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은 늘 “건강한 얼굴“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전쟁을 앞두고, 조약문에 서명하고, 반란의 소문을 듣는 자리에서 왕이 갑자기 배를 움켜쥐거나 화장실을 찾는 모습은, 그 자체로 정치적 사건이 되지요. 특히 “소변”은 더 그렇습니다. 가슴 통증은 영웅적 서사로 포장될 수 있어도, 소변이 막혀서 쩔쩔매는 장면은 권위의 연출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몸은 정직합니다. 권력의 무게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죠. 우리가 흔히 '남자의 병'이라 부르는 전립선 문제나 요로감염, 결석 같은 질환들은 왕이라고 해서 피해 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높은 자리에 있을수록 체면 때문에 끙끙 앓다가 병을 키우기 십상이었습니다.
찰스 2세: ‘왕의 치료’가 왕을 더 아프게 하다
새벽 두 시, 런던 화이트홀 궁전의 침실에는 아직도 촛불이 일렁입니다. 두꺼운 커튼이 바깥공기를 막아 눅진한 기운이 방 안에 고여 있고, 침대 곁에는 주치의들이 근심 어린 얼굴로 서성입니다. 하인들은 쟁반을 든 채 소리 없이 오가며 분주하게 움직이죠. 이 방을 짓누르는 것은 왕의 머리맡에 놓인 왕관의 무게가 아닙니다. 생과 사의 경계에서 무너져 내리는 왕의 몸, 그중에서도 꽉 막혀버린 소변길이 만들어낸 고통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찰스 2세는 어느 날 “갑자기 쓰러졌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뒤 며칠 동안, 그의 몸에는 피를 빼고, 억지로 토하게 하고, 설사를 시키고, 부항을 뜨고, 자극적인 약을 먹이는 처치들이 폭포처럼 쏟아집니다. [1][2]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잔인할 정도로 과격합니다. 하지만 당시 의학은 몸속의 ‘나쁜 것’을 빼내면 사람이 좋아진다고 믿었습니다. 문제는 그 ‘나쁜 것’이 병이 아니라, 왕의 신체에 꼭 필요한 수분과 전해질이었다는 겁니다.
콩팥이 무너지면 피 속 노폐물이 쌓이고, 그 노폐물은 결국 뇌를 흔듭니다. 의식이 흐려지고 경련이 찾아오며, 몸의 감각과 판단이 갑자기 낯설어지기도 합니다. 오늘날의 분석을 바탕으로 보면 찰스 2세의 마지막은 ‘요독증(uremia)’으로 설명되곤 합니다. 왕은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야, 자기 몸이 자기 나라보다 먼저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지도 모릅니다.
피를 빼고 설사를 시키면 몸의 물이 빠집니다. 콩팥은 탈수에 특히 약합니다. 콩팥이 버티지 못하면 뇌가 흔들리고, 그 결과가 경련과 의식 변화, 그리고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주치의들은 분명 왕을 살리고 싶었을 겁니다. 다만 그 정성들이, 아이러니하게도 왕의 콩팥을 더 몰아붙였습니다.
사무엘 페피스: 요로결석 수술 기념일을 만든 남자
왕이 아니어도 시대를 대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무엘 페피스. 런던의 해군 행정가이자, 무엇보다도 일기로 유명한 인물입니다. 그의 일기는 전쟁과 정치뿐 아니라, 한 인간의 몸을 놀라울 만큼 솔직하게 기록합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요로결석으로 고생했습니다. 배뇨통과 빈뇨, 잔뇨감, 때로는 피 섞인 소변까지, 현대 환자분들이 말씀하시는 그 고통의 묶음이지요. 1658년 3월 26일, 페피스는 마침내 결심합니다. 수술입니다. 마취도 없고, 소독 개념도 희미했던 시대의 수술은 대개 침실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몇 사람이 환자를 붙잡고, 외과의가 회음부 쪽을 절개해 방광결석을 꺼내는 방식이었습니다. 페피스의 결석은 성공적으로 제거되었고 , 그 이후로 그는 매해 수술일마다 축하 행사를 열기로 결심했으며, 실제로 몇 년 동안 그렇게 했습니다. [3][4][5]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대륙을 삼킨 야망, 방광에 발목 잡히다
