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책

— 14장 (1~4부 통합) —

by 스팅비 StinGBee

커버 새것.png

— 1부 | 붉은 책

(When I Hold You in My Arms — EP14-1)

FTO 현장훈련교관 밀러가 묵직한 링 바인더를 들고

선율 이를 사무실로 불렀다.


“Officer Shin, report to my office.”
(자막: 신 경관, 내 사무실로 와.)


그 한마디에, 선율의 목덜미가 먼저 굳었다.

오늘이 FTO 훈련 마지막 날이다.


다리 밑 사건 이후 별 큰 사건 없이 마지막 혼자서 하는

Ghost Phase (자막: 고스트 단계 / 단독 평가 단계) 도 무사히 마쳤다.


이렇게 6개월 만에 여기까지 온 게…

나름 운이 좋은 편이었다.


그래도 “마지막 날”은 사람을 이상하게 만든다.
별일이 없어도, 심장이 먼저 불합격을 상상한다.


선율은 무전기 (Radio, 자막: 무전기)를 눌렀다.


“10-4.”
(자막: 확인.)


사무실로 향하는 복도에서, 그동안 있었던

일들이 잠깐씩 머릿속을 스쳐갔다.


젖은 아스팔트 위로 번지던 경광등.

손끝에 남은 긴장. 밀러의 목소리.

“엄폐해!.”라는 짧은 명령들.


무엇보다—다리 밑, 차 안.
다섯 살짜리 아이의 얼굴. 눈. 숨소리.
“아버지”라고 불리던 짐승.


그리고 그 아이가… 인간방패가 되던 순간.

그 장면은 끝났는데, 끝나지 않았다.


선율은 아직도 가끔, 그날의 공기를 목 뒤에서 느꼈다.

사무실 앞.


밀러 경사는 모랄레즈 경정과 대화를 하고 있었고,

다가오는 선율을 바라봤다.


두 얼굴엔 아무 표정이 없었다.
그 무표정이 제일 긴장을 하게 만들었다.


모랄레즈 경정이 먼저 말했다.


“Officer Shin, grab a chair and have a sit.”
(자막: 신 경관, 의자 가져와서 앉아.)


선율은 목소리를 단단히 눌러 대답했다.


“Thank you, Captain.”
(자막: 경정님 감사합니다,.)


밀러가 책상 위에 묵직한 링 바인더를 “툭” 올려놓았다.
그걸 보는 순간, 선율은 이상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그 바인더 안에—자신이 지나온

6개월이 통째로 들어 있다는 감각.


실수도, 배운 것도, 버틴 것도, 흔들린 것도.
“괜찮다”라고 넘긴 밤들까지, 전부.


처음엔 종이 몇 장뿐이었다.
훈련 첫 주.
새 종이 냄새가 나던 얇은 기록들.


그때 선율은 생각했다. ‘이게 뭐 대수야.’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링 바인더는 성경책처럼 두꺼워져 있었다.

성경책이 두꺼운 건 단지

페이지가 많아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거기에 자기 인생을

끼워 넣기 때문이라는 걸—선율은 처음 알았다.


이 바인더도 그랬다.
페이지가 두꺼워진 게 아니라,
그 안에 “자기”가 쌓여 있었다.


밀러가 말한다.

“Here is the Red Book, Captain.”
(자막: 여기 레드북입니다, 경정님.)


Red Book (자막: 레드북 / 붉은 평가기록).
매주 점수가 기록된다.


1단계와 2단계는 총 70점.
3단계와 4단계는 총 80점.


마지막 Ghost Phase (자막: 고스트 단계 / 단독 평가 단계)

는 90점을 받아야 통과할 수 있다.


모랄레즈는 무표정으로 한 장 한 장 빠르게 페이지를 넘겼다.
점수를 확인하는 것 같았다.


넘기는 속도가 너무 일정해서, 오히려 더 긴장됐다.

그동안 밀러와 선율은 아무 말 없이 그 손만 바라봤다.


종이가 “사각”거릴 때마다,

선율은 심장 박동이 귀 뒤에서 울리는 걸 느꼈다.
마치 그 종이들이 선율의 심장을 대신해 뛰는 것처럼.


그러다 밀러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Hey, Shin… 점수가 모자라면 다시

Remedial training (자막: 재교육 / 보충훈련)

으로 되돌아갈 수 있어.”


순간 선율의 얼굴이 굳었다.
장난일 수도 있다.


밀러는 원래 이런 식으로 사람을 떠본다.
근데 마지막 날엔, 장난도 칼이 된다.

선율은 웃지도 못하고, 침만 삼켰다.


“Yes, sir.”
(자막: 네, 알겠습니다.)


모랄레즈의 손이 어느 페이지에서 잠깐 멈췄다.
그 1초가, 선율에겐 1분처럼 길었다.


그리고 모랄레즈가 레드북을 덮었다.


“툭.”


판결문 도장 소리 같았다.

모랄레즈가 선율을 바라봤다.


표정은 그대로였다.
눈빛만 차갑고 정확했다.


“Officer Shin.”
(자막: 신 경관.)


선율은 등받이에서 등을 떼고, 더 똑바로 앉았다.

모랄레즈가 말했다.


“Pass.”
(자막: 합격.)


그 한 단어에, 선율은 숨을 내쉬는 법을 다시 배웠다.
목 안에 박혀 있던 딱딱한 것이 내려가는 느낌.


“Thank you, Captain.”
(자막: 감사합니다, 경정님.)


모랄레즈 경정은 고개를 아주 조금 끄덕이더니,

레드북을 다시 열었다.


마지막 페이지.
서류의 끝이 아니라—사람의 끝을 찍는 자리.


모랄레즈 경정이 펜을 책상 위에 “딱” 놓고,

손가락으로 빈칸을 짚었다.


“Date and sign.”
(자막: 날짜 쓰고, 싸인해.)


선율은 잠깐 멈췄다.
그 칸이—그냥 칸이

아니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처음엔 종이 몇 장뿐이던 링 바인더가,

성경책처럼 두꺼워질 때까지 쌓인 시간.


그 모든 걸 한 줄로 “인정”해버리는 칸.

밀러가 옆에서 낮게 덧붙였다.


“Make it legible.”
(자막: 알아볼 수 있게 써.)


선율은 펜을 잡았다.
손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그 떨림은 겁이 아니라—

끝이 났다는 사실이 너무 현실이 어서였다.


그는 날짜를 적었다.
숫자가 잉크로 변하는 순간, 6개월이 종이에 붙었다.


그리고 싸인.
자기 이름을 쓰는데, 이상하게 목이 꽉 막혔다.


이름이 원래 이렇게 무거운 글자였나.

선율이 펜을 내려놓자, 모랄레즈가 레드북을 “툭” 덮었다.


“좋다.”


그 짧은 한마디가, 합격 통지서보다 더 강하게 남았다.

밀러가 의자에 기대며, 낮게 말했다.


“Remember the repetition.”
(자막: 반복을 기억해.)


“Okay? Officer Shin—repetition.”

(자막: 알겠지, 신 경관—반복이다.)


“Repetition. Repetition. Repetition.

If you don’t repeat it, you’ll forget it soon.”

(자막: 반복. 반복. 반복. 안 하면, 너 금방 다 까먹어.)


“Keep practice.”

(자막: 계속 연습해.)


“And again—officer’s safety first.”
(자막: 다시 말하지만—경관 안전이 최우선이야.)


