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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바다 May 30. 2024

모든 인간의 내면은 고귀하다

뤼트허르 브레흐만의 <휴먼카인드>를 읽고

나는 전에 모든 사람들이 선하다고 생각했다. 군대에 있었을때 선후임들과 "사람은 선할까"라는 이야기를 놓고 한창 싸운 적이 있었다. 누구는 선하다, 혹은 착하다는 정의부터 다시 내려야 한다부터, 너는 세상을 정확하게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까지.


내 의견과 가장 큰 이견이 있는 관점은, "자신의 이득이 없는데도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 것은 오히려 나쁜 저의가 있다."였다. 이런 관점을 갖고 있는 사람과 내 주장은 아예 접점이 없어 이야기 자체가 안 됐다. 과장되서 말하면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 나를 약간 덜 떨어진 사람으로 보기까지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기적 유전자"를 인용하여 생물학적으로 우리는 다 이기적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근원적인 생물학적인 관점이 그렇다고 하니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흠... 나는 아직 이 책을 끝까지 읽어보지 못했고, 어려워 아직 이해도 못했으니 그 책을 인용하지는 못하겠다. 그렇지만 내가 기억하기로는 그 이기성은 "유전자" 단위의 이기성이며, "인간"의 이기적인 행동을 말하는 게 아닌 걸로만 알고 있다.


유전자나 인간이나 어차피 인간도 유전자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게 그거 아니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환원론은 오류가 너무 많다. 이 세상의 대부분이 기본 원소로만 이루어졌는데도 세상은 이렇게 다채로울 수 있고, 훈민정음 28자모음으로 우리는 각양각색의 글을 쓸 수 있으며, 몇개의 음악 기호로 아름다운 노래를 만들어낼 수 있다. 원소나 그 기호 자체를 보고 아름답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것들의 결과물은 다른 관점으로 아름답다. 이기적이라는 말은 인간의 자유와 더불어 의도를 덧씌우니 거부감이 드는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사진: Unsplash의Giulio


어찌됐든 지금까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득이 없는데도 무언가를 하는 것은 나쁜 저의가 있다"는 관점은 진실을 토대로 말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뉴스 때문이라고 말한다.(노시보 효과와 가용성 편향이라는 인간의 특성도 이야기 하지만, 여기서는 생략.) 뉴스에는 기상천외한 이야기들이 나온다. 뉴스에 나온 이들은 대게 다 나쁜 놈들이다. 뉴스는 나쁜놈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 뉴스에서 너무 일상적인 일만이 나온다면 어떨까. 가령 내가 찍는 농부들의 일상 영상 중에 99프로는 그냥 일하는 영상이다. 뭔가 특별한 게 없다는 의미이다. 아마 이것들만 보여준다면 시청자는 지루해 죽을 것이다.


그런데 뉴스라는 것은 사건뿐만 아니라 타인(가령 여론)의 생각을 알 수 있는 지표이다. 뉴스에 범죄 이야기가 나오면 그것만이 진실인냥 생각할 수밖에 없다. 뉴스에 나오는 놈들은 나쁘니 그런 뉴스를 보며 타인은 악하다고 생각하는 게 이상한 건 아니다. 게다가 뉴스라는 간접 경험뿐만 아니라 자신이 살아왔던 삶의 굴곡들도 타인은 악하다는 생각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지옥같은 행위들을 하는 인간들이 많은 환경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분명 인간은 악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게 세상의 진실은 아니다. 모든 인간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자신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고 싶어한다. 그게 이기적인 이유든 아니면 정말 자신을 그렇게 바라보든 말이다. 그건 사실이다. 전에 넷플릭스의 <지상 최악의 교도소에 가다>라는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거기에서 어떤 범죄자가 자신을 보고 자신은 누구에게든 친절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라고 말한 것을 보았다. 물론 자신이 했던 범죄의 피해자에게는 정말 죽을 죄를 지었다느니, 내가 오해를 한 것이라느니 변명을 했지만 말이다. 그렇다. 모든 사람들은 선한 본심을 갖고 있을 터다. 그렇다면 왜 모든 이가 선한 사람이 되고 싶은 생각을 갖는 데도 세상은 다르게 보일까.

출처: Unsplash의Adam Nemeroff


저자는 선한 본심과는 다르게 (결과적으로) 인간의 행동이 이기적이게 될지 이타적이게 될지는 사회의 구조나 집단의 믿음 등에 따라 달라질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지금의 세태에서 우리의 문명, 계급 구조 등은 우리의 본성을 왜곡한다고 한다.


저자는 스탠리 밀그램의 복종 실험을 그 예로 든다. 많은 실험 참가자가 그 실험을 진지하게 받아드리지 않았다. 56%의 사람만이 이 고문이 사실이라는 것을 믿었다. 게다가 실험 참가자들이 타인을 향한 전기 고문을 실행에 옮긴 것은 실험이 궁극적으로 과학 사회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실험자 중 한 이는 “봉사를 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선善을 낳을 수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실험을 계속하세요. 정서가 뒤틀려 있는 이 미친 세상에서는 아주 작은 선이라도 소홀히 할 수 없어요”라며 실험에 참가했다.


내 관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선한 본성을 갖고 태어난다. 반면 자본주의엔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이며 개개인은 손해보는 짓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관점이 담겨 있다. 그게 우리의 선한 본성을 왜곡시킨다. 인간은 손해보는 짓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말이다. 오히려 손해보는 짓을 하는 사람은 멍청이던가 엄청 똑똑한 사람이다. "자신의 이득이 없는데도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 것은 오히려 나쁜 저의가 있다."는 말은 바로 이런 구조 위에서 득세하며 활를 친다.


그렇다고 자본주의 사회가 옳지 못하다거나 그런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아마 저자 또한 문명 사회구조 등 자체가 잘못됐다고 보지 않을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이기적 유전자"의 원리를 인간 세계에 본따 만든 것 같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어찌되었든 환원론적인 오류가 있지만) 자본주의 전부가 옳지 못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유전자의 세상이 우리의 세상과는 똑같을 수는 없다. 그러니 삐걱거리는 것 같다.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은 우리의 본성을 적확히 비추지 못한다. 하지만 기술이 늘 정답을 찾듯이 "우리의 염원 또한 그러하다면", 그 시스템에 관하여도 답을 찾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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