워털루 전투의 그 운명적인 날을 상상해 보세요. 하늘에선 비가 퍼붓고, 땅은 발이 푹푹 빠지는 진흙탕입니다. 대포 바퀴는 진흙에 박혀 꼼짝도 하지 않죠. 역사학자들은 보통 이 패배를 두고 '전략적 미스'나 '연합군의 기막힌 타이밍'을 논합니다. 하지만 의학의 돋보기를 들이대면 전혀 다른 범인이 등장합니다. 바로 나폴레옹의 '방광'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나폴레옹은 만성적인 배뇨통과 요로 증상에 시달렸습니다. 심지어 워털루 전투 당일, 그의 결정적인 실책 원인이 '급성 방광염'이었다는 학술적 가설까지 존재합니다. [6]
천하를 건 운명의 결전을 앞두고, 황제의 아랫배에는 쥐어짜는 듯한 통증이 몰려옵니다. 소변은 마려워 죽겠는데 막상 나오지는 않는 그 괴로움. 현대의 직장인들도 화장실 문제 하나에 업무 집중력이 바닥을 치는데, 하물며 유럽의 지도를 다시 그려야 할 황제는 어땠을까요? 권력은 대륙을 지배했을지언정, 요의(尿意)만큼은 지배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조금 더 은밀하고 흥미로운 이야기가 하나 더 있습니다. 나폴레옹을 따라다니는 가장 유명한 '험담' 중 하나는 그가 '왜소 음경'이었다는 설입니다. 사후 부검의 기록이나 그를 시기했던 정적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의 '그것'은 고작 포도주 병을 막는 코르크 마개 정도의 크기였다고 하죠. 물론 이는 영웅을 깎아내리려는 후대의 과장일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재미있는 상상을 해볼 수 있습니다.
"혹시 나폴레옹의 멈추지 않는 정복욕은, 바지 속의 콤플렉스를 지도 위에서 보상받으려는 심리가 아니었을까?"
남성으로서의 작은 열등감이 커지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다른 분야에서 압도적인 '거대함'을 증명하고 싶어 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신체적 약점을 가리기 위해 더 큰 칼을 휘두르고, 더 넓은 영토를 차지하며, 세상에서 가장 높은 왕좌에 오르려 했던 것이죠.
어쩌면 나폴레옹에게 유럽 대륙은 자신의 존재감을 증명하기 위한 거대한 '확대 수술'의 현장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내 몸의 사이즈는 작을지언정, 내 제국의 사이즈는 그 누구보다 거대하리라!"라는 외침이 그의 정복 전쟁 이면에 숨어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 꽤 그럴듯하지 않나요?
나폴레옹 3세: 돌 하나가 황제의 시대를 끝내다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을 가진 또 다른 황제, 나폴레옹 3세는 비뇨의학사에서 훨씬 더 선명한 사례입니다. 그는 말년에 방광결석으로 고통받았고, 당시의 유명한 외과의 헨리 톰슨(Sir Henry Thompson)이 치료에 관여합니다. [8][9]
톰슨은 칼로 배를 갈라 돌을 꺼내는 전통적인 방식 대신, 몸에 칼을 대지 않고 요도를 통해 집게발 달린 길 빨대 같은 기구를 넣어 결석을 잡아서 부수는 쇄석술(lithotrity)을 적극적으로 밀던 인물이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1873년 1월 초, 톰슨은 나폴레옹 3세에게 기구를 넣어 치료를 시도했고, 안타깝게도 며칠 뒤 황제는 사망합니다. 당시 자료들은 요로 감염, 패혈증 같은 합병증 가능성을 말합니다. [10] 사실 지금도 요로결석 치료를 하는데에 있어서 의사들이 가장 걱정하는 합병증이 요로감염, 패혈증입니다. 당시 의술로는 감염을 통제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겠지요.
어쨌든 이 사건이 흥미로운 이유는 단순히 황제의 죽음 때문만은 아닙니다. 나폴레옹 3세의 죽음은 당시 의학계를 뒤흔들던 ‘현대적 치료법’을 둘러싼 거대한 공개 논쟁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칼로 직접 열어서 돌을 꺼내는 고전적인 외과 수술이 더 안전한가? 아니면 몸에 칼을 대지 않고 요도로 기구를 넣어 돌을 부수는 새로운 쇄석술이 미래인가? 의사들 사이에서 격렬한 찬반양론이 터져 나왔죠.
