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T AI Fund 케이스 (번외)
학자마다 접근 방식은 다르지만, Alexander Todorov의 ‘0.1초 판단’과 Nalini Ambady의 ‘Thin-slicing’ 이론처럼 많은 학자들이 첫인상에 관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사실이 하나 있다. 첫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형성되며, 이후의 대화는 그 판단을 수정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위를 따라가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첫인상이 만들어지는 ‘수 초’라는 시간은 상대를 깊이 평가하거나 성격을 파악하는 구간이 아니다. 그보다는 상대를 인지하고, 위협이 없는지 판단하고, 어떤 태도로 말을 시작할지를 결정하기 위한 최소한의 시간이다. 얼굴을 보고, 자세와 복장을 훑고, 눈을 마주치고, 첫인사를 주고받는 바로 그 짧은 구간이 이에 해당한다.
Todorov가 말한 0.1초의 판단은 이 과정의 출발점이고, Ambady의 Thin-slicing은 그 이후 몇 초 동안 축적되는 미세한 단서들이 빠르게 하나의 가설로 정리되는 과정을 설명한다. 그래서 ‘수 초’란 어떤 초능력처럼 사람을 단번에 꿰뚫어 보는 시간이 아니라, 첫마디가 나오기 전에 이미 대화의 방향이 정해지는 구간을 의미한다. Dale Carnegie의 How to Win Friends and Influence People이나 Daniel Kahneman의 Thinking, Fast and Slow 같은 커뮤니케이션과 의사결정의 고전들 역시 반복해서 이 지점을 다룬다.
이미 수많은 실용 심리학 저서와 연구자들이 이 주제를 다뤄왔다. 그래서 이 부분을 굳이 이론으로 확장하기보다는, 협상과 대화가 주요 업무인 뉴욕 직장인의 아주 구체적인 디테일 하나로 생각해 보면 충분하다.
한국에서 해외 취업이나 투자 심사역 관련 강연을 할 때면, 미국 회사 문화가 얼마나 수평적인지, 복장은 얼마나 자유로운지에 대한 질문을 자주 받는다. 나 역시 미국에 오기 전까지는 상당히 자유롭고 수평적인 분위기를 상상했기 때문에 꼭 짚고 넘어가는 부분이 있다. 테크 업계와 전통적인 금융업계의 문화는 생각보다 큰 차이가 난다는 점이다.
금융, 특히 뉴욕을 중심으로 한 동부의 전통 금융권은 여전히 정장을 선호하고, 조직 내 위계와 직급 체계도 비교적 명확하다. 이 이야기를 할 때면 내가 처음 미국 회사에서 인턴십을 했던 경험을 함께 꺼낸다. 석사 과정과 인턴십을 병행하던 시기였는데, 수업이 끝나자마자 화상 미팅이 잡히는 바람에 그대로 검은색 맨투맨 차림으로 회의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미팅은 잘 끝났지만, 그날 멘토가 따로 전화를 걸어 조심스럽게 말했다. 가능하면 카라가 있는 옷을 입는 게 좋겠다고. 다른 인턴들에게는 그런 말이 없어서 조금 억울했지만 결국 나만 리턴오퍼를 받았으니, 미래 후배를 위한 평판관리였다고 생각하며 감사한 마음이다.
그리고 다소 미신처럼 들릴 수 있지만, 월스트리트에는 오래된 말이 하나 있다. 갈색 구두를 피하라는 이야기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이유는 꽤 극적이었다. 트레이딩 플로어에서 상승장을 상징하는 황소의 색이 갈색인데, 갈색 구두는 황소를 죽여 만든 가죽을 신는 것이라 선호하지 않는다는 설명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혼자 이런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색깔이 문제가 아니라, 소가죽 자체가 문제 아닌가.
물론 요즘 이 이야기를 진지하게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리고 이 이야기가 사실이냐 아니냐 역시 이제는 중요하지 않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분명하다. 증권사와 같은 공간에는 여전히 이런 미신 같은 규칙이 살아 있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엄격한 복장에 대한 기준이 암묵적으로 제시된다는 점이다.
글을 쓰며 찾아보니, 19세기에서 20세기 초 금융권에서 복장은 단순한 취향이 아니라 계급을 드러내는 표식에 가까웠다고 한다. 당시 갈색 구두는 ‘일하러 온 사람’의 신발이 아니라, 여유가 있는 사람의 신발로 인식되었다. 사냥이나 승마 같은 야외 활동을 즐기던 지주나 젠트리 계급의 상징에 가까웠던 것이다. 반대로 검정 구두는 석탄 난방, 잉크, 먼지, 비처럼 일상적인 오염이 덜 드러났고, 근면함과 규율, 중립성을 중시하던 금융권의 이미지와 더 잘 맞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단순한 도시 전설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가디언, 로이터, 마켓워치등에서 비슷한 맥락의 기사와 언급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나는 나든 상대든 복장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편이다. 그래서 몇 가지 간단한 룰을 세워 두었다. 옷에 특별한 철학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바쁜 아침마다 복장 앞에서 쓸데없는 에너지를 쓰지 않겠다는 아주 사소한 결심이다.