그 말이 이상하게 무겁게 남았다.
수백 번 들은 말인데,

오늘은 ‘인사’가 아니라 ‘경고’처럼 들렸다.


밀러가 마지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Congratulations.”
(자막: 축하한다.)


선율은 목소리를 단단히 눌러 답했다.


“Thank you, sir.”
(자막: 감사합니다.)


모랄레즈가 서류 한 장을 꺼내 선율 앞으로 밀었다.
얇은 종이 한 장인데도, 손이 먼저 긴장했다.


밀러가 말했다.


“You’ll be assigned to Cyber Crime Division.”
(자막: 넌 사이버 범죄과로 배치될 거야.)


“Good luck!”
(자막: 행운을 빈다!)


선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속에 ‘축하’가 올라오기도 전에, 새로운 압박이 채워졌다.


사이버 범죄과.
총보다 화면이 먼저 사람을 죽이는 곳.


선율은 자리에서 일어나

Salute, (자막: 경례) 하고 문을 나섰다.


복도 형광등이 차갑게 바닥을 핥았다.

선율은 손에 쥔 서류를 내려다봤다.


사이버 범죄과로 배치 지정은 나왔었어도

선율이는 바로 그 부서로 가지는 못했다.


사이버 범죄는 배치는 정해졌어도

어느 정도 순찰 경력이 쌓이고 난 다음

가야 되는 또 다른 관문이 있었다.


거의 3년 동안 다운타운을 돌았다.
사소한 교통위반 단속부터, 크고 작은 추격전까지.


그래도 비교적 안전하게 순찰을 마쳤고,

그 사이 진급도 있었다.


예전에 2년제 커뮤니티 칼리지를 다니다가,

중간에 경찰 아카데미로 들어갔다.


그리고 경찰서 학비 지원으로 다시 학교로 돌아가,

예전에 채우지 못한 학점을 인정받아 4년 제로 편입했다.
남은 2년을 채워 학사 과정을 마쳤다.


Corporal (자막: 경장)에서 사이버 수사대로 들어갈 때는,

마침 그 자리에 Sergeant (자막: 경사) 자리가 비어 있었다.


Lieutenant (자막: 경감)으로부터 추천을 받고,

바로 진급 인터뷰와 시험을 통과해 경사 계급을 달게 되었다.


또다시 선서를 마치고 금으로 도금된 배지를 건네받으며—
Chief Neal (자막: 치프 닐 / 경찰국장) 이 악수를 하며 말했다.


“Congratulations, Sergeant Shin. You came a long way.

Make us more proud and serve your community, Sergeant.”
(자막: 축하한다, 신 경사. 여기까지 정말 멀리 왔다.

우리를 더 자랑스럽게 해 줘.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해, 경사.)


지켜보던 동료들, 가족, 친구들이 박수를 치면서 축하를 해주었다.
그때 선율이는 그제야 나름 바른길로 잘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틀 뒤, 드디어 경찰서 사이버 수사대로 향했다.

복도 형광등이 차갑게 바닥을 핥았다.


선율은 손에 쥔 서류를 내려다봤다.


Cyber Crime Division
(자막: 사이버 범죄과.)


그 글자 아래, 작은 안내문이 있었다.


Orientation materials / Internal portal link
(자막: 오리엔테이션 자료 / 내부 포털 링크)


그리고 맨 아래.


AI-assisted fraud trend briefing
(자막: AI 보조 사기 동향 브리핑)


— 2부 | 첫 사건

(When I Hold You in My Arms — EP14-2)

사무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찰칵” 하고 났다.

그 소리는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복도를 걸어 나오며 선율은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셨다가—
그대로 내쉬었다.


후—.


안도였다.
한 고비를 넘겼다는 안도의 한숨.


근데 숨이 편해지는 대신, 머리가 더 시끄러워졌다.


‘여기까지… 왜 왔지?’


그 질문이 갑자기 너무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다.

처음엔 그냥 “해야 해서”였다.


살아남으려고.
무너지지 않으려고.


누구에게든 “괜찮다”는 얼굴로 서 있으려고.

그다음엔 책임이 됐다.


누군가의 신고.
누군가의 울음.
누군가의 “도와달라”는 말.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도망치듯 달려온 길이
내가 선택한 길로 바뀌어 있었다.


선율은 주차장으로 내려가 차 문을 열었다.
운전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딸깍” 잠그는 순간, 또 한 번 숨이 나왔다.


후—.


훈련이 끝났다는 뜻이 아니라
버텨야 했던 시간이 “일단은” 끝났다는 뜻.


그 “일단”이 주는 안도감은 달콤했다.

몸이 먼저 풀렸다.


어깨가 아주 조금 내려앉았다.

선율은 시동을 걸었다.


엔진 소리가 차 안을 채우자,

머릿속이 잠깐 조용해졌다.


그 짧은 조용함이—
오히려 더 불안했다.


집으로 가는 길.

창밖의 햇빛은 너무 정상적이었고,


사람들은 너무 아무 일도 없다는 얼굴이었고,
신호등은 너무 규칙적이었다.


정상적인 풍경은 가끔 잔인했다.
특히—다리 밑 사건 같은 걸 겪고 나면.


그날의 공기.
차 안의 숨소리.
아이의 눈.


그리고 “아버지”라는 단어를 뒤집어쓴 짐승.


끝난 장면이 아니라
몸에 남은 잔상처럼.


선율은 입술을 한번 꾹 다물었다.


‘다 끝났어. 이제…’


그때, 핸드폰이 진동했다.
전화였다.


차 스피커로 연결되며 익숙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여보, 지금 어디예요? 지금 오고 있어요?”


부인이었다.

선율은 목소리를 정리했다.


방금 전까지 마음속에서 굴러다니던 것들을

목구멍 뒤로 밀어 넣는 느낌으로.


“어, 왜? 나 집에 가는 중이야. 무슨 일 있어?”


부인이 잠깐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 다름이 아니라, 무슨 편지가

와 있는 거 같은데…

변호사 사무실에서 온 거 같아요.”


선율의 눈썹이 순간적으로 올라갔다.


“… 뭐라고? 변호사 사무실?”


“응. 봉투에 로펌 이름 같은 게… 찍혀 있어.”


선율은 핸들을 더 세게 잡았다.


“아니… 우리한테 변호사 사무실에서

편지가 올 일이 없을 텐데…”


말은 그렇게 했는데, 말 끝에서 이미 불안이 시작됐다.

불안은 늘 그랬다.


‘말이 안 되는데’ 싶은 순간에 가장 정확하게 사람을 물었다.


“일단… 내가 금방 갈게. 봉투 뜯지 말고 그대로 놔둬.”


“알았어요.”


전화를 끊는 순간,

선율의 안도감은 딱 거기까지였다.


방금 전까지 “한 고비 넘겼다”던 마음이
순식간에 다른 고비를 발견한 얼굴로 바뀌었다.


그는 액셀을 조금 더 밟았다.
속도를 올린 게 아니라—

마음이 먼저 달리기 시작했다.


집 앞에 도착했을 때, 선율은

차 문을 열자마자 거의 뛰다시피 걸었다.


현관문이 열리고, 부인이 거실 쪽에서

봉투를 들고 나왔다.


“자기야.”

“편지 줘봐.”


선율은 봉투를 받는 순간,

종이 질감부터 확인했다.


두꺼운 재질.
괜히 고급스러운 종이.
정갈한 글씨체.


겉면에는 분명히 로펌 같은 이름이 박혀 있었다.


