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다. 직업은 누군가의 필요에 따라 보수를 받기 위해 하는 일이다. 직업은 사회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 진 것이기 때문에 그 일이 사회통념적으로 직업이라는 것을 인정 받아야 한다. 가령 성판매자들은 불법적인 일을 하지만 일반 사람은 이를 그의 직업이라고 할 것이다. 반면 단순히 돌팔매질을 하는 것을 보고는 그것을 직업이라고 하지 않는다. 즉, 다른 사람의 필요가 먼저 존재해야만 그 행위가 직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직업에 따라 보수를 받는다는 점에서도 이를 설명할 수 있다. 필요 없는 행위를 돈 주고 사는 경우는 없다. 필요가 있어야 그의 행위(노동력)을 사려고 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직업은 나의 바람, 나의 욕구보다 먼저 존재하고 있다. 직업을 "선택"한다는 말에서도 직업이 나의 무엇보다 먼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나의 바람, 나의 욕구 등을 그 직업이라는 것에 끼워 맞출 수 있을까?
아직은 그렇지 못한 듯 보인다. 나는 직업이 없다. 직업이 없다는 걸 보고는 보통 무직, 혹은 백수라고 한다. 나는 놀고 먹고 싶고,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싶다. 보통 이런 사람을 보고 철이 덜 들었다고 한다. 난 누군가를 만나기 귀찮고, 싫다. 누군가는 좋아서 혹은 돈을 벌기 위해서 밖에 나가 타인을 위해 일을 하지만 나는 그게 싫다. 그래서 한 때는 농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저 내가 먹고 싶은 걸 경작하고 남은 걸 팔면 되니까 말이다.
나를 크게 비난하지는 말았으면 한다. 나는 게을러서가 아니라 정말 다른 사람이 시키는 일이 하기 싫다. 뭐, 어쩔 수 없이 일을 해야할 때도 있지만 그렇다고 나는 그것을 내 직업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나를 사회에 일조하는 사람으로도 보지 않았으면 한다. 나는 내가 사회에 일조하기 위해, 누군가의 필요에 부응하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먹고 살기 위해 일하는 것이다. 나와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사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사람이 좋고, 다른 사람이 필요한 것을 해주는 것에 기쁨을 느끼는 사람 말이다. 나도 그러고 싶을 때가 가끔 있다.
아직도 나는 내가 사회에 겉도는 것만 같다. 뭔가 확고하게 자리 잡힌 게 없다. 나는 그럴 듯한 직업과 직장이 없고, 그럴듯한 삶을 살고 있지 않는 것 같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옳은 무언가를 생산해 내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의 요구를 들어주는 그런 것도 아니다. 그러니 사회적인 비난은 합당하다. 나는 그런 사회적 비난도, 내 처지도 그저 받아 드리고 있다. 다만 개인적으로 듣기 싫을 뿐이다. 과거에 들었던 "커서 뭐가 될거니"가 요즘은 "뭐해 먹고 살 거니"로 바뀌고 있다. 어렸을 적의 기만이 현실로 바뀌고 있는 것만 같다. 뭐, 어쨌든 지금 잘 살고 있으니 무엇이든 해서 먹고 살고 있는 것 아닐까 한다. 번지르르한 직업, 직장이 없는 것만 견디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