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신. 나는 너를 외면할 수 없었다. 너가 내 이름을 알아버렸으니까.
방송부 그 애가 내 이름을 아는 것 같다는 걸 알게 된 건, 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였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교실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친구 지현이가 내 이름을 크게 불렀다.
"야, 수아야!"
나는 돌아보며 대답했고, 우리는 그렇게 복도를 걸으며 떠들었다. 그때 음수대 앞에서 누군가 고개를 들었다.
방송부 그 애였다. 우리 눈이 마주쳤고 그 애는 여전히 당황한 표정이었다.
'뭐지?'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지현이가 계속 말을 걸어서 나는 그냥 지나쳤다. 하지만 뒤돌아서면서도 그 시선이 느껴졌다. 등 뒤에서 누군가 나를 계속 보고 있다는 느낌.
'설마 내 이름 들은 거야?'
그 생각이 들자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아니, 소름까지는 아니고... 그냥 좀 이상했다. 불편하다는 느낌은 아니었는데, 그렇다고 기분 좋은 것도 아니었다.
'왜 저렇게 쳐다봐?'
교실로 돌아와 자리에 앉았지만 그 장면이 계속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그날 이후로 뭔가 달라진 게 있었다.
방송이 달라졌다. 정확히 말하면, 점심시간 음악 방송이 달라졌다. 전에는 그냥 흘러나오는 대로 듣던 음악이었는데, 이상하게 요즘 노래가 귀에 잘 들어왔다.
"야, 오늘 점심방송 노래 좋지 않아?"
지현이가 말했다.
"응, 그런 것 같아."
"요즘 선곡 센스 좋은 거 같은데? 누가 하는 거래?"
"글쎄, 방송부에서 하겠지."
나는 무심하게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알고 있었다.
'그 애가 하는 거겠지.'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다. 며칠 뒤, 또 마주쳤다. 이번엔 화장실을 다녀오는 길이었고, 나는 혼자였다. 방송부실 앞 복도를 지나가는데 그 애가 문을 열고 나오는 중이었다. 우리는 동시에 멈춰 섰다.
'아, 진짜.'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매번 이렇게 마주치는 게 우연일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애, 일부러 나오는 거 아니야?'
하지만 그 애의 표정을 보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오히려 더 당황한 건 그 애 쪽이었으니까. 나는 먼저 말을 걸었다. 이 어색한 분위기를 깨야 할 것 같았다.
"선곡 너야?"
그 애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노래 선곡 센스 좋다."
사실 그냥 하는 말이었다. 분위기를 풀어주려고 던진 말. 그런데 그 애의 반응이 예상 밖이었다. 얼굴이 새빨개졌다.
'헐, 진짜 좋아하는 거 맞네.'
그 순간 확신이 들었다. 친구들이 하던 말이 농담이 아니었다는 걸.
"... 고마워."
그 애가 겨우 내뱉은 말이 그거였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지나쳤다. 뒤돌아보지 않았지만 그 애가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을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교실로 돌아와 자리에 앉자마자 지현이가 물었다.
"야, 너 방금 누구랑 얘기했어?"
"아, 방송부 애."
"헐, 진짜? 뭐래?"
"아니, 그냥 노래 선곡 잘한다고 했더니 고마워 하더라."
지현이가 눈을 반짝였다.
"야, 걔가 확실히 너 좋아하는 거 같은데?"
"아, 몰라. 그냥 아는 사람이야."
나는 손을 내저었지만, 사실 나도 이제는 인정하고 있었다. 그 애가 나를 좋아한다는 걸.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그날 이후로 방송이 더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점심시간만 되면 자연스럽게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됐다. 어떤 노래를 트는지, 멘트는 뭐라고 하는지.
"야, 너 요즘 점심방송 열심히 듣네?"
지현이가 놀렸다.
"아니야, 그냥 들리는 거지."
"거짓말. 너 완전 집중하고 있잖아."
"아니라니까!"
하지만 지현이 말이 맞았다. 나는 듣고 있었다. 그 애가 트는 음악을, 그 애가 준비한 방송을.
왜 듣는지는 나도 잘 몰랐다. 그냥... 신경이 쓰였다. 누군가 나를 생각하면서 뭔가를 하고 있다는 게,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내가 듣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면 묘한 기분이 들었다. 부담스럽기도 하고, 조금은... 미안하기도 했다. 나는 그 애를 특별하게 생각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냥 복도에서 가끔 마주치는, 방송부 하는 조용한 애. 그 정도였다. 그런데 그 애한테 나는 뭔가 다른 의미인 것 같았다. 며칠 뒤, 또 복도에서 마주쳤다. 이번에도 눈이 마주쳤고, 그 애는 어색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진짜 아는 사람이 됐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답답했다.
'그냥 말을 걸면 되는데, 왜 저렇게 멀리서만 보는 걸까?'
그 애의 시선이 느껴질 때마다 나는 점점 더 의식하게 됐다. 복도를 지날 때, 점심시간에 방송을 들을 때, 심지어 쉬는 시간에 창밖을 볼 때도.
'지금 저 애가 어딘가에서 나를 보고 있을까?'
그 생각이 들면 자연스럽게 자세를 고쳐 앉게 됐고, 웃을 때도 조금 조심스러워졌다.
"야, 너 요즘 왜 그래?"
지현이가 물었다.
"뭐가?"
"자꾸 복도 쳐다보고, 방송 듣고. 설마 너도 그 애 좋아하는 거 아니지?"
"미쳤어? 아니야!"
나는 강하게 부인했다. 그리고 그건 진심이었다. 나는 그 애를 좋아하지 않았다. 관심도 없었다.
그냥... 신경이 쓰일 뿐이었다. 누군가 나를 좋아한다는 게, 누군가 나를 생각하면서 뭔가를 한다는 게, 그게 그냥...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동시에 알고 있었다. 이건 좋은 신호가 아니라는 걸. 내가 그 애를 의식하기 시작했다는 건, 이미 내 일상에 그 애가 들어와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날 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 애, 내 이름 외웠겠지?'
복도에서 지현이가 내 이름을 불렀을 때 그 애의 표정이 떠올랐다. 분명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외웠을 것이다.
'빨리 외웠겠네.'
그 생각이 들자 웃음이 나왔다. 좋아하는 사람 이름은 누구나 빨리 외우니까. 나도 중학교 1학년 때 좋아하던 선배 이름을 하루 만에 외웠었으니까.
'그 애도 그랬겠지.'
복도에서 한 번 듣고, 그날 밤 집에 가서 혼자 중얼거렸을 것이다.
수아.
수아야.
내 이름을 그렇게 불러봤을 것이다. 그 상상을 하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부담스럽기도 하고, 조금은 미안하기도 하고, 또 조금은... 모르겠다.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한숨을 쉬었다.
'그냥 모르는 척하자.'
그게 서로에게 좋을 것 같았다. 그 애는 멀리서 조용히 좋아하고, 나는 모르는 척하면서 가끔 인사만 주고받고. 그게 제일 편한 관계일 것 같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알고 있었다. 이미 늦었다는 걸. 그 애가 내 이름을 외운 순간부터, 나도 그 애를 완전히 모르는 사람으로 남겨둘 수 없게 됐다는 걸.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서로의 일상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한 명은 조용히 다가가고, 한 명은 애써 외면하면서. 그렇게 우리의 거리는 좁혀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