근데 이상했다.

너무… 완벽했다.


완벽한 글씨체.
완벽한 정렬.

완벽한 ‘위협의 냄새.’


선율은 봉투를 조심스럽게 뜯었다.
안에는 한 장짜리 안내문이 들어 있었다.


첫 줄이 눈에 박혔다.


FINAL NOTICE

(자막: 최종 통지)


선율의 눈이 좁아졌다.


“최종 통지…?”


부인이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말이에요?”


선율은 대답을 바로 못 했다.
왜냐면 그 아래 문장이 더 문제였기 때문이다.


“귀하의 계정(또는 사업체) 관련 법적 절차가 진행 중이며,
지정 기한 내 미응답 시 불이익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맨 아래.


“사건 확인 및 대응을 위해 아래

QR 코드를 스캔하십시오.”


QR 코드.

그 작은 사각형이 선율의 목덜미를 차갑게 만들었다.


로펌이,

‘최종 통지’라는 제목으로,
QR 코드부터 찍어 보내는 경우가 있나?


선율은 종이를 들어 빛에 비췄다.
인쇄는 좋았다.


너무 좋았다.
너무… AI가 만든 것처럼 좋았다.


선율은 종이를 내려다본 채 낮게 말했다.


“자기야… 이거, 진짜 로펌 아니야.”


부인이 숨을 삼켰다.


“… 사기예요?”


선율은 종이를 천천히 접었다.


“응. 근데… 그냥 사기보다 더 더러워.”


부인이 눈을 크게 떴다.


“왜요?”


선율은 대답 대신 문장을 다시 훑었다.

문장들이 이상하게 “중립적”이었다.


대상을 특정하지 않는다.
사건 번호도 없다.


담당 변호사 이름도 없다.

진짜 법률 문서는 사람을 겁주기

전에 고정핀을 박는다.


누구. 무엇. 언제. 어디. 번호.

근데 이건 반대다.


“기한”과 “불이익”만 크다.

즉, 내용은 비워두고
공포만 채운 문장.


선율은 종이를 봉투에 다시 넣었다.
마치 증거물 다루듯 손끝으로만 집어 들었다.


“이거… 내일 가져갈 거야. 그리고 오늘은 절대 QR 찍지 마.”


부인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눈이 흔들렸다.

선율은 그 흔들림을 봤다.


그리고 자신 안에서도 비슷한 흔들림을 느꼈다.

훈련을 통과한 게 끝이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가족이 흔들릴 때 시작되는 법이었다.


다음날 아침, 선율은 아내가 차려준 밥상 앞에 앉았다.

따뜻한 밥, 김 오르는 국, 조용한 식탁.


오늘은 처음으로 사이버팀에 들어가는 날이라,

그 평범함이 오히려 낯설었다.


선율은 숟가락을 들었다가 잠깐 멈췄다.
머릿속에서 오늘 하루가 짧게, 빠르게 정리됐다.


모니터.
폴더.
녹취.
웃는 동료들.


그리고—사람이 무너지는 소리.

언젠가는 맞아야 될 일이다.


사이버팀에 들어오면 결국 온갖 지옥을 보게 된다.

하지만 선율은 속으로 한 가지를 빌었다.


처음부터는, 제발.
미성년자 관련 사건만은 아니길.


그건 선율이 극혐 하는 것들 중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박혀 있는 것이었다.


분노가 아니라—몸이 먼저 반응하는 종류의 혐오.
머리로 참기 전에 속이 뒤집히는 종류의 기억.


그 순간, 밥상 위의 따뜻한 김이 아니라—

차가운 그림자가 떠올랐다.


다리 밑.
선선한 새벽 공기.


그리고… 어린 여자아이.
작은 어깨, 축 처진 손목.


공포의 질린 눈,

숨 넘어가는 소리**가 먼저 들렸다.

짧게, 끊어지고, 다시 이어지는—


아버지라고 이름 달고 짐승처럼

딸의 목을 움켜쥐었다 놓는 것 같은 호흡.


살려달라는 말보다 더 직접적인 소리.

선율은 숟가락을 쥔 손에 힘을 줬다.


손끝이 하얘질 만큼.


‘오늘은 아니었으면.’


그는 그 생각을 입 안에서 한 번 더 굴렸다.
기도처럼, 주문처럼.


그리고 천천히 국을 한 모금 삼켰다.
따뜻한데도 목이 잠깐 막혔다.


경찰서에 도착한 선률이는, 2층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계단을 오르는 동안 건물 안 공기는 묘하게 건조했다.


1층은 민원과 순찰 보고로 소란스럽고,

사람 냄새가 섞여 있었는데—2층은 달랐다.


소음은 줄고, 대신 모니터 팬 소리와 프린터가

종이를 씹는 소리가 공기를 채웠다.


사건이 쌓여 있는 층의 소리였다.

복도 끝에 붙은 표지판.


CYBERCRIME / DIGITAL FORENSICS


문을 열자마자 선율은 느꼈다.
여긴 웃음도, 한숨도, 전부 “업무”

처럼 소비되는 곳이라는 걸.


안쪽 데스크에서 네 명 정도가

모니터를 돌려 보며 떠들고 있었다.


낄1.png

누군가는 커피를 들고,

누군가는 의자에 기대서,

누군가는 키보드를 두드리면서.


서로 맡은 케이스를 늘어놓는 말투가—

자랑 같기도, 자학 같기도 했다.


“야, 그 영상 봤냐?”


“그 아시안 여자… 미쳤더라. 진짜 톱 여배우 급이야.”


“근데 남자는… 와, 그냥 정말 털렸더라.”


“연애 사기지. 그것도 영상통화까지 하고. 다 믿었대.”


“사진 봐봐. 키 작고 뿔테 쓰고, 뚱뚱하고…”


“저런 여자가 왜 저 남자랑 결혼을 하냐? 말이 되냐.”


낄낄.
짧은 웃음이 튀었다.


웃음의 표정은 가벼웠지만,

그 밑바닥은 묘하게 잔인했다.


‘우린 안 당한다’는

확신을 서로 확인하는 웃음.


한 동료가 모니터를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더 비웃었다.


“야, 얘 진짜 돈을 보냈대. 그것도 여러 번.”

“요즘 이런 AI 사기에 왜 이렇게 많이들 넘어가냐?”

“하긴…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 보니까.”

“그래도 그렇지. 와… 저 인간, 끝까지 믿었네.”


그 말이 끝나자, 다른 형사가 더 비웃듯 숨을 뿜었다.


“야 근데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얼마 전엔 AI랑 결혼식 올린 사람도 있잖아.”


“맞아. 어떤 사람은 그거 때문에…

극단적 선택까지 했고.”


“요즘 AI 때문에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어.”


누군가 다시 화면을 확대했다.
정지 프레임.


얼굴 경계가 미세하게 번지고,

조명이 한 박자 늦게 따라오고,

눈동자가 너무 매끈했다.


그걸 ‘증거’처럼 들이밀며,

한 동료가 확신에 찬 얼굴로 낄낄댔다.


“저 아시안 여자 영상?

저건 AI로 톱 여배우급 얼굴 덮어씌운 거야.”


“원래는… 화면이랑 완전 달라.

AI로 덧씌운 거 확실해.”


낄낄.


웃음이 한 번 더 튀었다.


가벼운 농담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누군가의 무너짐을 밟고 서는 소리였다.


