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남효온
수백 년간 수학자들을 괴롭힌 난제가 있듯, 조선의 지식인들을 괴롭힌 정치적 난제들이 있었다. 왕이 법 위에 군림하는가 혹은 법 아래 사대부와 동등한가(예송논쟁), 오랑캐에게 굽힌 국가적 자존심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북벌론)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이상과 현실이 가장 첨예하게 부딪힌 사안은 단연 '세조의 왕위 찬탈'에 대한 평가였다.
오늘날 우리는 세조를 권력을 위해 조카와 충신들을 제거한 '빌런'으로, 사육신과 생육신을 '충절의 상징'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 상식이 확립되기까지는 무려 200여년에 걸친 처절한 기록 투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전쟁에서 가장 혁혁한 전과를 올린 이가 바로 추강 남효온 (南孝溫, 1454~1492)이다.
24세 청년, 역사 전쟁의 포문을 열다
남효온은 생육신 중 가장 어리다. 단종이 폐위된 1455년, 그는 갓 돌이 지난 아이였다. 그가 생육신으로 불리는 이유는 단종 복위 운동에 직접 참여해서가 아니라, 부당한 권력이 이미 공고해진 시대에 홀로 그 정당성에 균열을 냈기 때문이다.
성종 9년, 24세의 유생 남효온은 '소릉복위상소 (昭陵復位上疏)' 를 올리며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죽은 자(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의 무덤을 파헤치는 것은 천리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서슬 퍼런 훈구 공신 세력의 반발로 상소는 기각되었고, 그는 신변의 위협 속에 유랑의 길을 떠난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유랑 중에도 사육신의 행적을 수집해 《육신전(六臣傳)》을 집필했다. 당대에는 금서(禁書)였으나 필사를 통해 암암리에 읽힌 이 기록은, 훗날 세조의 찬탈을 공식적으로 단죄하는 결정적인 근거가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가진 역사의 관점은 사실 청년 남효온의 고독한 노고에 빚지고 있는 셈이다.
죽어서 다시 만난 사제(師弟)
그의 스승 김종직은 제도권 내에서 우회적인 비판을 택했던 사림의 영수였다. 남효온은 그런 스승의 온건함을 때로 '변절'이라 몰아세우며 출사 권유를 뿌리쳤다. 타협을 거부한 제자와 현실을 고민한 스승, 두 사람의 길은 달랐으나 끝은 같았다.
스승 김종직은 '조의제문'으로 무오사화(1498) 때, 제자 남효온은 '소릉복위상소'로 갑자사화(1504) 때 나란히 부관참시(剖棺斬屍) 를 당한다. 죽어서 함께 화를 당한 이 비극은 역설적으로 그들을 도학(道學)의 정통으로 세우는 계기가 되었고, 사림의 정신적 승리로 기록되었다.
역사로부터의 연대: 우린 외롭지 않다
긴 싸움 끝에 숙종 대에 이르러 사육신은 200여년 만에 충신으로 국가적 인정을 받았다. 정조대에 이르러서는 남효온도 이조판서로 추증되며 문정(文貞) 시호를 받고 이후 영월의 창절사(彰節祠)에 배향되었다.
인생의 후반전을 뛰고 있는 우리 세대는 권위주의 시대의 아픔을 기억한다. 21세기에도 가끔 지난 세기의 아픔을 떠올리게 하는 돌발 상황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는 순리 대로 흘러 가리라 믿는다. 그럼 지난 시절의 부당한 폭력과 저항의 기억은 영원히 이대로 사라질 것인가?
그럴 때마다 남효온을 떠올린다. 권력의 서슬 아래에서도 당당히 진실을 기록했던 그 젊은 기개가 수백 년을 건너와 우리에게 말을 건다. 역사는 결국 정의의 편에 서는 자들의 기록이라고. 그 역사와의 연대가 있기에, 우리는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비단옷 입고 고기반찬에 배부른 자들이여 수양산 고사리 맛 그 어찌 알겠는가 날짐승 길짐승이 보금자리 달리하듯 나만은 벼슬을 부끄럽게 여기노라
- 남효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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