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by 혜림

벌써 서른다섯이다.

나는 아직도 엄마랑 같이 산다.


출근하고, 퇴근하고, 집에 오면 엄마가 차려준 저녁을 먹는다. 서른이 되면 독립하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요즘 서울 월세는 쉽게 결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미루고 미루다 보니 어느새 다섯 해가 지났다.


그렇다고 아주 게으르게 살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제대 후 대학원까지 마치고 취직이 조금 늦었을 뿐이고, 생활비도 제때 드린다. 아침마다 알람 대신 엄마 잔소리로 하루를 시작하는걸 빼면, 꽤 평범한 어른의 생활이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나 싶은데, 그때는 대학교에서 배운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꼈다. 주변 친구들이 하나둘씩 취직할때 나는 도서관만 들락날락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살다 보니 어느덧 서른 중반이 됐다. 이제는 진짜 독립할때가 되었는지 아침마다 알람소리 대신 엄마 잔소리로 하루를 시작한다. 결혼은 언제할 거냐는 말과 승진 얘기, 옆집 승호는 벌써 가정을 꾸렸다는 말도 빠지지 않는다.

어느 날, 카카오톡 친구 목록을 무심코 넘기다가 현주 사진이 눈에 띄었다. 대학원에서 함께 공부하던 후배였다. 문득 뭐 하고 지내나 궁금해져 채팅창을 열었다.


2022년 10월 12일.

“졸업 축하해요 오빠!”

“고마워 현주.”


그게 마지막이었다.


언제 연락이 끊겼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여자랑 사적으로 대화해본 게 언젠지 가물가물해서, 뭐라고 보내야 할지 한참을 고민했다. 결국 전송 버튼을 눌렀다.


“현주야, 잘 지내?”


전 남자친구도 아닌데 ‘잘 지내?’가 너무 없어 보이지는 않을지, 괜히 머리를 쥐어뜯으며 잠들었다.


아침 여섯 시.

알람 소리에도 잘 못 일어나는 내가 카톡 알림 하나에 눈을 떴다. 현주였다.


“저야 잘 지냈죠! 엄청 오랜만이네요?”


여전히 밝고 명랑하네, 라고 생각했다. 이모티콘 하나를 고르다 말고 그냥 글자만 보냈다.


“진짜 오랜만이다. 잘 지내는 거 같아서 다행이네.”


답장은 생각보다 빨리 왔다.


“요즘 뭐하고 지내세요?”


요즘 뭐 하냐는 질문은 늘 애매했다. 회사원이 회사랑 집 말고 뭐가 있나 싶다가도, 글자를 썼다 지웠다 하며 최대한 성실하게 답했다. 회사 얘기, 연구실 얘기 같은 재미없는 근황들뿐이었다. 그럼에도 현주는 중간중간 “ㅋㅋ”를 붙여가며 맞장구를 쳤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조금 기뻤다.


현주가 가르치는 학생들 이야기, 대학원 시절 에피소드들을 주고받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메시지를 몇 번 주고받았을 뿐인데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사실 나는 대학원 내내 현주를 좋아했었다. 내성적이었던 나는 한번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채 시간이 흘렀고, 그렇게 연락도 자연스럽게 끊겼다. 이제는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때의 감정이 다시 떠올랐다.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먼저 말을 꺼냈다.

“시간 되면 얼굴이나 볼래?”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괜히 휴대폰을 뒤집어 놓았다.


“좋아요! 나도 오빠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다’는 말이 이렇게 쉽게 쓰이는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 문장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약속 장소를 정하고 화면을 껐는데, 검은 화면에 비친 내가 지나치게 들떠 보여 괜히 화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우리는 현주가 근무하는 학교 근처 카페에서 만났다. 평일 오후라 그런지 학생들보다는 동네 사람들이 더 많았고, 현주는 교문 근처에서부터 나를 발견했는지 먼저 손을 흔들었다.


“오빠, 여기!”


하얀 블라우스에 베이지색 치마를 입고 달려오는 모습이 괜히 슬로우모션처럼 보였다. 대학원 시절과 크게 달라진 건 없었지만, 여전히 싱그럽고 예뻤다.


“선생님이라더니, 진짜 선생님 같다 야.”

내가 농담처럼 말하자 현주가 웃었다.

“장난 그만 치고 얼른 카페가서 수다 떨어요.”


