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인간] 조선 최고의 재벌, 이렇게 벌었다.

8화 이항복

by 초로의 궁사

청년기의 부가 ‘남보다 더 많이 가지는 것’ 혹은 ‘성공의 증거’였다면, 지천명의 부는 ‘나다운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자유’에 가깝다. 무작정 모으는 대신, 그 돈으로 어떤 경험을 하고 누구와 온기를 나눌 것인가를 묻는 단계다. 부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그렇다면 역사 속 인물들은 어떤 철학으로 부를 대했을까.

흔히 조선의 선비라 하면 부와는 거리가 먼 존재로 그려진다. 찢어지게 가난하지만 자존심만은 하늘을 찌르고, 늘 나라를 걱정하며 시대를 한탄하는 딸깍발이. 혹은 고결한 얼굴 뒤로 권력과 뇌물을 움켜쥔 위선자로 소비되곤 한다.

하지만 이는 절반만 맞는 이야기다.

의외의 생활력, 조선 선비​

조선의 선비 역시 철저한 생활인이었다. 다만 그들이 맡은 생산활동은 육체노동보다는 관리에 가까웠다. 가문 소유의 토지를 직접 일구기보다는, 소작인을 고용해 소출을 관리하는 일종의 ‘화이트칼라 농업’이었다.
자연재해 리스크를 분산하기 위해 토지를 전국에 흩어 소유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만큼 관리 난이도도 높았다. 평판 관리에 실패하면 소작인의 집단 이탈, 즉 보이콧을 당할 수도 있었고, 방심하면 소출을 떼이기도 했다. 규모가 작은 선비들은 솔거(率居) 노비들과 함께 직접 논밭을 일구기도 했다. 반대로 술과 유흥에 빠져 가산을 탕진한 선비는 공동체의 조롱거리가 됐다.

이렇게 알뜰히 관리한 자산을 바탕으로 퇴계 이황은 도산서원을 운영했고, 노상추(역사 속 인간 5화 참조)는 무려 30년에 걸쳐 과거 시험에 도전할 수 있었다. 홍길동전 작가 허균의 아버지 허엽은 초당두부를 상품화해 제법 큰 수익을 올렸다는 설도 있다.

그렇다면 이런 ‘소소한 부자’ 말고, 오늘날 기준으로 봐도 놀랄 만한 재벌은 없었을까?

삼한갑족 경주 이씨 백사공파, 그 전설의 서막​

기지와 해학의 아이콘으로 알려진 백사(白沙) 이항복(1556~1618).
그러나 그는 조선 사대부 가운데서도 드물게 실물 경제와 자산 증식에 정통한 인물, 말 그대로 ‘재테크의 귀재’였다.
이항복의 부는 우연이 아니었다. 안목, 인맥, 그리고 시대를 읽는 감각이 맞물린 결과였다. 그의 전략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핵심 요지’ 선점형 부동산 투자​
임진왜란 직후, 한양의 토지 가격은 바닥을 쳤다. 이항복은 이 시기를 기회로 보았다. 도성은 반드시 재건될 것이고, 정치와 권력의 중심은 다시 한양으로 돌아올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는 종로 인근과 현재의 필운동(배화여고 일대) 등, 궁궐과 가까운 핵심 지역의 토지를 적극 매입했다. 동시에 정치적 변동성에 대비해 포천 등 경기도 일대에 대규모 농지를 확보했다. 오늘날로 치면 현금 흐름을 만들어주는 캐시카우였다.
안정적인 농업 수입 덕분에 한양의 토지는 장기 보유가 가능했다. 『백사집』과 당대 야사에는 그의 토지와 저택 규모가 상당했음이 여러 차례 언급된다. 그는 수탈보다는 합리적 관리를 택했고, 이는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졌다. 안정적 농업 수익이 그의 모든 투자의 뿌리였다.

혼맥과 인맥을 통한 정보·자본 확보​
이항복은 권율 장군의 사위였다. 권율 가문은 당대 최고 수준의 재력을 보유한 집안이었고, 그는 이를 기반으로 안정적인 자본을 확보했다. 여기에 더해 그는 영의정을 세 차례나 지낸 조정의 핵심 인물이었다. 천도 논의, 대규모 토목 사업, 조세 제도의 변화. 그는 누구보다 먼저 정보를 접했고, 그 정보는 자산을 지키고 불리는 데 활용됐다. 권력은 곧 정보였고, 정보는 곧 돈이었다.

품격 있는 부자, 노블레스 오블리주​
이항복의 부가 후대에 비판받지 않은 이유는 명확하다. 그는 재산을 쌓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전쟁과 기근의 시기에는 곡간을 열어 백성과 피난민을 도왔고, 서원과 학문을 후원하며 사회적 명망을 쌓았다. 그는 돈을 권력으로 바꾸고, 그 권력을 다시 명예로 환전했다. 과연 조선식 자본주의의 완성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 철학은 300년의 시간을 건너, 그의 먼 후손대에서 다시 한 번 꽃을 피우는데...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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