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상은 미팅룸에서 시작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료를 받기 전부터 시작된다.
소개를 통해 간단한 전화 통화를 하고, 이후 이메일로 자료를 요청한다. 일반적으로 투자자 입장에서는 비밀유지서약서(NDA)를 쓰지 않는 것을 선호하고, 투자를 모집하는 입장에서는 NDA나 최소한의 보호 장치를 마련하는 쪽을 선호한다. NDA를 쓰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상대방의 아이디어를 외부에 이야기하거나, 그 아이디어로 사업을 하지는 않겠지만, 협의 가능한 부분이라면 굳이 내 자유도를 미리 제한할 필요도 없다.
마찬가지로 스타트업 입장에서도 NDA를 썼다 하더라도, 정보를 제공받은 사람이 신의성실의 의무를 무시하고 해당 정보를 사적 이익에 활용할 수 있다는 점, 혹은 실제로 그런 사례가 있었다는 점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정 수준의 보호 장치를 요구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선택이다.
“통화 즐거웠습니다. 보다 자세한 설명을 듣기 전에, 간단히 확인할 수 있는 자료를 먼저 보내주실 수 있을까요?”
NDA 없이 티저 자료를 받아 딜을 1차로 검토하고, 내부 논의를 거친다.
프로젝트를 검토한 결과, 우리의 전략적 니즈와 부합한다고 판단했고, 보스턴으로 가서 주요 운용 인력들과 미팅을 진행하기로 했다. 우리 측에서는 투자 담당자인 나와 전결권을 가진 임원급 인사가 참석하기로 한 상황이었다.
보스턴 미팅 참석자 리스트를 받았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누가 오는가’가 아니라 ‘누가 오지 않는가’였다. 주요 펀드 매니저들은 참석 예정이었지만, 대표 펀드 매니저와 한 명의 교수가 불참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 교수는 AI 분야의 최고 권위자로, 해당 펀드의 투자 전반에 걸쳐 기술 자문을 맡고 있었고, 무엇보다 이 펀드의 ‘구심점’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그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질문은 하나였다.
"미팅에 없는 한두 명이, 우리의 합의를 뒤집을 수 있지 않을까."
잘못된 세팅에서 말을 잘하는 것, 혹은 유의미한 협의를 도출하는 것은 사실상 의미가 없다. 그때부터 우리는 보스턴 방문 일정을 MIT 소속 스타트업 쪽에도 공유하기 시작했다. 공식적으로 알리지는 않았지만, 네트워크 안에서는 우리가 간다는 정보가 자연스럽게 돌도록 했다.
물론 라이브 딜에 대한 정보는 기본적으로 기밀이다. 투자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다른 투자자나 집단이 딜에 개입하거나 우리의 딜을 통해 이익을 취하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클로징 데드라인이 얼마 남지 않은 딜일수록 이런 위험은 더 커진다.
하지만 우리의 니즈가 이미 명확해진 상황에서, 확실하지 않은 투자 하나만을 위해 반나절을 온전히 쓸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나 자신의 Brown과 MIT 시절 경험을 되돌아보면, 이 예쁘고 작은 캠퍼스 타운에서 어울리지 않는 정장을 입은 한 무리의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눈에 띈다. 복도를 걷는 걸음의 속도와 소리부터가 다른 이 사람들이 우리 교수를 만나고 미팅을 한다는 사실은 꽤 인기 있는 가십의 주제였고, 그만큼 비밀이 없기도 했다. 어떤 교수가 진행하는 프로젝트에 어떤 기업이 와서 관심을 보였다더라 하는 이야기들은 지루한 학교생활 속에서 나름의 재미였고, 잘 다니던 대기업을 때려치우고 유학길에 오른 석사생에게는 다음 학기에 어떤 랩 소속의 조교를 하는 것이 얇은 유학생의 지갑 사정에 도움이 될지 그리고 물론 커리어에도 어떤 의미가 있을지를 판단하는 데 유의미한 정보였다. 물론 지성인의 공간인 만큼 금액과 조건까지 공유되는 경우는 없었던 것 같지만, 학교 안에는 생각보다 비밀이 없다.
