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인간] 조선 최고의 재벌, 이렇게 썼다.

9화 이건영,이석영,이철영,이회영,이시영,이호영

by 초로의 궁사

(8화에 이어서)

백사 이항복, 혹은 오성 대감 이항복은 광해군 대 인목대비 폐모론에 반대하다 끝내 유배지에서 생을 마쳤다. 절개와 의리를 택한 최후였다. 그러나 개인의 몰락과 달리 그의 가문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후 경주 이씨 가문에서는 재상만 여덟 명이 배출되었고, 이항복이 일군 한양과 경기 일대의 방대한 토지는 10대에 걸쳐 가문의 경제적 토대가 되었다.
그 정점에 선 이들이 바로 한말의 ‘6형제’—이건영·이석영·이철영·이회영·이시영·이호영이었다. 그들은 당대 조선에서 손꼽히는 거부(巨富)였다.

그러나 1910년, 나라의 운명이 다하자 그들은 가장 백사공파다운 선택을 한다.

만주의 칼바람 속으로 던진 수조 원의 가치

우당 이회영을 비롯한 여섯 형제는 결단했다.
종로 필운동 배화여고 교정에 남아 있는 이항복의 옛 집터, 독립운동을 모의하던 상동교회와 명동 일대의 대규모 토지, 포천의 광대한 전답까지. 오늘날 가치로 수조 원에 이르는 재산을 급매한 뒤, 그들은 압록강을 건넜다. 지천명을 넘긴 나이에 선택한 것은 안락한 노후가 아니라 만주의 혹독한 겨울이었다.

“대장부가 세상에 태어나 명문거족이라 한들 무엇하겠는가.
나라가 망했으니 마땅히 죽어야 하거늘,
죽지 못한다면 독립운동이라도 해야 한다.”

그들이 세운 신흥무관학교는 독립군의 산실이 되었다. 그러나 현실은 처절했다. 조선에서 고기를 씹던 대감들은 만주에서 좁쌀 한 줌으로 끼니를 때웠다. 독립자금을 대느라 옷은 해졌고, 굶주림은 일상이었다. 이회영은 끝내 일제의 고문 끝에 순국했고, 나머지 형제들 역시 타국에서 영양실조와 병마로 차례로 생을 마쳤다.

홀로 살아남은 막내, 대한민국 부통령 이시영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온 이는 오직 한 사람, 다섯째 성재 이시영뿐이었다.
그는 형제들의 꿈이었던 독립국가에서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이 되었다. 여섯 형제의 전 재산과 생애 위에 세워진 나라에서, 그는 가문의 마지막 증인이었다.
그러나 지천명을 지나 산수를 바라보는 노정치가의 앞길은 또 다른 가시밭길이었다. 그는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국정 파탄을 지켜보며 다시 한 번 가문의 선택을 반복한다.

“국민에게 사죄함이 마땅하다.”​

1951년, 국민방위군 사건과 거창 양민 학살이 발생하자 이시영은 대통령에게 직언을 멈추지 않았다. 끝내 그는 “국민의 고통에 책임을 지겠다”며 부통령직 사임서를 제출한다. 권력의 정점에서 스스로 내려온 선택. 그것은 정치적 패배가 아니라 불의에 동조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이후 그는 이승만과 결별하고 민주적 정권 교체를 위해 대선에 나섰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다.

꼿꼿한 선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오늘날의 자본은 인간의 얼굴을 갖지 않는다. 국적도, 윤리도 없이 오직 이윤과 효율만을 향해 증식한다. 주식회사라는 제도를 통해 모두의 소유가 된 자본은, 역설적으로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는 물신(物神)이 되었다.
물론 소수 오너의 사욕에 좌우되는 천민 자본주의보다 다수 주주의 이익을 중시하는 시스템이 더 나은 선택일 수 있다.

그러나 가끔은—아주 가끔은—경주 이씨 백사공파처럼 사람의 얼굴을 한 부(富)가 그립다.

그들은 진정한 부란
무엇을 얼마나 가졌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위해 기꺼이 버릴 수 있는가로

증명된다는 사실을
삶 전체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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