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박자청
먼지 자욱한 공사 현장, 낡은 관복의 소매를 걷어붙인 한 사내가 있다. 주변에서는 “글도 모르는 천한 놈”이라며 사대부들이 혀를 차지만, 그는 고개조차 들지 않는다. 그의 시선은 오직 나무 기둥 위, 길게 늘어진 가느다란 실에 꽂혀 있다.
이윽고 사내의 손끝이 팽팽한 줄을 퉁기자, ‘탁-’ 소리와 함께 대지 위에 서슬 퍼런 검은 직선 하나가 새겨진다. 조선 최고의 건축가이자, 궁궐 소속 노비(內奴) 출신 판서였던 박자청의 먹줄이다.
그에게 먹줄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세상의 비난과 억울한 누명 속에서도 끝내 굽히지 않았던 그의 원칙이자, 말보다 먼저 증명되는 실력이었다. 그가 그었던 그 곧은 선들이 모여 오늘날 우리가 사랑하는 창덕궁의 유려한 곡선을 받쳐내고 있다.
조선 초기, 노비라는 비천한 신분에서 시작해 정2품 판서에 올랐던 건축가 박자청(朴子靑)의 삶은 한 가지 질문에 대한 가장 묵직한 대답을 들려준다. 실록은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업적을 이렇게 기록했다.
“박자청이 지은 것은 견고하여 허물어지지 않으니, 믿고 쓴다.” — 『세종실록』
세상의 비난과 억울한 누명 속에서도 끝내 허물어지지 않는 삶을 지어 올린 박자청. 그의 먹줄이 건네는 인생 설계도를 다시 펼쳐본다.
억울하게 맞은 뺨보다 ‘지켜야 할 본질’에 집중하다
박자청의 인생이 전기를 맞이한 것은 대궐 문을 지키던 하급 군관 시절이었다. 왕의 동생이라는 권력자가 밤늦게 문을 열라며 호통을 치고 그의 얼굴을 때렸다. 피가 흐르는 상황에서도 그는 문고리를 놓지 않았다. 왕명의 증표 없이는 누구도 통과할 수 없다는 원칙 때문이었다.
살다 보면 억울한 일이 왜 없겠는가. 믿었던 이에게 배신당하거나 조직에서 밀려나며 모욕을 겪기도 한다. 그때 박자청의 일화는 말해준다. 나를 때린 손이 아니라, 내가 지켜야 할 문의 본질을 보라는 것이다. 지켜야 할 마지막 원칙이 있다면, 그날의 상처는 훗날 나를 증명하는 훈장이 된다.
세상의 비난은 ‘전문성’이라는 망치로 잠재우다
박자청이 승승장구하자 세상은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사대부들은 “글도 모르는 무식한 노비 출신”이라며 그를 끊임없이 탄핵했다. 성균관 문묘를 지을 때는 설계가 잘못되었다며 집단적인 공격을 가하기도 했다.
그때 박자청이 택한 방법은 말싸움이 아니었다. 그는 현장에 나가 먹줄을 잡았다. 이론으로 싸우는 이들 앞에서 오직 정교한 수치와 튼튼한 주춧돌로 대답했다. 그가 지은 창덕궁은 지형을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수백 년을 버티는 아름다움을 증명해 냈다.
“그가 만든 것은 허물어지지 않는다”는 신뢰.
그것이 가장 조용하고도 강력한 복수이자 명예다.
화려한 수식어가 필요 없는 나이가 되면, 누군가 나의 과거를 비웃거나 현재를 무시할 때 우리가 내놓아야 할 것은 변명이 아니다. 대체 불가능한 숙련도다.
삶의 지형에 맞는 집을 짓다
박자청 건축의 정수인 창덕궁은 경복궁처럼 반듯하지 않다. 산의 굴곡을 따라 건물을 앉혔기에 때로는 굽어 있고, 때로는 어긋나 있다. 사대부들은 이를 두고 법도에 어긋난다며 비난했지만, 사실 그것은 자연을 이기려 하지 않는 가장 고차원의 설계였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남들처럼 반듯하고 넓은 평지에 집을 짓고 싶었지만, 우리네 인생은 이미 울퉁불퉁한 산길일지도 모른다. 박자청은 땅이 굽어 있으면 집도 굽게 지으면 된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주었다. 그 굴곡까지 설계로 받아들일 때, 세상에 하나뿐인 견고한 궁궐이 완성된다.
나의 먹줄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박자청은 성격이 가혹하고 인성에 문제가 있다는 평을 들을지언정, 나라의 공사 앞에서는 밤낮을 잊고 마음을 다했다. 인생의 후반전은 남에게 어떻게 보이느냐보다 내가 무엇을 남기느냐에 집중해야 하는 시기다. 내가 쌓아온 성벽은 과연 단단한지, 혹은 작은 바람에도 흔들릴 만큼 부실했던 것은 아닌지 자문하게 되는 시점이다.
지금 흔들리고 있다면, 박자청이 창덕궁 대지 위에 그었던 그 꼿꼿한 먹줄을 떠올려야 한다. 세상의 비바람에 겉모양은 조금 낡을지 몰라도, 기초만큼은 견고하여 허물어지지 않는 인생. 우리도 그런 삶을 지어 올릴 수 있다.
오늘, 나의 인생 설계도 위에 다시 한번 곧은 먹줄을 튕겨본다.
태종 18년, 공조판서 박자청은 경복궁 수리 현장을 감독하던 중 금표를 넘어 들어오려는 양녕·효령·충녕대군을 발견하고, 법규 위반을 이유로 앞을 가로막으며 엄하게 꾸짖어 돌려보냈다. 이 일로 왕실의 권위를 손상시켰다는 논란에 휩싸여 대간의 탄핵을 받았으며, 결국 무례함과 불경죄가 인정되어 벌금형에 해당하는 과료 처분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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