낄2.png

선율은 가방을 내려놓으며 고개만 살짝 돌렸다.
표정은 없었다. 다만 시선이 차가웠다.


“그런 말, 여기서는 하지 마세요.”


동료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 그냥 농담이지.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마.”


선율은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농담이 누군가에겐 방아쇠가 됩니다.”


웃음이 딱 멈췄다.
잠깐의 정적이 생기고, 누군가 헛기침을 했다.


선율은 그 틈을 이용해 인사만 짧게 했다.


“오늘부터 합류합니다. 로버트 신입니다.”


고개가 몇 개 끄덕여졌다.
하지만 사건이 더 빠르게 사람을

잡아당기는 곳에서, 인사는 길지 않았다.


그때 뒤에서 조용히 다가오는 발소리.

담당 책임자가 파일을 들고 선율 앞에 섰다.


“로버트 신 경사. 새 배정 들어왔다. 이건 웃을 사건 아니다.”


책임자는 파일을 건네기 전에 선율을 한 번 훑었다.
업무용 질문이었지만 톤은 짧고 단정했다.


“By the way—do you speak Korean?”

(자막: 그런데—한국어 하지?”)


선율은 입꼬리를 아주 살짝 올렸다.

농담 하나 던지고 끝내겠다는 얼굴.


“Come on, Captain—say my name. What does it mean to you?”

(자막: 에이, 캡틴—제 이름 불러보세요. 그게 당신한테 무슨 의미인데요?)


책임자가 피식 웃었다.


“그래. 됐다.”


그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파일 표지에는 굵은 글씨가 박혀 있었다.


[사건명] 공관 사칭(주미 한국 총영사관 명의) →

법률대리인 연결형 금융사기


[피해자] 김민수(가명)

[피해금] 48,000 USD 이상 (현재까지)


[핵심] 출입국 제한·추방·한국 내 처벌을 빌미로 협박 →

‘해결 절차’ 안내를 가장해 상담원/변호사(로펌)로 연결 →

착수금(선임료)·수수료 명목 송금 유도


선율은 자리에 앉자마자 노트북을 열었다.

담당 책임자가 말했다.


“김민수 쪽에서 자료를 꼼꼼히 남겼고 녹취가 있어.”


김민수가 그나마 잘한 것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대화 내용과 그 과정을 녹음해 뒀다는 것이었다.


선율은 고개를 끄덕이고 헤드셋을 꼈다.

오디오 파형이 화면에 떴다.


REC_CALL_01.mp3

재생 버튼을 누르는 손끝이,

생각보다 조심스러웠다.


사이버 사건에서 “증거”는 종이보다

먼저 목소리로 사람을 꺾는다.


—딸깍.


“김민수 씨 맞으십니까. 대한민국 영사관입니다.”

민수의 목소리가 바로 굳어 있었다.


“네… 맞습니다.”


상대는 친절했다.
그런데 그 친절은 안심시키는 방향이 아니었다.


조용히, 정확히, 도망갈 길을 막는 친절이었다.

“김민수 씨 명의가 한국 내에서 도용된 정황이 확인됐습니다.

단순 도용이 아닙니다.


현재 김민수 씨 명의가 여러 범죄 사건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민수의 숨이 짧아졌다.


“저는… 그런 거 한 적이 없습니다.”


“김민수 씨, 협조하지 않으시면

김민수 씨는 피해자가 아니라

연루자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그 경우, 법적 처벌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선율은 파형을 보며 메모를 했다.


‘연루자’라는 단어로 방어를 끊는다.

녹취는 쉬지 않고 다음 칼날을 꺼냈다.


“또한 절차가 진행되면 출입국 제한이 검토될 수 있습니다.”


민수의 목소리가 가늘어졌다.


“출입국… 제한이요?”


“김민수 씨는 미국에 계시지요.

그렇다면 더 심각합니다.—

상황에 따라 미국에서도 절차가 진행될 수 있고,

체류 신분 문제로 번질 가능성도 있습니다.”


민수는 말이 막혔다.

사기단은 그 침묵을 기다렸다가,

더 깊게 눌렀다.


“최악의 경우, 미국에서 절차 이후

추방 논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가시면—

한국에서도 처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선율은 헤드셋 너머로 들리는 민수의 숨소리를 들었다.
그 숨소리는 이미 ‘공포’가 아니라, ‘항복’에 가까웠다.


상대는 마지막에 구원처럼 말했다.


“김민수 씨께서 피해자임을 입증하시면,

지금 단계에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다만 김민수 씨 혼자서는 어렵습니다.

원하시면 연계된 로펌을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딸깍.


선율은 재생을 멈췄다.

그리고 그제야 방금 들었던 동료들의 웃음이 다시 떠올랐다.


‘동양계 미인’이 어쩌고, ‘멍청해서 당했다’가 어쩌고.

그건 사건을 모르는 사람의 말이 아니었다.


사건을 알면서도 인간을 잊어버린 사람의 말이었다.

선율은 다음 증거를 열었다.


NOTICE_SCAN_01.png
ZOOM_INVITE.eml
VIDEO_MEETING_01.mp4
RETAINER_AGREEMENT.pdf
PAYMENT_INSTRUCTIONS.png
CHAT_LOG.txt


공문 캡처를 확대하자, 빨간 글씨가 눈을 찔렀다.


출입국 제한 검토 중
형사 처벌 가능
즉시 본인 확인 필요


아래에는 QR 코드가 붙어 있었다.

‘본인 확인’이라는 단어는 이상하게 사람을 안심시킨다.


하지만 사기단에게 그 단어는,

지갑을 여는 손동작일 뿐이다.


담당 책임자가 선율의 화면을 한번 훑고, 낮게 말했다.


“This is where it gets real. Watch the video.”
(자막: 여기서부터가 진짜야. 영상 봐.)


선율은 VIDEO_MEETING_01.mp4를 열었다.

화면이 켜지자, “영사관”을

사칭한 남성이 정장 차림으로 앉아 있었다.


배경도, 각도도, 표정도—
모든 게 ‘공식’처럼 보이도록 계산돼 있었다.


“김민수 씨,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본 회의는 녹화됩니다.”

민수는 화면 속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바짝 굳어 있었다.


사칭자는 부드럽게 말했다.


“이건 혼자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요청하신 대로 담당 변호사를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그 순간 화면이 분할되며 새 참가자가 들어왔다.

백인 남성. 서재 배경. 법률서가 꽂힌 책장.
깔끔한 셔츠와 침착한 눈빛.


‘미국 변호사’라는 이미지가 너무 교과서 같아서—

오히려 더 위험했다.

그가 카메라를 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Hello, Mr. Minsoo. I’m Daniel Hue.

I’m a lead attorney.”
(자막: 안녕하세요, 민수 씨. 저는 다니엘 휴이고,

총책임 담당 변호사입니다.)


“I reviewed the preliminary notes.

This is serious, but it’s manageable—

if we move fast.”

(자막: 사전 자료를 검토했습니다. 심각하지만,

빨리 움직이면 정리 가능합니다.)


민수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내려갔다.
공포 속에서 처음 얻는 ‘숨구멍’이었다.


다니엘 휴가 마지막으로 덫을 깔았다.
목소리는 끝까지 친절했지만,

문장 하나하나가 서류처럼 정확했다.


“Mr. Minsoo, one thing first.”
(자막: 민수 씨, 한 가지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Of course, you can choose any attorney you want.”
(자막: 물론 원하시는 변호사를 선임하셔도 됩니다.)


