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회 허균
인생의 벼랑 끝에 섰을 때, 당신은 무엇을 떠올리겠는가.
누군가는 지나온 명예를, 누군가는 못다 이룬 야망을 곱씹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풍운아 허균은 전혀 다른 길을 택했다. 유배지의 거친 보리밥 앞에서 그는 평생 맛보았던 팔도의 산해진미를 불러냈다. 그것은 단순한 식탐이 아니라,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화려했던 생의 감각을 복원하려는 처절하면서도 유쾌한 저항이었다.
조선 최초의 미식 블로거, 허균
허균은 본업인 문신이자 작가로서 『홍길동전』이라는 불후의 서사를 남겼다.
하지만 그의 영혼을 채운 숨은 본능은 따로 있었다. 전국을 유랑하며 맛의 정수를 기록한 ‘미식 평론가’로서의 면모다.
1611년, 정치적 부침 끝에 전라도 함열로 유배된 그는 곰팡내 도는 밥상을 마주했다. 대문장가의 자존심보다 더 쓰라렸던 것은 미각의 실종이었다. 그는 기억 속의 맛집과 식재를 하나둘 꺼내 글로 옮겼고, 그렇게 탄생한 책이 『도문대작』(屠門大嚼) 이다.
제목부터 예사롭지 않다.
“고깃간 문을 바라보며 크게 입질을 한다.”
먹지 못하는 처지에서 입이라도 쩝쩝거리며 대리만족을 하겠다는 해학, 그리고 삶을 놓지 않겠다는 오기가 동시에 배어 있다.
『도문대작』, 조선의 미각 지도
책에는 과일 11종, 채소 27종, 해산물 40종 등 100여 가지 음식의 산지와 특징이 촘촘히 실렸다. 그가 남긴 기록 몇 대목만 보아도 시선의 깊이가 드러난다.
“방게(芳蟹)는 서해에서 난다. 다리가 짧고 맛이 매우 달다.”
“전주 복숭아가 가장 크다. 소사에서 나는 것은 살이 단단하고 달다.”
“중국 오동이 뽑은 실면이 으뜸이다.” ― 혹시 ‘우동’의 유래일까?
“두부는 초당, 곧 내 고향에서 만든 것이 제일이다. 정결하고 정교함이 비길 데 없다.”
묘사는 목록을 넘어 품평에 가깝다. 어디 것이 상품인지, 식감이 어떠한지를 단칼에 짚는다. 오늘날 강릉 명물이 된 ‘초당두부’의 뿌리가 집안과 맞닿아 있음을 적은 대목에서는 고향의 맛에 대한 자부심이 짙게 번진다.
맛으로 쓰는 반성문
허균의 삶은 시대의 질서와 늘 불화했다.
자유분방한 언행과 파격적 사상은 그를 끊임없이 벼랑으로 몰았다. 쉰 살을 갓 넘긴 1618년, 그는 역모죄로 생을 마감한다. 그러나 유배지에서 쓴 이 미식 에세이는 그가 세상을 얼마나 뜨겁게 사랑했는지를 역설적으로 증언한다.
서문에서 그는 고백했다.
“일찍이 나는 진미를 사치스럽게 누렸다.
이제 먹는 것은 거친 보리밥과 상한 반찬뿐. 지난날의 맛을 생각하며 이 글로 배고픔을 달랜다.”
푸념처럼 들리지만 실은 반성에 가깝다.
유성룡이 『징비록』으로 전쟁의 잘못을 기록했듯, 허균은 『도문대작』으로 자신이 누린 과분한 풍요를 돌아보고, 백성들이 일구어낸 팔도의 결실을 공공의 기억으로 남기려 했다.
쉰 살의 식탁에 오른 진짜 인생
나이 오십에 돌아보면, 우리가 후회하는 것은 거창한 성취가 아닐지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과 나눈 따뜻한 밥 한 끼, 계절마다 피어오르던 과일 향 같은 소박한 기쁨을 무심히 지나친 일이 더 오래 남는다.
허균은 절망 속에서도 ‘맛’이라는 감각을 놓지 않았다.
과거의 사치를 글로 씻어내고, 기록을 통해 만인과 나누는 추억으로 치환했다.
우리는 얼마나 다행한가.
쉰이 넘어서도 어제의 실수를 추억으로 양념하고, 남은 생을 더 풍성한 식탁으로 차려낼 시간이 있다. 오늘 당신의 식탁에는 어떤 이야기가 오르고 있는가. 허균처럼 우리 인생을 대작으로 만들어줄 ‘맛있는 기록’을 이제 시작해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