한쪽에서는 "혁신적인 쇄석술이야말로 환자의 고통을 줄이고 회복을 빠르게 한다!"라고 주장했고, 다른 한쪽에서는 "새로운 기술은 아직 검증되지 않았으며, 감염이나 잔여 결석 같은 위험이 크다 “고 반박했습니다. 황제의 죽음은 이 논쟁에 불을 붙여, 언론과 대중까지 가세하는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의학은 과학의 영역인 동시에, 사회의 가치관과 윤리, 그리고 대중의 시선이 복합적으로 얽히는 '사회학'의 영역임을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었죠. 황제의 방광 속 작은 돌멩이 하나가, 결국 의학의 방향을 두고 벌어진 대중적 논쟁의 거대한 도화선이 된 것입니다. [10]
환자분들이 가끔 이렇게 물으십니다. “원장님, 요로결석이 그렇게 큰일이에요?”
네, 때로는 제국의 운명만큼 큰일이었습니다.
표트르 대제: 제국을 흔든 것은 방광이었다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는 강한 남자의 상징처럼 남아 있습니다. 서유럽을 직접 돌아다니며 배를 만들고, 도시를 새로 세우고, 제국의 몸집을 키운 사람. 그런데 말년의 표트르는 제국보다 작은 것과 싸웠습니다.
말년의 기록을 보면, 그는 요로와 방광 쪽 문제로 반복적으로 고통을 받았고, 결국 소변이 막혀 처치를 받았다는 서술이 나옵니다. [11][12] 그에게는 의사들이 있었고, 도구도 있었고, 궁정은 무엇이든 구해오는 곳이었지만, 병의 완고함은 왕의 의지를 비웃었습니다. 그는 일의 흐름을 멈추지 못했습니다. 아프면서도 정사를 보려 했고, 병이 잠잠해지면 다시 무리했습니다. 그 무리가 다시 막힘과 통증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떤 전기적 정리에서는 그의 사인이 요로 폐쇄로 인한 급성 신부전으로 추정된다고 말합니다. 표트르의 죽음은 ‘권력의 실패’가 아니라, ‘배뇨의 실패’였던 것입니다.
한반도의 왕들: 실록에 남은 “임질”이라는 단어
이제 이야기를 한반도로 가져오겠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왕의 병증이 놀랄 만큼 구체적으로 적힙니다. 그중 독자를 가장 당황시키는 단어가 “임질(淋疾)”입니다. 현대 한국어에서 임질은 곧바로 성병을 떠올리게 하니까요.
그런데 실록의 “임질(淋疾)”은 현대의 ‘임균성 요도염’과 1:1로 대응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전통 의학에서 淋은 ‘소변이 시원치 않고, 아프고, 자주 마렵고, 때로는 피가 섞이는’ 여러 증후군을 묶는 범주였고, 그 안에 돌로 인한 “석림(石淋)” 같은 분류도 포함됩니다. [14]
세종의 기록이 대표적입니다. 실록에는 세종이 오랫동안 소갈과 부종으로 고생하던 중 “임질”을 다시 앓고 있다는 식의 병력 서술이 등장합니다. [15] 이 문장을 오늘날의 언어로 너무 성급하게 번역해 버리면, 성군에게 불필요한 오해를 얹게 됩니다. 오히려 당시의 ‘임질’이 어떤 범주의 배뇨장애를 뜻했는지, 그리고 그가 실제로 어떤 증상을 겪었는지를 차분히 복원하는 쪽이 바람직합니다.
성종도 예외가 아닙니다. 성종 16년 1월의 기록에는 “임질에 걸려 경연에 나가지 못한다”는 전교가 보입니다. [16] 왕이 공식 일정에서 빠지는 이유가, 그날의 국제정세가 아니라 배뇨 문제였던 겁니다. 그리고 중종의 말년 기록에는 “소변은 잠시 통했으나” 같은 문장이 등장합니다. [17]‘잠시 통했다’는 표현 자체가 이미 질병을 겪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통하는 것과 안 통하는 것 사이에서, 건강은 급격히 나빠집니다.
왕의 병은 결국 인간의 병입니다.