민수의 눈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
선택권이 생긴 게 아니라—선택을 강요받는 느낌이었다.

다니엘 휴는 그 틈을 정확히 눌렀다.


“But most attorneys are not

familiar with cases like this.”

(자막: 다만 대부분의 변호사들은 이런

유형의 케이스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This isn’t a normal matter.

Once it’s flagged, it moves fast.”

(자막: 일반 사건이 아닙니다.

한 번 ‘표시’가 붙으면 절차가 빨라집니다.)


그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 끄덕임이 ‘확신’처럼 보이게—
민수가 무너지기 직전 마지막으로

붙잡을 손잡이처럼 보이게.


“We’ve worked with the Consulate and

partner counsel in Korea for years.”

(자막: 저희는 영사관과 한국 쪽 협력 변호사들과

오래전부터 이런 케이스를 함께 처리해 왔습니다.)


“So if you want the fastest resolution—

this is the lane.”
(자막: 가장 빠르게 정리하고 싶으시면,

이 라인이 제일 확실합니다.)


민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동의가 아니라, 숨을 쉬기 위한 반사였다.


다니엘 휴는 더 부드럽게, 더 낮게 말했다.
마치 “구해준다”는 말이 아니라
“지금 선택하지 않으면 끝난다”는 말처럼.


“I can request a temporary hold to

prevent escalation.”
(자막: 절차가 더 커지기 전에,

임시 보류를 요청할 수 있습니다.)


“But I need your authorization today.”
(자막: 하지만 오늘 안에 승인(동의)이 필요합니다.)


사칭자가 옆에서 자연스럽게 끼어들었다.
딱 한 번.
민수가 도망갈 문을 찾기 전에—

문고리를 먼저 잠그는 방식으로.


“시간이 중요합니다, 김민수 씨.

이미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다니엘 휴는 고개를 아주 조금 숙였다.
그 작은 동작이 ‘예의’처럼 보였고,
그 예의가 민수의 공포를 더 설득력 있게 만들었다.


“And that authorization

starts with the retainer.”
(자막: 그리고 그 승인의 시작이

착수금(선임료)입니다.)


“Once the retainer is secured,

we can document representation and

move immediately.”
(자막: 착수금이 확인되면,

저희가 대리 선임 절차를 문서화하고

즉시 진행할 수 있습니다.)


민수는 화면 밖으로 시선을 한 번 떨궜다.
어딘가에 적힌 계좌번호를 읽는 눈이었다.


그 순간 선율의 손이 멈췄다.

이 영상은 “설명”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민수가 스스로 돈을 내게 만드는 절차였다.


선율은 화면 속 다니엘 휴의 표정을 다시 봤다.
침착한 눈빛, 정확한 발음, 적당한 미소.


공포를 깎아주는 얼굴이 아니라—
공포를 돈으로 바꾸는 얼굴이었다.


민수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내려갔다.
공포 속에서 처음 얻는 ‘숨구멍’이었다.


다니엘 휴가 마지막으로 덫을 깔았다.


“To avoid any misunderstanding,

I’ll bring in our Korean legal consultant.”
(자막: 오해를 막기 위해 한국어

법률상 담원을 연결하겠습니다.)


참가자 목록에 새 이름이 뜨는 순간—
화면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K-Legal Advisor.


그리고 여기서부터, 영어는 끊겼다.


“김민수사장님, 안녕하세요.

지금부터는 한국어로만 안내드리겠습니다.

중요한 내용이라 한 단어라도 잘못 이해하시면 위험합니다.”


민수는 그 문장에 더 깊게 믿어버렸을 것이다.
‘한국어로 정확히’라는 말이 ‘진짜 절차’처럼 들렸으니까.


상담원은 곧장 공포를 다시 조였다.


“김민수 사장님 명의가 한국에서

범죄와 연결돼 있는 상태라면,

가만히 계시면 피해자가 아니라

연루로 판단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장님께서 피해자라는 걸

서류로 만들어야 합니다.”


민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다.


“저는… 뭘 하면 됩니까?”


상담원은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한국 쪽은 변호사 권한이 있어야 정리가 됩니다.

변호사님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화면이 다시 분할되며 한국 변호사가 들어왔다.
말투는 정중했고, 표정은 단정했다.

정중함이 오히려 사람을 더 눌렀다.


“김민수 씨, 박 변호사입니다.

상황이 가볍지 않습니다.

지금부터는 공식 위임으로

진행하셔야 합니다.”


민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끄덕임은 동의가 아니라,

이미 막힌 길 앞에서 선택지를

잃은 사람의 반응이었다.


박 변호사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진행 전에 먼저 정리하겠습니다.

저는 한국 쪽 대응 문서를 준비하고,

필요한 경우 한국 내 협력 변호사

라인으로 바로 올리겠습니다.

다만 착수금은 제가 받지 않습니다.

이 건은 ‘공관 연계’로 접수되는 형태라,

미국 쪽 대리인 선임 등록이 먼저 걸려야 합니다.”


그는 화면 아래를 잠깐 내려다봤다가,

다시 카메라를 봤다.
목소리는 끝까지 “절차”였다.


“그래서 송금은 미국 담당 변호사—

Daniel Hue 쪽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쪽 계정에 착수금이 확인되는 순간,

선임 사실이 기록되고 ‘홀드(보류)’

요청을 넣을 수 있습니다.
지금은 그게 제일 빠릅니다.”


상담원이 기다렸다는 듯 바로 받쳐줬다.


“김민수 사장님, 순서가 중요합니다.
먼저 위임 계약서부터 진행하겠습니다.

화면에 뜨는 문서 확인하시고,

이름이랑 서명만 해주세요.”


잠깐 후, 민수 화면에 PDF가 떴다.
상단에는 굵은 글씨.


[RETENTION / AUTHORIZATION FORM]
[CASE NO.: KCG-2411-***]


상담원이 말투를 더 부드럽게 낮췄다.
부드러웠지만, 속도는 더 빨라졌다.


“사장님 지금 미국에 계시니까요.

금액은 **미화 5,000달러(원화 약 ○○백만 원)**

부터 시작될 가능성이 큽니다.


서명 확인되면, 바로 송금 안내 드릴게요.

시간 지체되면 출입국 제한이나 절차가

**‘진행 단계’**로 넘어갈 수 있어서요.”


박 변호사가 한마디를 더 얹었다.


“네. 지금 단계에선 ‘대리인 선임’

이 먼저 걸려야 합니다.

오늘 안에 착수금이 들어가면,

내일 아침부터는 저희가 문서로

대응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민수가 마우스를 움직였다.
서명칸 위에서 커서가 잠깐 멈췄다.

상담원이 그 멈춤을 놓치지 않았다.


“사장님, 송금하실 때 **메모(Reference)에

케이스 번호만 그대로 적어주세요.

KCG-2411-*. 그게 있어야 휴 변호사님 쪽에서

‘같은 건’으로 바로 묶어서 처리합니다.”


그다음 화면에 새 창이 떴다.
송금 안내.


“김민수 사장님, 지금이 중요합니다.

시간 놓치면 출입국 제한이나 절차가

‘진행’으로 넘어가버릴 수 있어요.

여기서 정리하셔야 합니다.”


민수가 마우스를 움직였다.

서명칸 위에서 커서가 잠깐 멈췄다.


그다음 화면에 새 창이 떴다.

송금 안내.