첫 미팅에서는 거의 늘 같은 복장을 고른다. 남색 정장, 검정 구두. 그리고 VC에 온 이후로는 가능하면 노타이. 액세서리는 눈에 띄는 것을 하지 않는다. 벨트와 시계줄은 신발 색과 통일하는데, 어차피 검정 구두만 신기 때문에 검정이면 충분하다. 스타트업을 만날 때는 스마트워치를, 조금 더 전통적인 은행이나 기관을 만날 때는 오토메틱 시계를 고른다. 이것 역시 대단한 철학 때문이 아니라, 시계 배터리를 갈 필요가 없다는 실용적인 이유에서 두 가지 시계를 사용한다.
다만 콘퍼런스나 엑스포처럼 다수의 불특정 다수를 만나는 자리에서는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이런 경우에는 대화의 실마리를 하나 만들어 주고, 서로의 시간을 최대한 아끼는 편이 좋다. 활동성을 위해서 정장에 재킷은 입지 않고, 회사나 내가 센터장으로 있는 대학교 로고가 들어간 조끼를 입는다. 미국에는 흔히 말하는 ‘판교 개발자 룩’처럼 ‘파이낸스 브로 룩’이 존재하는데, 이럴 때 옷을 잘 입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어디에 속해 있는지를 설명하는 복장이라고 생각한다. 긴 설명 없이도 내가 어떤 카테고리에 있는 사람인지 보여주는 셈이다.
Finance bro의 복장은 구글에 검색만 해봐도 비슷한 이미지가 쏟아질 정도로 하나의 고정된 스타일을 갖고 있다. 대체로 정장 바지에 셔츠, 그리고 파타고니아 같은 브랜드의 조끼를 걸친 모습이다. 재킷을 입기에는 격식이 과하고, 캐주얼한 차림으로 가기에는 역할과 소속이 분명히 드러나며 아직까지 보수적인 환경이 만든 복장이다. 이 복장은 개성을 드러내기보다는 소속과 역할을 빠르게 설명하는 데 더 적합하다. 실제로 이런 이미지가 단순한 밈이나 인터넷 농담만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도 있다. 2025년 영국의 패션 브랜드 Reiss는 런던에서 이른바 finance bro 스타일을 소재로 한 짧은 플래시몹 영상을 공개했는데, 정장 바지와 셔츠, 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동시에 등장하는 이 영상은 이 복장이 얼마나 특정 집단의 상징처럼 굳어졌는지를 오히려 분명하게 보여준다.
어쨌든 다시 옷으로 돌아오면, 자선 행사나 공식 이벤트처럼 회사의 이름으로 참석하는 자리에서는 회사 배지나 회사 로고로 만든 커프스 링크를 착용한다. 정장에 구멍을 내는 것이 싫어서 배지는 크게 선호하지 않는 편이라, 커프스 링크는 한국에 휴가로 갔을 때 주문 제작했다. 미국에서는 이런 수제작이 한국만큼 흔하지 않아서, 대표와 담당 임원에게 기념품으로 선물하기도 했다. 이런 이벤트에 나를 불러준 데 대한 감사와 애사심을 보여주는 작은 디테일이라고 생각한다. 배지는 하나지만 커프스는 두 개니까, 애사심도 두 배라는 농담도 덧붙일 수 있다.
반대로 의도적으로 피하는 것도 있다. 앞서 이야기했듯 개인적으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지만, 불필요한 메시지를 줄 수 있는 갈색 구두는 피한다. 발표를 하거나 연단에 오르는 경우에는 조명에 빛이 반사될 수 있는 안경도 쓰지 않는다. 실무 미팅이나 실사가 있는 날에는 메탈 워치를 피하는데, 금속이 표면에 닿을 때 나는 소리를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사무실에 있는 날이나 식사 자리가 포함된 일정에서는 향수도 사용하지 않는다. 디렉터급 전략 회의처럼 많은 사람이 참석하는 중요한 미팅에서는 윈도페인(Windowpane)이나 글렌 체크(Glen check))처럼 패턴이 있는 정장은 눈에 띄고 (패턴만큼 빈틈이 많아 보이는 느낌이다) 반대로 회색 정장은 존재감이 거의 없어 보여야 할 때 선택적으로 활용한다.
