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큰 언니였던 이모
엄마는 희윤이를 하늘색 아기 이불에 둘러 싸매고 자랑스럽게 청파동 대문을 넘어왔다. 대림동 전셋집으로 쫓겨 간지 2년 만이었다. 외갓집으로 피신 갔던 혜진이도 데려왔다. 드디어 온 가족이 모두 함께 살기 시작했다. 희윤이를 돌봐줄 도우미 아줌마도 새로 왔다. 초로의 작고 빼짝 마른, 만성 위염으로 늘 입에서는 역한 냄새가 나는 분이었다. 바늘꼬챙이 같은 외모와 다르게 앙칼진 목소리 한 번을 내지 않고 나와 혜진이, 희윤이를 살뜰히 돌봤다.
아줌마는 늘 입맛이 없었다. 위가 아파 흰 죽을 간신히 드시는 날이 많았다. 소복이 담은 밥을 먹성 좋게 먹는 날 보며 잘 먹어서 아줌마도 입맛이 돈다고 웃으시곤 했다. 아줌마는 늘 입이 써서 잘 못 드셨지만 그래도 우리 삼 남매에겐 끼니마다 계란프라이를 부쳐주고 감자며 고구마를 쪄 간식으로 먹였다. 나는 노른자를 터트려 다 익히고 간장을 뿌려서, 혜진이는 항상 계란 노른자가 봉긋하니 솟아오르게 해서 케첩을 뿌려주었다. 찐 감자도 나는 소금, 혜진이는 설탕, 희윤이는 섞어서 다르게 내주었다. 각자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우리의 요구대로. 그녀는 이런 우리 삼 남매를 싫은 내색 없이 늘 다 들어주었다. 아줌마는 늘 바빴고 빼짝 마른 팔다리가 오동통해질 새 없이 늘 분주했다. 아줌마의 주요 업무는 툭하면 울며 제 머리를 바닥에 찧어대는 희윤이를 달래고 보살피는 것이었다. 참 고약한 성미의 아기였다. 그리고 간간히 인형 옷을 만들겠다며 바늘에 실을 꿰어달라는 나의 귀찮을 법한 부탁들을 끈기 있게 들어주었다.
내가 1학년이 되면서 집에 식구가 한 명 더 늘었다. 선아 이모였다. 우리 엄마도 나처럼 줄줄이 동생 많은 집에 첫째 딸이었고 선아 이모는 엄마의 12살 차이 나는 막내 여동생이었다. 큰딸이었던 엄마는 공부를 잘했지만 외할머니가 가난을 핑계로 2년제 교대를 보내줬다고 했다. 둘째인 큰 이모는 엄마보다 공부를 훨씬 잘해서 외할머니가 4년제 사대를 보내줬다. 셋째 딸이던 둘째 이모는 전문대를 졸업해서 유치원 선생님이 되었고 넷째 아들인 외삼촌은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경찰이 되었다. 막내딸이던 선아 이모만 유일하게 외할머니가 남은 힘을 쥐어짜 내 서울로 유학을 보내줬다. 공무원이었던 외할아버지의 박봉으로 자식 다섯을 키우며 전부 대학을 졸업시킨 외할머니는 그야말로 억척스러웠다. 엄마 말로는, 봄이면 병아리를 서른 마리, 토끼를 열 마리 사 와서 여름 내내 엄마와 이모들에게 개구리며 벌레를 잡아 오라 하고 토끼들 먹을 풀을 뜯게 하셨다고 한다. 그렇게 키운 닭과 토끼로 대가족의 귀한 단백질을 충당하셨다는 것이다. 외할머니는 그렇게 아끼고 애껴 자식 다섯을 전부 교육자와 공무원으로 키워냈다. 그 노고를 알면서도 큰 딸자식의 마음에는 늘 동생에게 양보해야 하고 부모로부터 빨리 독립해야 했던, 사랑을 덜 받은 생채기가 남았다.
큰 언니의 시어른들까지 함께 사는 큰집에서 선아 이모는 나의 형제들과 한방을 쓰며 서울에서의 대학 생활을 시작했다. 이모는 바쁜 엄마를 대신해 큰언니처럼 우리들을 돌봐주었다. 저녁밥을 먹고 나면 항상 설거지통에 수북이 쌓인 그릇들은 늘 선아 이모 몫이었다. 이모는 빨간 고무장갑을 끼고 뜨거울 정도로 물 온도를 높였다.
"이렇게 하면 오히려 손이 고와진다?"
그 많은 밥그릇과 국그릇들을 이모는 뽀드득 씻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