Wire Instructions (US)
Account Name: Hue Legal / Client Trust
Routing / SWIFT: ********
Reference: CASE NO. KCG-2411-* (Minsoo Kim)**


민수는 숨을 삼켰다.

‘트러스트’라는 단어가, 이상하게도 안심처럼 보였다.


상담원은 마지막으로 못 박았다.


“사장님, 지금은 정리할 수 있는 타이밍이에요.
오늘만 넘기면 ‘절차가 굴러가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끝내셔야 합니다.”


선율은 RETAINER_AGREEMENT.pdf를 열었다.

로고, 주소, 비용표, 서명란, 계좌 입력란.


‘진짜처럼 보이게’ 만드는 요소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화면 하단.

작은 글씨로 **비용 안내(요금표)**가 붙어 있었다.


[수임료 안내 / 시간당 과금 기준]

1) 착수금(리테이너): 미화 5,000달러

사건 접수 및 ‘긴급 보류(홀드) 요청’ 진행을 위한 최소 시작 금액

이후 발생하는 비용은 착수금에서 차감

2) 시간당 비용(15분 단위로 계산)

총괄 담당 변호사: 시간당 650달러

담당 변호사(어소시에이트): 시간당 495달러

보조인/패러리걸: 시간당 225달러

상담원(케이스 코디네이터) 통화: 시간당 125달러 (연결 시점부터 과금)

통역/번역 지원(한·영): 시간당 180달러

3) 기타 처리 비용(별도 청구)

사건 접수/파일 생성: 350달러(1회)

문서 작성/서류 처리: 120달러(건당)

해외송금 처리 수수료: 75달러(건당)

당일 긴급 처리(요청 시): 280달러

4) 착수금 유지 규정

착수금 잔액이 2,500달러 이하로 내려가면,

진행을 위해 **추가 입금(보충)**이 필요

비용은 결과가 아니라 업무 시간/절차 진행에 대한 청구임


※ 과금 단위 안내

모든 상담/통화/회의는 **15분 단위(0.25시간)**로 계산됩니다.

15분 미만 통화도 15분으로 산정됩니다.

상담원이 연결되는 순간부터 대기 시간 포함으로 과금될 수 있습니다.

통역이 포함되는 경우, 통역 비용은 별도로 추가됩니다.


그리고 맨 아래—사람들이 가장 안 읽는 곳에,

영어 문장이 박혀 있었다.


“The Firm assumes no liability regardless of outcome.”
(자막: 결과와 무관하게 본 로펌은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습니다.)


선율은 그 문장을 오래 바라봤다.
이건 실수가 아니었다.


“절차”가 끝나는 순간, 반드시

남겨야 하는 면책의 도장이었다.


그는 마지막 파일을 열었다.

PAYMENT_INSTRUCTIONS.png.
은행 정보와 수취인, 송금 방법.


그리고 메모칸에 적힌 짧은 코드 하나.


CASE: BLUE CORAL


선율의 손끝이 차가워졌다.

민수가 잘한 건 녹음이었다.


하지만 민수가 당한 건—

녹음으로도 다 막을 수 없는 시스템이었다.


— 3부 | CAM-07

(When I Hold You in My Arms — EP14-3)

선율은 조용히 의자에서 일어섰다.


“Hey, Captain, let me try to get a hold of him today.”
(자막: “경감님. 김민수 씨, 오늘 바로 만나겠습니다.”)


담당 책임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금은 돈보다 사람이 먼저 무너져.”


선율은 모니터를 끄지 않은 채, 폰을 집어 들었다.

저녁쯤 선율은 김민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민수는 화면에 뜬 번호를 보고 숨이 턱 막혔다.
모르는 번호.


이젠 그게 그냥 “전화”가 아니었다.
그 자체가 경고음처럼 들렸다.


그는 두 번이나 거절할 뻔하다가,

손끝으로 겨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상대는 너무 침착한 목소리였다.
침착해서 더 의심이 났다.


“김민수 씨 맞으십니까.

저는 사이버팀 로버트 신 경사입니다.”


김민수는 입안이 바짝 말랐다.
‘경사’라는 단어가 오히려 공포를 건드렸다.


그 사기꾼들도 “공식”과 “절차”를 입고 들어왔으니까.

김민수는 조심스럽게, 하지만 급하게 물었다.


“저… 죄송한데요. 정말 경찰서에서 전화하신 게 맞습니까?”


“그리고… 경사님이… 진짜 로버트 신 경사님 맞으세요?

제가 확인을 해야겠습니다.”


선율은 바로 대답했다.


“네. 확인하셔야 합니다.

김민수 씨가 지금 불안하신 게 정상입니다.”


김민수는 숨을 삼키듯 이어 말했다.


“그럼 제가 전화를 끊고…

경찰서 대표번호로 다시 전화해서

경사님 연결 요청하면 될까요?”


선율은 짧게 멈췄다가, 정중하지만 분명하게 말했다.


“김민수 씨, 그 방식은 지금은 어렵습니다.”


“업무 절차상, 전화로 재연결 확인을 안내드리기보다는

직접 방문 확인을 권해드리고 있습니다.”


김민수의 심장이 다시 내려앉았다.


“왜… 왜 어렵죠? 혹시… 이것도…”


말끝이 흐려졌다. 의심이 아니라, 공포였다.

선율은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이유를 쌓아줬다.


김민수가 이해할 수 있게, 짧게. 단계처럼.


“첫째, 지금 김민수 씨는 ‘사칭’ 피해를 당하셨습니다.

전화로 확인 절차를 반복하면 더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둘째, 사건 관련 내용은 민감한 정보가 포함됩니다.

대표번호 재연결 과정에서 담당자 착오가 나면 정보가 섞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안전한 방법은,

김민수 씨가 직접 오셔서 신분 확인하시고,

제가 직접 안내드리는 겁니다.”


김민수는 그대로 결론을 바꿨다.

목소리가 떨리지만, 이번엔 분명했다.


“그럼… 제가 직접 경찰서로 가겠습니다.”


“제가 직접 가서…

경사님이 진짜인지 제가 눈으로 확인하겠습니다.”


“좋습니다. 그게 가장 안전합니다.”


김민수는 아직도 불안했지만,

그 말에 아주 미세하게 숨이 들어왔다.


‘안전’이라는 단어가, 오늘 처음으로 사람에게서 나왔다.

그런데 선율이 다음 말을 꺼내는 순간—
김민수의 불안 속에 작은 틈이 생겼다.


“김민수 씨,

어젯밤에 인터넷으로 접수하신 신고 건,

저희 시스템에 정식으로 접수되어 있습니다.”


김민수는 순간 멈췄다.


“정식으로… 접수요?”


“네. 김민수 씨가 올리신 자료도 확인했습니다.

녹취 파일, 줌 캡처, 계약서, 송금 안내까지요.”


“그리고 접수번호도 있습니다. 김민수 씨 기억하십니까?”


선율이 접수번호 끝자리를 말하자, 김민수의 눈이 커졌다.


그 숫자는 김민수가 새벽에

‘보내기’를 누른 뒤,

화면에 뜨던 숫자였다.


누군가 흉내 내기엔 너무 구체적인, 너무 개인적인 숫자.


“… 맞습니다.”


그 짧은 한마디가 김민수 입에서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밤이 필요했는지—김민수 자신이 제일 잘 알았다.


선율이 덧붙였다.


“김민수 씨가 하신 행동이 의미가 있습니다.”

“인터넷으로 접수된 기록은 지워지지 않습니다.