옷이 대화를 하기 전 첫 번째 시각적 신호라면, 명함은 그다음에 따라오는 첫 번째 정보 신호다. 나는 명함을 꺼내는 타이밍이 늘 조금 늦다. 먼저 이름을 말하고, 몇 문장을 나눈 뒤에야 명함을 건넨다. 그 사람이 나를 누구로 기억할지, 짧은 몇 줄의 글자로 고정되기 전에 말부터 남기고 싶어서다.
옷은 벗을 수 있지만, 명함은 한 번 건네면 회수할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은 내가 무엇을 입었는지 금세 잊어버리지만, 내가 건넨 명함은 그 사람이 가져간다.
명함을 한 번 꺼내서 보자. 본인의 것도 좋고, 최근에 받은 명함도 괜찮다. 명함에는 생각보다 많은 것이 담겨 있다. 이름, 회사, 직함, 이메일, 전화번호.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선택의 흔적이 남아 있다. 종이의 질감과 두께, 미묘한 색감의 차이, 영문 혹은 한자, 이름을 어떤 방식으로 표기했는지, 개인 연락처를 어디까지 공개했는지까지. 하지만 한정된 지면에 ‘생각보다 많은 것’ 외의 정보는 적혀 있지 않다.
명함을 정리하다 보면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는 사람이 있고 명함을 받던 순간부터 대화까지 유독 생생한 사람들이 있다. 내 경험상으로는 정보를 많이 주는 사람이 열린 사람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필요한 만큼만 주는 사람이 더 오래 기억된다.
명함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영화 장면이 있다. 크리스천 베일이 등장하는 아메리칸 사이코의 명함 신이다. 이번에 글을 쓰면서 영화의 명함 장면을 다시 돌려봤다. 그리고 하나의 디테일이 눈에 들어왔다. 명함에 적힌 “Mergers & Aquisitions”. 가장 엘리트 한 단어가 가장 기본적인 철자조차 틀린 채 적혀 있었다. 그게 단순한 소품 실수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폰트와 종이의 질감, 워터마크까지 완벽함을 강박적으로 추구하는 장면 속에서 정작 아무도 내용을 읽지 않는다는 사실은 의도된 영화적 장치처럼 느껴졌다. 현실에서도 중요한 정보보다 폰트와 질감 같은 요소가 맥락을 흐리는 순간을 자주 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대부분 회사에서 기본으로 제공하는 명함을 써왔다. 그런데 이번 회사에서는 승진과 함께 명함을 직접 선택할 수 있었다. 그때 처음 알았다. ‘그냥 하얀 종이’라고 생각했던 명함에 이렇게 많은 종류와 질감, 심지어 미세한 색의 차이까지 존재할 수 있다는 걸. 영화 속 그 장면처럼 종이와 폰트, 간격을 놓고 비교하며 나 역시 꽤 오랫동안 고민했다. 몇 분 후 에는 기억하지 못할 차이를 몇 번이고 손끝으로 확인하면서.
내가 선택한 건 비교적 간단한 정보만 담은 레이즈드 잉크 명함이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눈에 띄기 위해서가 아니라, 의식하지 않아도 느껴지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예전에 비슷한 명함을 받은 적이 있다. 처음에는 그 디테일을 정확히 인식하지 못했지만, ‘뭔가 다르다’는 감각만 남았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앞서 복장에 대해 이야기했던 예시를 빌리자면, 이 선택 역시 “콘퍼런스나 엑스포처럼 다수의 불특정 다수를 만나는 자리”를 위한 준비와 비슷하다. 수천 장의 명함 사이에서 기억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만 VC라는 직업의 특성상 테크 회사 사람들을 만날 때는 상황이 달라진다. 그들은 대개 명함을 쓰지 않는다. 그럴 때면 마치 흑백 무성영화 속 찰리 채플린이 뉴발란스 운동화를 신고 후드를 쓴 개발자와 존재할 리 없는 목소리로 자기소개를 해야 하는 상황 같은 우스꽝스러운 이미지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럴 땐 어쩔 수 없다. 재빨리 폰을 꺼내 LinkedIn QR 코드로 연결을 맺는다.
명함이 사라진 시대라 해도, 명함이 작동하던 논리는 여전히 유효하다.
무엇을 지금 당신에게 보여줄지보다, 무엇을 당신에게 남길지를 선택하는 일.
그리고 정장과 명함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첫마디를 하기 전에 이미 이미 전달되는 것들을 미리 준비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