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인간] 주인공이 아니어도 괜찮은

14화 서이수

by 초로의 궁사

지천명(知天命)의 나이가 되면 우리는 문득 깨닫는다.

내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내가 늘 주인공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혹은 이제는 무대 중앙에서 내려와, 장면의 흐름을 살피는 ‘감독’이나 ‘편집자’의 자리가 더 어울린다는 것을 말이다.


정조 시대 문예부흥의 중심, 규장각에는 ‘4검서’라 불린 네 명의 학자가 있었다. 그중 서이수라는 인물은 유독 눈에 띄지 않는다. 박제가처럼 날카로운 통찰로 시대를 흔들지도 않았고, 유득공처럼 거대한 역사 지도를 다시 그리지도 않았다. 이덕무(13화)처럼 무엇엔가 과도하게 몰입하는 별종도 아니었다.


그는 늘 동료들의 화려한 사유를 책이라는 그릇에 담아내는 사람이었고, 왕의 기록을 오탈자 하나 없이 정리하는 사람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기획자도, 스타 저자도 아닌—묵묵한 ‘편집자’였다.


‘서이수’라는 단단한 디딤돌


서이수는 네 사람 중 가장 과묵했고, 가장 성실했다.

정조가 야심 차게 추진한 수많은 편찬 사업의 뒤편에는 늘 그의 손길이 있었다. 그는 이름이 남는 일보다, 기록이 틀리지 않는 일에 집착했다. 자신이 남길 문장이 아니라, 남의 문장이 정확히 전달되는 것에 책임을 졌다.


50대의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도 이와 다르지 않다. 청춘이 나를 드러낼 ‘수식어’를 찾는 시간이었다면, 지천명 이후의 삶은 내 삶의 내용을 충실히 채우고 다음 세대가 읽기 편하게 ‘주석’을 다는 시간이다.

내가 돋보이는 일보다, 내가 머문 자리가 단단해지는 일.

서이수가 규장각의 수천 권 책 속에 자신의 흔적을 묵묵히 심어놓았듯이 말이다.


가난과 병마 속에서도 지켜낸 ‘직업의 품격’


사료 속 서이수의 삶은 고단했다. 그는 평생 가난에 시달렸고, 몸의 마비 증세인 풍벽으로 고통받았다. 그럼에도 붓을 놓지 않았다. 정조가 내려준 약을 먹으며 그가 지키고자 한 것은 단순한 생계가 아니라, 기록하는 자로서의 자존감이었다.

50대가 되면 몸은 여기저기서 신호를 보내고, 현실의 무게는 어깨를 짓누른다. “이쯤이면 대충 살아도 되지 않을까”라는 유혹이 찾아올 때, 서이수의 단정한 글씨체를 떠올리자.

비록 몸은 아프고 처지는 초라할지언정, 맡은 일의 끝을 흐트러뜨리지 않겠다는 그 고집. 그것이 바로 어른의 품격이다.


화려한 이름 대신 남겨진 정확한 기록


정조는 서이수를 두고 “문장이 정교하고 서법이 단정하여 믿고 맡길 만하다”고 평했다.

변설가와 명필은 많았지만, 서이수처럼 묵묵히 사실을 바로잡고 뒤처리를 완벽히 해내는 인물은 드물었다. 인생 후반전의 승부는 누가 더 유명해지느냐가 아니라, 누가 더 ‘필요한 사람’으로 남느냐에서 갈린다.


지천명이란 내가 세상의 중심이 아님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내가 없어도 세상은 돌아가겠지만, 내가 있었기에 이 기록—이 삶—이 조금 더 정확해졌다는 확신.


그것이면 충분하다.


당신의 인생이라는 책을 교정하는 법


오늘도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보이지 않는 글자들을 고친다. 아이들의 뒤를 살피고, 조직의 허점을 메우며, 오래된 관계의 오타를 수정한다.

서이수가 규장각 주합루의 서늘한 공기 속에서 붓을 고르며 느꼈을 고요한 환희를 떠올려 보자.

50대의 위대함은 거창한 혁명이 아니라, 어제보다 조금 더 정교해진 오늘에 있다.


꽃은 지고 나면 열매를 맺고,

문장은 다듬고 나면 진리가 된다.

이제 화려한 수식어는 젊은 세대에게 양보하자.

대신 우리는 삶의 행간마다 정성스러운 주석을 달자.


훗날 누군가 당신의 인생이라는 책을 펼쳤을 때,

그 꼼꼼하고 따뜻한 배려에 미소 지을 수 있도록


"해 저문 들판에 쟁기 메고 돌아오니,
어린 아들 문간에서 웃으며 맞이하네.
올해는 풍년이라 세금 걱정 덜었으니,
화로에 감자 구우며 긴 밤을 나누어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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