증거가 남았다는 겁니다.”
“그게 지금 김민수 씨가 잡을 수 있는 첫 번째 손잡이입니다.”


김민수의 가슴이 미세하게 풀렸다.
돈은 이미 나갔다.


하지만… “기록”은 남아 있었다.

그건 이상하게도 희망처럼 느껴졌다.

큰 희망이 아니라, 아주 작은 희망.


‘그래도 내가 완전히 끝난 건 아니구나’라는 희망.

김민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제가 지금 가면… 어디로 가면 됩니까?”

“정문 로비로 들어오시면 안내 데스크가 있습니다.”
“‘사이버팀 로버트 신 경사’ 찾으신다고 말씀하시면 됩니다.”
“김민수 씨 도착하시면 제가 내려가겠습니다.”


김민수는 마지막으로, 자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한 번 더 확인했다.


“경사님… 혹시 지금 당장 저한테 뭘 요구하실 건 없죠?”
“계좌번호나… 주민번호나… 그런 거요.”


선율의 답은 빠르고 단호했다.


“없습니다.”
“경찰은 전화로 송금 요청을 하지 않습니다.”
“김민수 씨는 그냥 오시면 됩니다.”


통화가 끝났다.

김민수는 전화기를 내려놓고,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지갑을 챙겼다.

신분증이 손에 닿는 순간, 손끝이 차가웠다.


하지만 이번엔—
그 차가움이 ‘겁’만은 아니었다.


이번엔 송금을 하러 가는 길이 아니었다.
이번엔 확인하러 가는 길이었다.


그리고 김민수는 처음으로 생각했다.


‘범인들이… 정말 잡힐 수도 있겠다.’


아주 작은 희망이었지만,
그 희망 하나로 사람은 한 번 더 버틴다.


경찰서는 생각보다 밝았다.
밝은데 차가웠다.


따뜻한 조명으로 “안심”을 파는 곳이 아니라,
차가운 형광으로 “현실”을 보여주는 곳이라서.


민수는 접수번호가 적힌 종이를 손에 쥐고 민원창구 앞에 섰다.
손바닥엔 땀이 차 있었다.


땀이 난다고 해서 죄가 되는 건 아닌데,
사람은 불안하면 자꾸 스스로를 의심하게 된다.


“인터넷으로 접수했는데요.”


민수가 번호를 불렀다.


“담당 수사관님 성함이…

신선율 경사님이라고 연락이 와서요.”


직원은 컴퓨터를 몇 번 두드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접수돼 있습니다. 담당자 확인 원하세요?”


직원은 덧붙였다.

“One moment, please.”
(자막: 잠시만요.)


민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네… 공식적으로 확인하고 싶어서요.”


직원은 민수의 휴대폰 화면을 힐끗 보며 안내했다.


“대표번호는 홈페이지에 있는 번호로 직접 누르시는 게 제일 확실합니다.
전화하신 다음에 ‘사건 담당자 연결’ 요청하시면 돼요.”


민수는 고개를 끄덕이고, 경찰서 홈페이지에

떠 있는 대표번호를 직접 눌렀다.


연결음이 울리는 동안, 심장이 괜히 빨라졌다.


‘혹시 또…’


그 생각이 올라오려는 순간, 민수는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
한 번 당한 사람은 의심이 “생각”이 아니라 “반사”가 된다.


잠깐의 대기음.

안내 음성이 짧게 지나가고, 내부 연결이 걸렸다.


“This is Robert Shin. How may I serve you?”
(자막: 로버트 신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민수는 순간 숨을 삼켰다.
영어가 들려서가 아니라—
이제야 진짜 “공식 통화”처럼 느껴져서.


“아… 안녕하세요.

김민수라고 합니다.

인터넷으로 접수한 사건 건 때문에요.

제가 담당이 맞는지 확인하려고 전화드렸습니다.”


이번엔 선율의 목소리가 한국말로 돌아왔다.

단정하고, 빠르지 않게.


“아, 네. 김민수 씨 맞으시죠.

제가 김민수 씨 사건 담당자입니다.”


짧게 숨을 고르고 덧붙였다.


“지금 1층 민원창구에 계시면,

2층으로 올라오시면 됩니다.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네… 감사합니다.”


민수는 통화를 끊고, 폰을 잠깐 꼭 쥐었다.
이제야 가슴 한쪽이 아주 조금 내려앉았다.


의심이 사라진 게 아니라,
의심이 “정리”된 느낌이었다.


2층 복도는 더 조용했다.
사람 목소리가 낮아지는 곳엔 이유가 있다.


여긴 누군가의 실수가 기록으로 남고,

누군가의 불행이 종이로 남는 곳이니까.


선율은 민수를 자리로 안내했다.


“김민수 씨, 자료 잘 받았습니다.
녹취 파일, 캡처, QR 기록, 송금 관련 화면… 다 확인했어요.”


민수의 눈이 커졌다.


“그럼… 잡을 수 있습니까?”

너무 빨리 튀어나온 말에 민수는 급히 고쳤다.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돈이라도….”


선율은 바로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민수는 그 침묵이 제일 무서웠다.


“김민수 씨.”


선율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지금 단계에서 ‘즉시 환급’이나 ‘

즉시 검거’를 약속드릴 수는 없습니다.”


민수의 얼굴이 굳었다.
희망이 꺼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선율은 말을 이어갔다.


“다만, 이게 개인 사기가 아니라는 건 확실합니다.


김민수 씨 자료에 시설의 흔적이 있어요.
사람 몇 명이 집에서 치는 수준이 아니라…
라인처럼 굴리는 쪽입니다.”


민수는 ‘시설’이라는 단어가 낯설게 느껴져서 되물었다.


“시설이요…?”


“네. 흔히 말하는… 공장형입니다.”


선율은 캡처 한 장을 띄웠다.
영상 모서리를 확대하자 픽셀이 뭉개진 글자가 남아 있었다.


CAM-07


그리고 날짜와 시간.


“이거 보이시죠?”


“네….”


“이건 누가 자막으로 붙인 게 아닙니다.

화면에 박혀 있는 오버레이예요.
즉, 누군가가 ‘카메라’로 찍은 게 아니라,
감시 화면이 원본일 가능성이 큽니다.”


민수의 목젖이 크게 움직였다.


“그럼… 누가 보고 있었다는….”


“네. 누군가가 보고 있고, 관리하고 있고…

통제하고 있었던 겁니다.”


선율은 다음 캡처로 넘겼다.
복도 끝에서 스친 표지판. 딱 한 프레임.


영어 아래 중국어, 그리고 현지어로 보이는 글자.


“언어가 섞여 있죠.
한 조직만 굴리는 공간이면 이렇게 섞일 이유가 적습니다.
여러 인력, 여러 관리층이 섞인 시설 쪽으로 보입니다.”


마지막으로 선율이 QR 기록을 띄웠다.
도메인은 달랐다. 로고도 달랐다.


그런데 버튼 위치가 같았다.

문장 흐름이 같았다.

체크박스가 늘 같은 구석에 있었다.


“간판만 바꿔 끼운 템플릿입니다.”


선율이 낮게 말했다.


“개인이 즉흥으로 만든 게 아니라, 시스템이에요.”


민수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미워할 대상이 한 명이면 쉬운데,
이건… 세상이 덤벼든 느낌이었다.


선율은 그 침묵을 오래 두지 않았다.
오래 두면, 사람은 다시 무너져서.

대신—선율의 머릿속이 먼저,

‘그 시스템의 내부’로 넘어갔다.



