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기철 VS 한확
지천명(知天命), 하늘의 명을 안다는 쉰의 고개에 서서 역사를 읽다 보면 유독 발걸음을 멈추게 되는 대목이 있다. 바로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주어진 거대한 행운을 맞이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고려의 기철과 조선의 한확.
두 사람은 공교롭게도 누이가 대제국의 황제에게 간택되며, ‘황제의 처남’이라는 전무후무한 권력을 손에 쥐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그러나 지천명의 시선으로 두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면, 주어진 행운을 다루는 태도 하나가 개인의 말년은 물론 가문의 운명까지 어떻게 갈라놓는지 극명하게 드러난다.
오만의 칼을 휘두른 자, 기철
『고려사』 기철 열전을 보면 그의 오만함은 이미 극에 달해 있었다. 막내 여동생이 원나라 순제의 제2황후, 기황후가 되어 황자 아이유시리다라를 낳자 기철은 스스로를 고려 왕과 대등한 존재로 여기기 시작한다.
사료에 따르면 그는 왕의 행차 앞에서도 말에서 내리지 않았고, 관직을 사고팔며 남의 토지를 거리낌 없이 빼앗았다. 원나라의 권세를 등에 업고 고려를 사실상 속국처럼 다루며, “내가 곧 국가”라는 식의 초법적 권력을 휘둘렀다. 그에게 주어진 배경은 공적 책임이 아니라 사적 탐욕을 채우는 날 선 칼에 불과했다.
고려의 안위보다 원나라의 이익을 앞세운 그는 결국 국운이 기울자 가장 먼저 도려내야 할 존재가 된다. 공민왕이 단행한 정동행성 이문소 혁파와 친원 세력 숙청 과정에서 기철은 처참한 최후를 맞는다. 그가 쌓아 올린 권력의 탑은 견고해 보였으나, 타인의 빛을 빌려 세운 허상이었기에 가문 전체의 파멸을 막아주지는 못했다.
국가의 방패가 된 지혜, 한확
반면 조선의 한확은 같은 ‘황제의 처남’이라는 위치를 전혀 다르게 사용했다. 『태조실록』과 『세종실록』에 기록된 그의 행적을 보면, 그는 누이 여비 한씨가 명나라 영락제의 후궁이 된 사실을 개인의 위세가 아닌 국가의 완충 장치로 삼았다.
명나라 사신들이 조선에 와 과도한 공녀나 희귀한 진상물을 요구할 때, 한확은 황제의 인척이라는 독보적 위치를 활용해 조선의 입장을 대변했다. 무리한 요구를 정면으로 거절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는 고위급 외교적 완충지대로서 압박을 완화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왕실과 대립하며 사적 권력을 키우기보다, 조정의 신하로서 자신의 배경을 국가적 난제를 해결하는 도구로 승화시켰다. 세조가 왕위에 오를 때도 명나라의 승인을 이끌어내며 정국 안정에 기여했고, 그 결과 정승으로 천수를 누렸다. 그의 가문 역시 청주 한씨라는 조선 최고의 명문가로 뿌리내리게 된다.
후광은 빛인가, 그늘인가
결국 기철은 빌려온 힘을 자신의 실력으로 착각한 인물이었고, 한확은 그 힘을 무거운 책임으로 인식한 인물이었다.
기철의 권력은 타인을 짓누르는 폭력이었고, 한확의 권력은 나라를 지탱하는 효용이었다.
지천명의 나이에 다시 마주한 두 사람의 역사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내 것이 아닌 힘을 손에 쥐었을 때, 그것에 취할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어떻게 공공의 가치로 연결할 것인가를 고민할 것인가.
운 좋게 인맥이라는 빛을 얻었을 때,
그것을 나를 치장하는 장식으로 쓸 것인지,
혹은 타인을 지키는 등불로 쓸 것인지에 따라
인생의 마침표는 전혀 다른 모양으로 찍히게 된다.
덕흥군(德興君) 탑사첩목아(塔思帖木兒, 타스테무르)는 일찍이 승려가 되었다가 충정왕(忠定王) 3년(1351)에 원으로 도망쳤다. 기철(奇轍)이 주살 당하자 황후가 공민왕(恭愍王)을 원망하였다. 마침 본국 사람 최유(崔濡)가 원에서 불량한 무리들과 함께 황후를 설득시켜 공민왕을 폐위시키고, 탑사첩목아를 세워 왕으로, 기삼보노 (奇三寶奴)를 원자(元子)로 삼을 것을 모의하였다.
- 고려사 열전 4권, 15화 문익점 편 참고
#기철#한확#영락제#기황후#여비 한씨#순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