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문익점
우리는 그를 ‘붓뚜껑에 목화씨를 숨겨온 민족의 영웅’으로 기억한다. 추운 겨울, 삼베옷 한 벌로 버티던 백성들에게 따뜻한 솜옷을 선물한 인자한 노인의 얼굴로 말이다.
그러나 역사의 페이지를 단 한 겹만 더 넘기면, 문익점의 삶에는 우리가 외면해온 서늘한 그림자가 드러난다.
어쩌면 그가 목숨 걸고 가져온 것은 씨앗이 아니라, ‘반역자’라는 낙인을 지워낼 마지막 기회였을지도 모른다.
찬란한 유망주, 권력의 줄타기에서 추락하다
1363년, 서른 다섯의 문익점은 촉망받는 관료였다. 그는 서장관의 임무를 띠고 원나라로 향한다.
당시 고려는 공민왕의 반원 정책으로 요동치고 있었고, 원나라는 공민왕을 폐위시키기 위해 충선왕의 서자 덕흥군(몽골명 타스 테무르)을 새로운 왕으로 내세웠다. 원나라 현지에서 문익점은 인생 최대의 선택 앞에 선다.
지는 해처럼 보이던 공민왕인가,
아니면 여전히 거대한 권력을 쥔 원나라가 미는 덕흥군인가. 그는 후자를 택했다.
단순한 동조가 아니었다. 그는 덕흥군을 고려의 새 왕으로 받드는 ‘반역의 당여(黨與)’로 이름을 올린다.
하지만 역사는 그의 계산을 허락하지 않았다.
덕흥군은 원군 1만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했으나,
최영과 이성계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참패했다.
덕흥군은 패전의 벌로 태장 107대를 맞고 유배되었고, 줄을 잘못 선 서른여섯의 문익점은 죄인의 신분으로 고려 땅을 다시 밟는다.
붓뚜껑이라는 허구, 그리고 처절했던 10년
우리가 배워온 ‘붓뚜껑 밀수’ 이야기는 정작 사료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당시 목화는 금수 품목도 아니었다.
진짜 이야기는 그가 정치적으로 사망 선고를 받은 뒤, 고향 경남 산청으로 낙향하면서 시작된다.
반역자의 딱지를 달고 돌아온 사내에게 세상은 냉정했다. 화려한 관복 대신 거친 베옷을 입고, 그는 장인 정천익과 함께 밭을 팠다. 가져온 씨앗 열 알 가운데, 단 하나만이 싹을 틔웠다.
그 후 10년.
남들이 조정에서 권력을 다툴 때,
그는 벌레를 잡고 물을 대며 목화에 매달렸다.
그것은 농사가 아니었다.
자신의 오판을 속죄하기 위한, 혹은 배신자의 낙인을 씻어내기 위한 처절한 노동이었다.
지나가던 외국 승려를 붙잡고 실 뽑는 법을 배우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그 시간 동안, ‘배신자’는 조용히 ‘구도자’가 되어갔다.
사관이 남긴 마지막 평가
1398년에 그가 세상을 떠나고, 또 그로부터 다시 약 한 세대가 흐른 후 사관들은 그의 삶을 몇 문장으로 정리한다.
“원나라에 갔을 때 덕흥군의 당에 붙었으므로 돌아오자 조정에서 파직하였다.
(중략)
그러나 실을 뽑고 베를 짜는 법을 배워 널리 가르치니, 이로 말미암아 온 나라 백성이 그 혜택을 입었다.”
- 고려사
사관은 그의 배신을 지우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남긴 온기 또한 외면하지 않았다.
문익점의 흑역사는 백성의 몸을 덮은 솜옷의 두께만큼, 그렇게 덮였다.
흑역사를 지우는 유일한 방법
이제 우리는 문익점의 삶에서 무엇을 읽어야 할까.
우리 역시 인생의 어느 순간, 줄을 잘못 서기도 한다. 단 한 번의 오판으로 공든 탑이 무너질 때도 있다. “내 인생은 여기서 끝인가”라는 절망이 찾아오는 순간 말이다.
그때 문익점의 서른여섯을 떠올린다.
말로 해명하지 않고,
변명으로 복권을 구하지도 않은 사람.
대신 씨앗 하나를 심고 10년을 견딘 사람.
인생의 흑역사를 지우는 방법은
과거를 미화하는 것이 아니라,
내일의 누군가를 따뜻하게 할
오늘의 씨앗을 심는 것임을
그는 온몸으로 증명했다.
당신의 품 속에는,
지금 어떤 씨앗이 담겨 있는가.
1375년 우왕 1년, 목화 보급의 공로를 인정 받아 전의주부라는 관직으로 중앙정계에 복귀하였다. 60세에 경연동지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였으며 조선 개국 후에는 관직에 응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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