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나의 고양이
우리 집은 효창공원을 오르는 길 모퉁이에 자리 잡은 2층 단독주택이었다. 아빠가 중학생이 되던 해 할아버지가 직접 지은 집이라고 했다. 할아버지는 종종 1층 외벽에 화강암을 쓰다듬으며 돌 하나하나 정성을 다해 지은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6살까지 그 집이 나의 세상이었다. 1층에는 큰 안방이 있고 거실 벽 한편엔 할아버지가 직접 주문해서 짜 넣은 오동나무 선반 위에 할아버지의 보물인 도자기 화병들이 놓여있었다. 거실 바닥은 직사각형의 무늬가 견조한 마루였다. 부엌에는 12인용 커다란 식탁이 놓여있었다. 부엌 옆은 나의 부모가 신혼살림을 꾸린 작은 방이 있었다. 2층에 제일 큰 방은 증조할머니 방이었고 그 방이 주로 내가 증조할머니 옆에서 잠들던 곳이었다. 먼저 시집간 큰고모를 빼고 나머지 고모들이 함께 쓰는 길쭉한 딸방 옆에는 홀아비 냄새 풀풀 풍기는 막내 삼촌이 혼자 자는 자그마한 아들방이 있었다.
가정집 밑에는 지하실 같기도 하고 창고 같기도 한 할아버지의 사업장이 있었다. 집 맞은편 인쇄소를 맞닿은 곳이 할아버지 사업장 입구였고 그 반대편 숙대를 오르는 길가에 대문과 정원이 있었다. 부엌에서 사업장으로 계단으로 연결되었고 정원 한 구석에 또 지하실처럼 사업장에 연결된 통로가 있었다. 나는 그 미로를 오가며 매일 모험을 했다.
정원에는 아름드리 대추나무가 주인이었다. 그 옆에 4월 한 달 흐드러지는 향기를 뽐내는 라일락 나무가 있었다. 봄에는 풀을 뜯어 돌로 찧었고 여름에는 시원한 마루에 얼굴을 대고 누워 바람 불기를 기다렸다. 가을에는 먹을 수 없지만 예쁜 빨간 열매들을 모았고 겨울에는 6살이 만들 수 있는 가장 크고 예쁜 눈사람을 만들었다. 정원 한 켠에 커다란 장독이 세 개 묻혀있었고 겨울이면 할머니가 장독에 김치를 묻었다. 할머니의 동치미는 예술이었다. 무와 소금만으로 시원하고 달콤한 정갈한 맛이 났다. 정원에는 어느 해에 심어둔 석류나무가 있었는데 영하로 떨어진 어느 추운 겨울에 얼어 죽어서 석류를 한 번밖에 따먹지 못했던 것이 기억난다. 증조할머니는 고무나무를 여러 화분 화분에 많이 키워냈다. 엄마 나무를 하나 커다랗게 키우고는 이파리를 한 개, 가지를 한 개 꺾어 흙에 푹 찔러 새로운 고무나무를 만들었다. 자꾸 자신의 오줌을 받아 화분에 거름으로 주곤 해서 할머니와 고모들은 찌린 내 난다고 싫어했다. 나도 몇 번 증조할머니를 돕느라 오줌을 빨간 대야에 받아 증조할머니에게 주었다.
생선반찬이 나오는 날이면 증조할머니는 생선토막을 조그맣게 챙겨두었다가 정원에 나가서 오가는 고양이에게 밥을 주었다. 고양이밥인데 살이 실하게 발려지면 내 입에도 쏙 넣어줬다. 햇살은 따스했고 할머니가 발라주는 생선살은 짭조름하니 맛났다. 고양이 밥을 주고 나면 증조할머니와 나는 배드민턴을 쳤다. 증조할머니는 아침마다 효창공원에 가서 다른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빅매치를 하고 오시는 실력자였고 귀여운 6살 증손녀는 할머니의 셔틀콕을 간신히 받아넘기는 수준이었다. 우리가 밥을 주는 고양이는 자주 털색이 바뀌었다. 주로 까만 바탕에 하얀 반점이 코나 가슴팍에 있는 고양이들이 많았다. 나는 노란 줄무늬의 고양이에게 밥을 주고 싶었는데 그런 치즈태비 고양이가 놀러 오는 일은 없었다. 어쩌다 행운의 상징이라는 삼색고양이가 오는 날은 무척이나 예뻐하며 가까이 가보려 공을 들였으나 고양이가 나에게 곁을 내주는 일은 별로 없었다.
