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T AI Fund 케이스 (3/3)

피봇과 딜메이킹

by James

6. 피봇

보름 남짓의 시간이 지난 뒤 진행된 두 번째 미팅은, 준비 단계부터 확연히 달랐다. 훨씬 더 매끄러운 진행이었고, 이미 한 팀이 된 듯한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두 번째 미팅의 참석자 리스트에는 모든 의사결정권자가 포함되어 있었고, 장소 역시 달랐다. 첫 번째 미팅에 불참했던 교수가 소속된 랩에서 미팅이 진행되었으며, 일정이 허락된다면 MIT의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디어 랩(Media Lab)을 포함해 몇 개의 랩을 함께 둘러보고 소개해 주겠다는 이야기도 덧붙여졌다.


이처럼 상대방이 배려해 주었다거나 신경을 써주었다는 인상을 받았을 때, 협상에 들어가기 전에는 가능하면 그 감정을 그대로 두지 않는 것이 좋다. 대표적인 상호성의 원리(Reciprocity Principle) 때문이다. 이는 의식적인 판단이라기보다는 자동 반응에 가깝다. 누군가가 먼저 호의를 보이면, 상대는 일종의 ‘빚진 느낌’을 받게 되고, 그 결과 직접적인 보답이 아니더라도 말투나 태도, 결정 과정, 협조 수준에서 보다 우호적으로 변하게 된다.


마침 주어진 몇 주의 시간 동안 나는 내부 보고와 투자위원회(Investment Committee, IC) 설득을 마무리한 상태였고, 그 덕분에 우리 쪽에서도 투자 담당 최고 책임자(Chief Investment Officer, CIO)가 미팅에 동행할 수 있었다. 그 자체로 하나의 메시지였고, 상대의 배려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기도 했다. 이 딜이 단순히 담당자 개인의 관심사가 아니라 조직 차원의 의지라는 신호였고, 보름 남짓한 시간 동안 우리 역시 해당 프로젝트를 긍정적으로 검토해 왔다는 표현이었다. CIO와 함께 방문한다는 답변으로, 배려에는 배려로 응답했다.


7. 협상결과

미팅은 순조롭게 시작되었다. 주요 의사결정권자를 포함해 새롭게 합류한 인원들에게 지난 미팅에 대한 리캡을 공유했고, 현재 딜의 상태와 각자의 선택지를 어떻게 비교하고 조율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다.


앞선 보스턴 방문에서 우리는 다른 스타트업, 컨설턴트, 투자자들을 만나며 동부의 몇몇 다른 펀드들도 검토한 상태였다. 핏이 맞는 곳이 있다는 점 역시 내부적으로는 이미 확인하고 있었다. 물론 이 사실을 이름이나 숫자로 나열하지는 않았다. 상대방 역시 우리만이 유일한 옵션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BATNA는 소리 내어 말할수록 약해진다. 선택지가 존재한다는 ‘공기’만으로 충분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Thomas Schelling은 억제(deterrence)는 실행이 아니라 존재의 문제라고 설명했다. 무기는 사용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의 선택지를 좁히기 위해 존재한다.


우리의 실제 관심사(Underlying Interests)는 처음에 이야기했던 대로였다.

• MIT/Harvard를 통한 새로운 기술 익스포저, 투자기회 확보

• AI 최고 권위자 및 연구 생태계와의 지속적인 접점

• 우리의 기존 산학협력 포트폴리오와의 연계 확장


반면 표면적인 입장(Position)은 초기 단계 투자에서의 밸류에이션 업사이드, 그리고 AI·딥테크 스타트업에 대한 재무적 투자로 정리될 수 있었다. 표면적 입장과 실제 관심사는 일부 겹쳐 있었지만, 우리에게 이 딜의 중심은 ‘수익률’이 아니라 ‘접점’과 ‘확장’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건 협상에서 굳이 공격적으로 나갈 이유는 없었다.


무엇보다 우리가 집중하고 있던 협상 항목과 별개로, 우리의 실제 관심사가 충족된다는 점은 이미 이전 미팅의 편안한 대화 속에서 기정사실에 가까워져 있었다.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투자를 한다면 실제 관심사의 전부를, 투자를 하지 않더라도 상당 부분을 협업이나 다른 구조를 통해 확보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AI 펀드 입장에서도 단기 수익보다 연구 성과의 장기적 확장과 시장 연결을 이해하는 안정적인 투자자군을 형성하면서, 학교와 교수진 중심의 산학협력 구조를 훼손하지 않고 외부 자본을 유입할 수 있는 균형점을 만들 수 있었다. 특히 우리가 이미 보유하고 있던 산학협력 포트폴리오와의 연계는 양측 모두에게 분명한 시너지를 주는 지점이었다. 사실 그 지점부터는 오히려 투자조건에 대한 협의는 단순해졌다.


전술은 단순했다.

• 처음에는 표면적 입장에 부합하는 다소 큰 요청을 던지고

• 현실적인 실제 관심사 수준으로 물러나되, 상대가 ‘양보를 얻었다’고 느끼게 만들고

• 우리 측의 양보는 한 번에 하지 않고, 조금씩, 그러나 의미 있게 조율한다


그렇게 투자는 조율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상대방 대표 펀드 매니저가 농담처럼 말했다.

“보스턴은 랍스터가 유명하잖아요. 다음에 오시면 랍스터라도 한 번 같이 먹으러 가시죠.”


8. 마무리

이 딜의 협상은 밸류에이션에서도, 협상 테이블에서도 시작되지 않았다. 협상은 누가 미팅장에 들어오고 들어오지 않았는지,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말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언제 말을 꺼내지 않았는지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글의 초반에서 던졌던 질문으로 돌아가 보면, 이 에피소드는 협상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 보다 먼저, 협상은 언제부터 시작되는가에 대한 답에 가깝다. MIT와 하버드의 Lax와 Sebenius 교수가 말한 것처럼, 협상의 성패는 말과 전술 이전에, 협상 테이블에 앉기 전의 세팅에서 상당 부분 결정된다.


이 딜에서 중요한 순간들은 대부분 테이블 밖에 있었다. 누가 의사결정권자로 자리에 앉는지, 어떤 관계를 먼저 만들 것인지, 어떤 선택지를 남겨둔 채 미팅에 들어갈 것인지, 그리고 어떤 이야기를 굳이 하지 않기로 결정했는지가 이후의 흐름을 만들었다. 조건과 숫자는 그다음에 따라붙은 결과였다.


그래서 이 협상은 상대를 설득한 이야기라기보다, 협상이 자연스럽게 흘러갈 수 있는 구조를 먼저 만들어 둔 과정에 가깝다. 테이블 위에서 무언가를 얻어내기보다, 테이블에 앉기 전에 이미 선택지를 설계해 두는 것. 그것이 이 딜에서 가장 결정적인 전략이었다.


결국 협상은 말을 잘하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 아니다. 언제 말을 하지 않을지를 알고, 어떤 순간에 테이블에 앉을지를 선택하며, 그 이전부터 이미 방향을 정해두는 계획과 설계의 영역에 더 가깝다.



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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