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이재운
재물과 이익을 멀리하는 조선 선비의 이미지는 어디까지 사실일까.
“군자는 의(義)를 밝히고 소인은 이(利)를 밝힌다.”
성리학적 명분론이 지배하던 조선 후기 사회에서 돈을 입에 올리는 것 자체가 천박함의 증거로 여겨지던 시대였다.
그러나 그 허를 찌르듯, 서구에서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1776)을 통해 이윤 추구의 정당성을 선언하던 18세기, 조선에도 부(富)를 전혀 다른 시선으로 해석한 선비가 있었다.
『해동화식전』(海東貨殖傳)의 저자, 이재운(李載運, 1721~1782)이다.
가난이 낳은 조선의 경제학자
이재운은 명문 한산 이씨의 후손이었지만, 서자라는 신분적 족쇄와 몰락한 가문이라는 이중의 굴레 속에서 성장했다. 가난은 그에게 추상적인 도덕을 허락하지 않았다.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삶 앞에서, “수기치인”(修己治人)은 공허한 말에 불과했다. 그는 유교 경전 대신 살아 있는 현실을 읽기로 한다.
“선비도 먹고 살아야 도가 선다.”
이 절박한 인식은 그를 거리로 이끌었다. 이재운은 전국을 떠돌며 거상들을 만나고, 그들의 실패와 성공을 기록했다. 그렇게 축적된 현장 보고서가 바로 조선판 재테크 백서, 『해동화식전』이다.
『해동화식전』, 조선의 금기를 깨다
이재운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재물을 늘리는 것,
즉 화식(貨殖)은 인간의 본성이다.”
그는 부의 축적을 도덕적 타락이 아닌, 자연스러운 삶의 기술로 재정의했다. 더 나아가 부자가 되는 과정을 체계화해 ‘치부설(致富說)’, 즉 부의 9단계로 정리한다.
초반부: 몸을 써 부지런히 일하며 종잣돈을 마련하는 단계 — 근면
중반부: 유통과 가격 차이를 활용해 자산을 불리는 단계 — 검소와 활용
후반부: 정보와 흐름을 읽어 판을 짜는 단계 — 지혜와 레버리지
노동·자본·정보라는 현대 경제학의 핵심 요소가 이미 이 책 안에 담겨 있다.
책 속에 담긴 실전 재테크의 민낯
『해동화식전』의 힘은 이론이 아니라 사례에 있다.
가장 인상적인 이야기는 평양 조씨의 일화다.
자본금조차 없던 그는 남들이 버린 헌 가죽신을 헐값에 사들였다. 이를 기름에 절이고 재가공해 칼집으로 만들어 팔았다. 하찮은 폐기물에서 가치를 발견한, 오늘날로 치면 ‘업사이클링 투자’다.
또 하나는 시차를 이용한 곡물 거래다.
풍년에 곡식을 사서 저장했다가 흉년에 파는 방식. 이재운은 이를 최고의 지혜로 꼽는다.
남들이 사려 할 때 팔고, 팔려 할 때 사는 것.
지금의 ‘역발상 투자’와 다르지 않다.
이론은 완벽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이재운 본인의 재테크는 실패했다. 그는 평생 넉넉하지 못한 삶을 살았다. 이유는 분명했다.
그에게는 종잣돈도, 기회도 없었다.
서자라는 신분은 대규모 무역이나 관권과의 연결을 원천적으로 차단했다. 그는 완벽한 애널리스트이자 컨설턴트였지만, 정작 투자금을 굴릴 ‘운동장’에 들어갈 수 없었던 비운의 플레이어였다. 그래서 그의 메시지는 더욱 절절하다.
“나처럼 지식만 쌓아두지 말고, 기회가 왔을 때 전력을 다해 승부수를 던져라.”
그가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
인생의 후반전을 지나는 우리에게, 이재운의 삶은 세 가지 묵직한 통찰을 남긴다.
첫째, 지혜 없는 근면을 경계하라.
열심히 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시장의 흐름을 읽는 눈이 있어야 자산은 지켜진다.
둘째, 부의 완성은 베풂이다.
이재운은 치부설의 마지막을 ‘나눔’으로 맺었다. 돈을 버는 것보다, 제대로 쓰는 것이 더 어렵다는 사실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셋째, 잔고보다 오래 남는 콘텐츠를 남겨라.
그는 부자가 되지 못했지만, 그가 남긴 지식은 수백 년 후에도 읽히는 거대한 자산이 되었다.
조선의 혹독한 겨울을 견디며
부의 원리를 기록한 이재운.
그의 삶은 분명히 말한다.
돈을 아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진짜 부끄러운 것은 세상의 흐름을 외면한 채, 가난에 순응하며 자신의 재능을 썩히는 일이다.
국부론과 동시대에 출간된 해동화식전은 개인의 치부(致富) 그 이상, 예컨데 국부(國富)에 대한 언급은 없다. 하지만 이 새로운 시도는 당대 박지원, 박제가 등 북학파의 사상적 기반이 되어 백성들의 실생활을 개선코자 하는 지식인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해동화식전
#이재운
#북학파
#국부론
#애덤스미스
#이용후생
#재테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