 있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양심적 가책 때문에, 이전처럼 순수한 시각으로 개념을 바라보고 직관적으로 노래에 담아내지 못하게 된 것일까.


문득 얼마 전 집필을 시작한 나의 소설이 떠올랐다. 소설을 통해 무엇을 전달하고 싶은지, 어떤 방식으로 구성해야 할지, 각 부분에 어떤 내용이 들어가는 것이 마땅한지 등 너무 많은 고민을 쏟아붓다 보니 1부조차 완성하지 못한 채 능력 부족을 탓하며 손을 놓아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스스로 타인보다 진중하고 철학적인 고민을 하며 깊이 생각하는 법을 수련하고 있다고 자부해 왔다. 보다 나은 이성과 통찰을 통해 발전된 나를 만들 수 있다고 믿었고, 그 생각들을 글로 옮기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막상 집필을 시작하니 정리된 생각은 터무니없이 적었고, 그마저도 갖가지 고민과 뒤엉켜 있었다. 입체적인 형태를 지닌 이야기를 단순한 개념으로 갈무리하여 글 속에 녹여낸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작업이었다.


'통찰'의 단계는 단순히 지식을 쌓는 것만으로는 도달하기 어렵다. 내가 쌓은 지식이 틀리지는 않았는지, 이해한 바가 맞는지, 그에 대한 나의 생각은 어떠한지를 끊임없이 되물으며 지식에 나만의 의지가 실릴 때 비로소 진정한 지식이 된다. 이러한 과정을 무수히 반복하고, 일상의 사소한 행위조차 이러한 시선으로 바라볼 때 비로소 통찰력이 자라난다.


통찰을 통해 얻은 지식은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다. 삶에서 체험한 감정과 사실, 그리고 본인의 의지가 혼합되어 독특하고 입체적인 구조를 지닌 거대한 물체와도 같다. '사랑'이라는 감정 하나를 보더라도 15살의 직관적인 사랑, 25살의 고뇌 섞인 사랑, 55살의 아련한 사랑, 85살의 어렴풋한 사랑은 그 깊이와 결이 완전히 다르다. 개개인마다 차이는 있겠으나, 삶의 시기가 지날수록 개념을 설명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점만은 동일하다.


대개 노래는 3분에서 5분 내외에 끝난다. 그 짧은 시간 안에 창작자가 의도한 깊은 의미를 모두 담아내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10대의 이찬혁은 생활 속에서 느낀 개념들의 특별한 의미를 직관적으로 담아내기에 최적의 상태였을 것이다. 당시 그의 통찰이 얕았을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통찰의 깊이가 얕다고 해서 그 가치가 낮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깊이가 얕았기에 그 개념들은 대중에게 훨씬 쉽게 다가갔고, 선량하고 아름다운 세상의 모습으로 비쳤을 것이다. 대중은 그 순수함에 열광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잃어버렸거나, 여전히 가르치고 배우길 원하는 세상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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