당일치기 보스턴 출장 일정에서 MIT에서만 네 개의 기업을 만났고, 틈을 내어 컨설턴트와 관련 투자 심사역들도 만나 커피와 점심을 먹었다. 우리가 타깃으로 삼은 AI 펀드는 일정의 마지막에 배치했다. 이는 단순한 동선 최적화가 아니었다. 타깃 한 투자가 성사되지 않을 경우를 대비한 차선책을 마련하고, 동시에 외부 옵션을 강화하기 위한 세팅이었다. 앞선 미팅에서 만난 파운더들 중 몇 명은 교수들과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미팅이 끝나면 자연스럽게 “그럼 오늘 저녁에 교수님을 뵙나요?” 같은 이야기가 오간다.
이런 대화는 단순하지만 효과적이다. 이러한 관계의 확장은 당장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사람과 사람의 연결을 통해 이후의 투자 가능성을 열어준다. 동시에 비교적 작은 MIT, 혹은 특정 커뮤니티 안에서 우리의 존재감을 강화하고, 회사 내부에서 나의 영향력 역시 자연스럽게 확대된다.
이처럼 앞선 몇 차례의 미팅을 통해 이해관계자들이 하나둘 엮이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이 딜이 성사되지 않더라도 선택할 수 있는 다른 가능성과 여지를 점차 확보하게 된다. 앞서 설명한 Lax와 Sebenius의 3D 협상 프레임워크에서 말하는 BATNA (Best Alternative To a Negotiated Agreement), 즉 현재의 협상이 결렬되더라도 현실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 무엇인지를 미리 만들어가는 과정이 이 시점에서부터 작동하기 시작하는 셈이다.
예정된 AI 펀드 운영진과의 첫 대면 미팅에서 우리는 투자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돈 이야기를 일부러 뒤로 미뤘다. MIT에서 펠로십을 했던 경험과 함께, 그날 만난 MIT 출신 컨설턴트와 창업자들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꺼내며, 나 역시 당신들과 같은 커뮤니티에 속해 있다는 인상을 주고자 했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초기 기업을 돕는지, 이미 관계를 맺고 있는 다른 아이비리그 대학들과의 협업 경험을 어떻게 연결할 수 있는지, 그리고 투자 외적으로 제공할 수 있는 리소스가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최근의 일화와 실제 케이스를 곁들인 이런 대화를 통해, 딜을 단순한 ‘재무적 거래’가 아니라 ‘협업 가능한 플랫폼’으로 재정의했고, 조건과 조건의 조율은 자연스럽게 이 미팅의 중심에서 밀려났다.
그리고 그날 나는 노트북을 열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꼭 원하는 프로젝트가 있을 때 취하는 행동 중 하나인데, 적어도 대화를 리드하는 담당자는 노트북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원칙 때문이다. 대신 펜과 노트를 꺼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한다. 특히 사업체나 아이디어, 제품을 만들고 자신과 팀의 일에 자부심을 가진 사람일수록 더욱 그렇다. 하지만 노트북은 우리 사이에 벽을 만드는 느낌이다. 시선을 나누고 키보드는 대화의 리듬을 끊는다. 반면 종이는 다르다. 고개를 들었다 내렸다 하는 그 짧은 리듬이, 상대에게 ‘지금 내가 경청받고 있다’는 감각을 준다.
가장 보수적이고 핵심적인 교수들이 자리에 없는 상황에서, 굳이 논의를 앞당길 필요는 없었다. 그날의 목적은 가능한 한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 것, 그들이 가장 신경 쓰고 있는 일에 대해 충분히 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보통 미팅이 어느 정도 진행되면 투자자 입장을 정리하거나 협상으로 넘어가야 할 타이밍이 온다. 분위기를 정리하고, 다음 단계를 제시하며, 딜을 앞으로 밀어야 하는 순간이다.
하지만 그날은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았다. 협상에서 가장 빠른 실수는, 상대가 아직 설명해야 할 것이 남아 있을 때 내가 먼저 정리해 버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