자주 오던 까만 바탕에 가슴팍에 하얀 반점이 있던 고양이가 어느 날은 증조할머니가 만들어둔 라면박스 안에서 새끼를 낳았다.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던 녀석이 어느 날부터인가 자꾸 창문을 넘어 집 안으로 들어오려고 할 때 즈음이었다. 증조할머니에게는 머리도 부벼대고 자기 새끼도 만질 수 있게 해 주었다. 그 덕에 나도 아기고양이를 만져 볼 수 있었다. 아기 고양이들이 간신히 눈을 떴을 때 할아버지는 도둑고양이가 한번 새끼를 까기 시작하면 또 집에다 새끼를 친다며 엄마 고양이와 새끼고양이를 몽땅 자루에 넣어 오토바이로 빙글빙글 동네를 돌아 멀리에다 버리고 왔다고 했다.
‘할아버지 미워’
집도 못 찾고 더 이상 증조할머니가 주는 생선대가리도 먹지 못한 채 어딘가에 버려졌을 고양이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저며왔다. 속이 아려도 가장의 결정에 반대하고 토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밥도 주고 애정을 나눠 준 증조할머니조차 아들인 할아버지의 결정에 일언반구 하질 않았다. 울며 불며 떼 한번 못쓰고 마음속으로 작별인사를 했다. 그런데 엄마 고양이와 새끼고양이들은 며칠 뒤 다시 우리 집 정원에 얼굴을 내밀었다.
‘할아버지는 바보야. 고양이가 훨씬 똑똑해’
다행이었다. 고양이들의 평형감각과 귀소본능은 오토바이 뺑뺑이 몇 바퀴로 당해낼 수가 없었다. 꽁치 반찬이 나오는 날이면 아기고양이들에게 생선살을 발라줄 생각에 한껏 마음이 다시 부풀었다. 그 이후 아기 고양이들이 자라나는 기억이나 어디 이웃집이 귀엽다고 한마디 달라며 분양 간 기억은 없다. 그냥 어느 순간 다시금 고양이 가족은 안보였다. 6살의 기억은 그리 정교하지 못했다. 아마도 할아버지가 또다시 자루에 넣어 이번엔 더 멀리멀리 뱅글뱅글 더 많이 돌고 더 멀리 가서 버리고 왔으려나. 30살이 넘어서 엄마 아빠 동생들 나의 가족들이 그리도 끔찍이 싫어하는 고양이를 내가 키우게 되었을 때 엄마는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네가 어려서 증조할머니랑 그렇게 고양이 밥을 주더니 결국 이제 고양이를 집에서 키우는구나”
그때 엄마가 나의 기억의 파편을 모아 진실을 말해주었다.
“네가 어려서 아름다운 것만 기억에 남았나 보다”
증조할머니는 생선대가리를 모아 고양이 밥을 주었다. 종종 밥을 주는 이와 친해진 고양이가 손에 잡히면 건강원에 보내서 신경통 약을 다렸다. 증조할머니는 늘 무릎이 아프다고 하셨다. 자꾸 집에 고양이가 들락거리는 게 싫었던 할아버지는 고양이가 새끼까지 낳자 화를 내며 멀리 버리고 왔다. 나의 바람과는 반대로 고양이 가족은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다. 고양이라는 요물은 기가 막히게 집으로 돌아온다고. 할아버지의 체념 후 고양이 가족은 통째로 자루에 담겨 건강원에 보내졌다. 결국 고양이탕이 되어버렸다. 어쩐지 어느 날부터 안 보이더라니. 6살의 기억은 정말 그리 정교하지 못했다.
엄마는 한 가지 사실을 더 덧붙였다. 정원 한 켠 지하로 통하는 문 옆에 증조할머니가 닭장을 크게 지어 오리며 닭을 키웠다고 했다. 나는 그것 역시 기억나지 않았다. 엄마의 기억 속에 오리와 닭을 키우던 닭장은 귀여운 노란 병아리와 막 낳은 따끈한 달걀이 메인 테마가 아니었다. 새벽이면 닭장 옆에 쭈꾸려 앉아서 생 닭과 생 오리의 목에서 막 따낸 따끈한 피를 쭉쭉 빨아 드시던 증조할머니의 모습에 기겁을 하곤 했다는 게 엄마의 기억이었다. 정말로, 난 어려서 아름다운 것만 기억에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