카페에 앉아 커피를 시키자 대화는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학생들 이야기, 학교 이야기, 퇴근 후 일상 같은 것들. 현주는 말을 하다가도 자주 웃었고, 내가 말하면 고개를 끄덕이며 끝까지 들어주었다.


“오빠는 대학원 끝나고 바로 회사 들어간 거죠?”

“응. 좀 늦었지.”

“에이, 늦긴요. 요즘 취직이 얼마나 어려운데요.”

현주는 늘 그랬다. 상대 기분을 상하게 할 만한 표현은 하지 않았다.


“우리 파스타 먹으러 갈래요? 이 근처에 괜찮은 데 있어요.”

밥까지 먹자고 먼저 말하는 걸 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현주를 따라 나서면서 속으로 이미 다음 만남을 떠올리고 있었고, 식당 문 닫을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다, 현주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괜히 콧노래를 흥얼거리자 엄마가 부엌에서 물었다.
“오늘은 뭐가 그렇게 좋아?”

“그냥.”


나는 얼른 방에 들어와 현주와의 대화를 곱씹었다. 오늘 했던 말들과, 하지 못한 말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그날 밤, 현주에게서 먼저 메시지가 왔다.


“오늘 즐거웠어요. 오랜만이라 더 반가웠고.”


존댓말 같기도 하고 반말 같기도 한 그 애매한 거리감이 괜히 마음을 설레게 했다.


“나도. 다음에 또 봐요.”


답장을 보내고 나서야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두 번째 만남은 그다음 주였다. 이번에는 현주가 먼저 약속을 잡았다.

“주말에 시간 돼요? 오빠한테 줄 거 있어.”


두 번째 만남에 벌써 선물이라니, 괜히 기대가 됐다. 퇴근길에 백화점에 들러 향수 하나를 샀다. 과한가 싶다가도 포장까지 부탁했다.


이번에도 분위기는 비슷했다. 현주는 나보다 먼저 걸었고, 나는 그 옆에서 보폭을 맞췄다.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쓸데없는 얘기를 하다가도 웃음이 났다. 왜 이제야 만났을까 싶다가도, 미리 만났더라면 지금과는 또 달랐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혼자 앞서갔다.


집에 데려다주고 차에서 내리기 전, 현주가 가방을 뒤적이다가 종이 하나를 꺼냈다.


“나 오빠한테 줄거 있다고 했잖아. 이거예요.”

“뭔데? 나도 현주한테 줄 거 있어.”


처음에는 무슨 초대권인가 싶었다. 접힌 종이를 펴는 데 몇 초가 걸렸고, 그사이 나는 우리가 다음 데이트때 갈 장소를 떠올리고 있었다.


청첩장이었다.


“나 다음 달에 결혼해요. 오빠한테는 꼭 드리고 싶었어요.”

현주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나는 잠시 말을 잃은 채 청첩장을 다시 한 번 내려다봤다. 날짜, 장소, 이름. 하나같이 또렷하게 적혀 있었다. 괜히 한 번 더 읽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축하해.”


한참 뒤에야 그 말이 나왔다. 머리가 잠깐 멍해졌다.


“저한테 줄 거 있다면서요. 그건 뭐예요?”

기대하고 표정으로 묻는 현주를 보면서도, 차마 향수를 꺼낼 수는 없었다.


“응. 집에 놓고왔네. 다음에 줄게.”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을 아무거나 골라 일단 뱉었다. 그 순간에는 그냥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현주는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오늘 나와줘서 너무 좋았어요. 결혼식 때 꼭 와요.”


그 뒤로 현주가 무슨 말을 더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내비게이션에 집 주소를 찍고 차를 몰았다. 이렇게까지 엄마가 있는 집이 그리웠던 적이 있었나 싶었다. 돌아오는 길에 청첩장을 가방에 대충 넣어두고도 몇 번이나 다시 꺼내 봤다.


집에 도착하자 엄마가 물었다.

“오늘은 어땠어?”

“그냥.”


나는 그렇게 대답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청첩장을 서랍에 넣고 침대에 누웠다가, 문득 생각했다. 몇 시간 전의 나는 분명 어딘가로 가고 있었는데, 지금의 나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있는 기분이었다.


청첩장을 다시 꺼내 책상 위에 올려두고 날짜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토요일이었다.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캘린더에 일정을 하나 적었다.


현주 결혼식


그리고 그 아래, 엄마가 말해둔 장보는 날을 체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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