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동생이라서 좋아
”아유 도대체 아들인 거야, 딸인 거야? 왜 아직도 전화가 없니?”
할머니의 참을성이 점점 바닥나고 있었다. 간간히 혀 꼬부라진 목소리에 아빠가 이번에도 딸이니 기대도 하지 말라며 전화로 주정을 했다. 할머니의 성화를 견디다 못한 큰고모가 전화기 옆을 서성대다 병원에 전화를 했다. 엄마가 그랬다. 아들과 딸은 신생아 골격부터 다르다고. 딸만 둘 낳다가 아들을 낳으려니 온몸이 가루가 되는 듯 다 부서졌다고. 다 부서져 나온 엄마가 간신히 아들을 낳고 기절한 찰나 옆을 지키다가 “아들이에요? 딸이에요?” 다짜고짜 묻는 고모의 전화를 받은 외할머니는 기가 차고 화가 나서 “딸이에요!”라고 소리 지르고 전화를 끊었다.
정적이 흐르고 큰고모, 둘째 고모 그 자리에 있던 아빠의 자매들이 약간의 눈물을 글썽였다. 할머니는 표정 없는 얼굴이 되어 거실을 잰걸음으로 걸었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그 정적이 너무 싫었다.
“여동생이라고? 너무 좋아 내 옷도 물려주고 난 여동생이라 좋아”
할머니는 늘 정갈하고 단정했다. 단정한 머리, 고운 옷맵시, 흐트러지지 않은 말투, 나는 그런 할머니가 참 고상한 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6살 아이가 계단참에서 내뱉은 철없는 언행에 할머니는 얼굴빛이 붉은 지 푸른지도 모르게 헝클어졌다. 좀 전까지 전화기 앞을 서성이던 할머니가 순간이동하듯 내 앞에 서 있었다. 거위처럼 높은 톤으로 소리를 질렀다. 뒷걸음질 치다 계단 난간에 부딪힌 나는 경기하듯 몸을 떨며 증조할머니의 품으로 숨어들었다. 그 순간 전화벨이 다시 울렸다. 간신히 화를 삭인 외할머니였다.
“그 댁 귀한 장손이 태어났으니 다들 와서 아이를 보세요.”
수화기를 내려놓은 큰고모가 털썩 주저앉았고, 할머니는 입술을 깨물더니 조용히 양말을 꿰어 신고는 병원으로 향했다. 할아버지는 양복을 꺼내 입고 구두에 광을 냈다. 술에 취해 주정을 하던 아빠는 정신을 번쩍 차리고 아들을 보러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다시 술자리에 가서 거하게 한 턱 내었다. 나는 증조할머니 품속에서 웅크리고 바들바들 떨었다. 혜진이는 여전히 외갓집에 있었다.
집안의 장손, 셋째 희윤이가 태어나고 나서야 엄마는 다시 청파동 집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아들이 태어나고 나서야 온 가족이 한 집에 모여 살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엄마에게 수고했다며 부들부들 털이 가득한 검은색의 묵직한 무스탕을 사줬다. 혜진이는 드디어 ‘꼭지’ 노릇을 완수했다고 칭찬을 받았다. 자신의 이름 대신 얻어낸 남동생이 소중했는지 혜진이는 돌도 안된 희윤이가 성질을 부리며 지 머리를 꽝꽝 바닥에 부딪혀대면 손바닥으로 받쳐주며 시녀 노릇을 자처했다. 희윤이가 소변을 봤는지 대변을 봤는지 기저귀 상태를 가장 먼저 어른들에게 알려주는 것도 혜진이였다.
나는 희윤이가 바닥에 머리를 찧어대든지 말든지 기저귀에 오줌똥을 싸대든지 말든지 멀리서 쳐다만 보고 가까이하지 않았다.
‘먼 놈의 아기가 저리 성질머리 더럽고 제멋대로람’
엄마는 희윤이 기저귀를 갈아주다가 여차해서 오줌 세례를 얼굴에 맞으면 고추가 있어 오줌이 얼굴까지 온다며 웃어댔다. 뭘 해도 칭찬만 받는 희윤이가 나는 너무 질투 나고 미웠다. 나는 조용히 투명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