소중한 건강에 대해 이야기할 때, 어떤 주제는 유독 조심스러워지기 마련입니다. 특히 남성의 비뇨기 건강은 오랫동안 터부시되어 온 영역 중 하나이며, '왕의 병'이라고 불리던 특정 질환들이 그 대표적인 예이죠. 사실 이 ‘왕의 병’은 왕실만의 특별한 고통이 아니며, 사실 우리 주변의 많은 남성이 겪는 흔한 어려움과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우리는 소변이나 성기에 대한 이야기는 부끄럽고 더럽다고 여기거나, 남성이라면 아픔쯤은 묵묵히 참아내는 것이 미덕이라고 배워왔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병을 인지하더라도 선뜻 드러내지 못하고 혼자 감내하려는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왕들이 그랬듯, 현대 사회의 많은 남성 또한 이러한 침묵 속에서 병을 키우곤 합니다. 하지만 이 선택이 결국 더 큰 고통과 합병증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역사 속 '왕의 질병'이 유난히 두드러졌던 또 다른 이유는, 그들의 생활 습관이 비뇨기 질환의 위험 요인들을 한데 모아놓았기 때문입니다. 과도한 염분과 지방, 고기 위주의 식단에 물은 적게 섭취하고, 잦은 음주는 탈수와 소변 농축을 반복시켰습니다. 움직임이 적고 화장실 가는 것을 미루는 습관, 그리고 현대 의학적으로 감염 위험을 높이는 행동들까지. 역사책에 '향락'으로 기록된 그들의 삶은, 의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탈수, 고염식, 고단백식, 그리고 감염 위험의 증가'로 명확히 해석될 수 있습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진 오늘날, 많은 남성이 의도치 않게 과거 왕들의 생활 습관을 답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와 마찬가지로, 부끄럽다는 이유로 자신의 몸이 보내는 신호를 외면하고 병을 키우는 안타까운 상황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병은 신분이나 지위, 혹은 자존심을 가리지 않습니다.
문제를 숨길수록 건강은 더욱 악화됩니다. 용기를 내어 솔직하게 마주하고 전문가와 함께 해결해나가야 합니다. 당신의 소중한 건강을 지키는 첫걸음은, 바로 '숨기지 않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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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Aronson JK, Heneghan C. The death of King Charles II. Centre for Evidence-Based Medicine (CEBM), University of Oxford [Internet]. 2018 [cited 2025 Dec 29].
[2] Crawford R. The last days of Charles II.London; 1909.
[3] The Diary of Samuel Pepys (Encyclopedia). Bladder and kidney stones. PepysDiary.com [Internet]. [cited 2025 Dec 29].
[4] The Worshipful Company of Barbers. On this day 26 March: Samuel Pepys lithotomy. [Internet]. [cited 2025 Dec 29].
[5] Pepys S. Diary entry: 26 March 1660. The Diary of Samuel Pepys, PepysDiary.com [Internet]. [cited 2025 Dec 29].
[6] Hatzinger M, Stastny M, Haferkamp A. Turning points in world history: did Napoleon Bonaparte have a cystitis during the battle of Waterloo in 1815? Urologe A.2011 Mar;50(3):343-347. doi:10.1007/s00120-010-2503-5.
[7] Lugli A, Carneiro F, Dawson H, Fléjou JF, Kirsch R, van der Post R, et al. The gastric disease of Napoleon Bonaparte: brief report for the bicentenary of Napoleon’s death on St. Helena in 1821. Virchows Arch.2021 Nov;479(5):1055-1060. doi:10.1007/s00428-021-03061-1.
[8] EAU History Office (Uroweb). Thompson, Sir Henry (1820–1904). [Internet]. [cited 2025 Dec 29].
[9] British Association of Urological Surgeons (BAUS) Museum. Sir Henry Thompson. [Internet]. [cited 2025 Dec 29].
[10] Moll FH, Krischel M, Fangerau H. Napoleon III and his bladder stone: a royal patient and the public debate to popularize modern treatment modalities. J Urol.2011 Apr;185(4 Suppl):e416. doi:10.1016/j.juro.2011.02.1071.
[11] Wikipedia contributors. Peter the Great. In: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Internet]. [cited 2025 Dec 29].
[12] Russia Beyond (RBTH). The final days of Russian tsars. 2021 [Internet]. [cited 2025 Dec 29].
[13] Eknoyan G. Michelangelo: art, anatomy, and the kidney. Kidney Int.2000 Mar;57(3):1190-1201. doi:10.1046/j.1523-1755.2000.00947.x.
[14] 정승기. 고려 시대의 질병용어와 그 의미. 한국학중앙연구원 (KCI/학술자료 PDF). (전통 의학의 淋疾 범주 및 분류 맥락). 조선왕조실록
[15]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세종 21년 6월 21일 기사: 소갈·부종과 함께 언급되는 임질 병력 서술). 조선왕조실록
[16]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성종실록 (성종 16년 1월: “임질에 걸려 경연에 나가지 못함” 관련 일별 목록/기사). 조선왕조실록
[17]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중종실록 (중종 39년 10월 25일 기사: “소변은 잠시 통했으나…” 등 병세 기록). 조선왕조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