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윤이가 태어나던 날
6살이 되기 전에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대신 6살이 된 이후 또렷하게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다. 유치원 다녀오면 할머니가 쥐어주던 100원짜리 동전 하나. 정원의 조각상들. 해사한 웃음의 긴 생머리 유치원 선생님. 그리고 남동생 희윤이가 태어나던 날.
할아버지가 아무리 공부하라고 다그쳐도, 공부를 잘했던 큰고모에게는 한 번도 붙여주지 않은 과외선생님을 붙여놔도 아빠는 서울에서 대학을 진학하지 못했다. 그 덕에 홍성에서 공주교대로 유학 온 엄마와 서울에서 충남대학교로 유배 간 아빠가 만났다. 엄마의 첫 미팅이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이 너무나 로맨틱하다고 생각했다.
“아빠는 엄마 인생에 처음이자 유일한 남자야”
나 역시 엄마처럼 처음 만난 사랑하는 이와 평생을 함께 해야지. 엄마 아빠의 첫사랑의 결실은 엄마 23살 되던 해에 태어났다. 엄마가 막 학교를 졸업하고 첫 학교에 부임했을 때였고 아빠는 막 제대를 하고 졸업을 했을 때였다. 배 속에서부터 물 한 모금도 못 먹게 하고 우린 감만 먹게 만들었던 나는 태어나기도 전부터 딸이라고 티를 냈다. 할머니에게도 첫 자식은 큰고모였다. 큰고모는 할머니를 대신해서 큰 살림을 척척 도왔다. 나는 그나마 첫째 딸이라 아들이 아니었음에도 용서받았다. 대신 엄마 아빠를 도와 줄줄이 쏟아지는 동생들을 돌봐야 했다. 두 번째 딸이 태어났던 날 죽을 듯한 산고를 끝내고 기진맥진한 엄마 옆에서 할머니는 눈물을 쏟으며 오열했다. 다른 식구들은 아무도 엄마와 아기를 보러 병원에 가질 않았다. 그 길로 혜진이는 외할머니가 데리고 홍성 외가에 갔다. 청파동 할아버지가 지은 집 부엌 옆에 신혼살림을 꾸렸던 엄마 아빠는 내리 딸만 둘 낳고 이혼하라는 할아버지 성화에 쫓겨나듯 분가했다.
대림동 전셋집 그리고 지하셋방이 딸린 다세대 주택으로 이삿짐을 풀었다 쌌다 하며 엄마 아빠는 고단한 살림과 함께 집 평수를 늘려갔다. 그 와중에 엄마는 세 번째 임신을 했다.
‘이번에도 또 딸이면 정말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아기가 태어나기 전까지 엄마는 최대한 임신 사실을 숨겼다. 88년도 용띠의 해 많은 가정이 용띠 아들을 낳길 바랐다. 그런 이유로 ”공주님이네요“ 인 태아들은 태어나지도 못한 채 삶의 끈을 잘려버리는 일도 허다했다. 정부에서는 태아 성별 감별 및 그로 인한 선택적 낙태를 금지했다. 배가 불러오면서 엄마는 산부인과에 가서 눈물의 하소연을 했다고 했다.
”정말 저 죽어요, 선생님“
”파란 내복 준비하세요, 마음 편히 먹으시고요 “
그럼에도 마음이 너무나 불안했던 엄마는 불러오는 배만 내민 채, 셋째의 성별을 끝까지 숨겼다. 아빠에게 조차 말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엄마가 셋째를 낳으러 병원에 간 날 아빠는 아침 일찍부터 집을 나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나는 청파동 집 2층 올라가는 계단참을 오르락내리락 거리며 안 그래도 미치고 팔짝 뛰도록 심기가 사나운 할머니의 정신을 더 산란시키고 있었다.
”아유 도대체 아들인 거야, 딸인 거야? 왜 아직도 전화가 없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