— 4부 | 콤파운드

(When I Hold You in My Arms — EP14-4)

선율의 머릿속이 먼저,

‘그 시스템의 내부’로 넘어갔다.


— (장면 전환: 콤파운드) —


겉으로는 리조트 간판이 번쩍였다.

네온은 친절했고, 음악은 흘렀다.


밖에서 보면, 여긴 휴양지였다.

문을 통과하면 다 달라졌다.


철문이 두 번 울리고,

금속이 금속을 긁었다.

복도는 길고, 창문은 없고,

공기는 과하게 차가웠다.


층층마다 카메라가 박혀 있었다.

방마다, 복도마다, 계단마다—

붉은 점이 숨 쉬듯 깜빡였다.


맨 위층 감시방.

벽 하나가 모니터였다.

작은 화면들이 벌집처럼 빽빽했다.


복도, 작업실, 출입구, 숙소, 화장실 앞.

감시하는 사람들은 얼굴을 보지 않았다.


숫자를 봤다.

초록과 빨강을 봤다.

사람이 아니라 “실적”을 봤다.


아래층 작업실.

여자가 카메라 앞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다 보이게” 앉아 있었다.


옷의 문제라기보다, 시선의 문제였다.

카메라 각도는 사람을 상대하는 구도가 아니었다.

사람을 진열하는 구도였다.


카메라가 켜지는 순간—

모니터 속 얼굴이 먼저 웃었다.

매끈했다. 예뻤다. 반짝였다.


그 웃음만으로 신뢰가 만들어지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카메라가 꺼지는 순간,

그 얼굴은 걷혔다.


현실의 얼굴은 같은 사람이라

믿기 힘들 정도로 상반됐다.


피로가 뼈처럼 튀어나와 있었고,

눈 밑은 그늘이 아니라 구덩이였고,

입꼬리는 웃어본 적이 오래된 사람처럼 굳어 있었다.


피부는 거칠고, 숨길 곳이 없었다.

그리고—보이지 않게 숨겨야 하는 흔적들이 있었다.


목 아래, 셔츠 깃선에 걸리는 자리.

파운데이션이 끝나는 경계에,

누렇게 바랜 멍이 옅게 남아 있었다.


그녀가 팔을 살짝 들어 머리를 넘기는 순간,

소매 안쪽이 잠깐 들렸다.

팔 안쪽, 살이 얇은 곳에—

동그란 자국이 몇 개.


너무 정확한 원형이라, 상처라기보다 도장 같았다.

담배로 지진 흔적이었다.

이미 아문 것도 있었고,

아직 붉게 남아 있는 것도 있었다.


그녀는 웃는 게 아니었다.

웃음을 유지하고 있었다.

살아남으려고.


옆자리 남자는 상체만 정장이었다.

셔츠, 넥타이, 재킷.

딱 프레임 안에서만 “전문가”였다.


그런데 의자가 삐끗하며 화면이 내려가자—

아래가 드러났다.


반바지. 슬리퍼. 맨다리.

그리고 그 맨다리는—

차마 눈을 오래 둘 수가 없었다.


멍이 겹겹이 얹혀 있었고,

아문 자국 위로 또 다른 상처가 얇게 덧칠돼 있었다.


오래된 상처가 ‘끝’이 아니란 듯,

새로 생긴 멍이 그 위에 다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상체로 신뢰를 팔고, 하체로 현실을 드러낸다.


이곳에선 격식이 아니라 프레임만 중요했다.

감시방 모니터에 입금 알림이 뜨면,

아래층 공기가 아주 잠깐 바뀌었다.


환호는 없었다.

대신 사람들이 동시에 숨을 놓았다.

기쁨이 아니라 “오늘은 맞지 않겠다”는 안도.


(자막: “Good. Keep going.” / 좋은데. 계속 가.)


하지만 숫자가 멈추면—

감시방의 손바닥이 책상을 툭 쳤다.


의자가 삐걱 밀리고, 발소리가 움직였다.

복도 화면에서 무장경비 둘이 뛰었다.


문이 열렸다 닫혔다.

그리고 다음은 화면이 아니었다.


소리였다.

낮은 말다툼, 책상이 부딪히는 소리,

목소리가 얇아지는 소리,

짧은 비명.

비명은 길지 않았다.

여긴 긴 비명을 허락하지 않는 곳이었다.


감시방에선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그들은 그걸 ‘관리’라고 불렀다.

중국어가 섞인 목소리가 짧게 떨어졌다.


(자막: “Next.” / 다음.)


아래층 사람들은 다시 웃었다.

예쁜 얼굴이 다시 켜지고,

현실의 얼굴이 다시 꺼졌다.


돈이 들어오면 초록이 늘고,

초록이 늘수록 사람은 더 닳아갔다.


그 공장의 심장은, 맨 위층 감시방이었다.

그 심장으로 사람을 끌어들이는 건

리조트가 아니라—광고였다.


겉간판은 “단기 고수입”이었다.

이곳에 들어오는 길은 많았다.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 걸어 들어왔다.

SNS 광고. “한 달만 버티면 인생 바뀜.”

항공권 지원. 숙식 제공. “합법.” “안전.” “계약.”


문구는 다 달랐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싸고, 빠르고, 안전하다는 거짓말.


공항에 도착하면, 처음엔 웃는 얼굴이 있었다.

현지 직원처럼 보이는 사람.

한국말도 하고, 친절했다.


짐을 들어주고, “고생 많으셨다”라고 말해줬다.

그 웃음은—차 문이 닫히는 순간 사라졌다.

문이 ‘철’처럼 잠겼다.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누군가 앞 좌석에서 몸을 돌렸다.

말투가 바뀌었다.


“폰.”


짧고 낮게.

거절하거나, 늦으면—설명은 없었다.


칼이 먼저 나왔다.

그다음엔, 정말로 권총이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공항에서 반기던 얼굴은 온데간데없었다.

그 자리에 남은 건

“이제부터 규칙이 바뀐다”는 눈빛뿐이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알게 됐다.

여긴 ‘도착’이 아니라 인수인계라는 걸.

여기서부터 통제는 ‘물건’이 아니라 ‘단계’였다.


여권/폰/유심 통제의 단계화

처음엔 “보관”이라고 했다.

그리고 다음엔 “서류 처리”가 됐고,

그다음엔 “분실”이 됐다.


폰은 꺼졌다.

유심은 빠졌다.

연락은 끊겼다.


사람이 사라진 게 아니라—

사람의 ‘바깥 세계’가 끊겼다.


이곳에선 출신도, 이유도 다르지만

도착하고 나면 다 같아졌다.


어떤 사람들은 광고를 보고 자진해서 왔다가 잡혔다.

어떤 사람들은 빚 때문에 “선택”을 강요당했다.

어떤 사람들은 어딘가에서 저지른 죄가

여기서 다른 죄로 갈아 끼워졌다.


원해서 왔든, 원치 않았든—

나가는 건 자유가 아니라 사건이었다.


운 좋게 탈출한 사람은

처음부터 운이 좋았던 게 아니었다.


철문 틈 하나, 카메라 사각 하나,

경비가 담배 피우러 나가는 90초를

목숨값으로 바꿔낸 사람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은—그런 기회조차 없었다.

나가는 방식은 두 개뿐이었다.


도망치거나.

실려 나가거나.

실려 나간다는 건, 정말로 짐이었다.

여행용 가방, 큰 박스, 세탁물 자루.


프레임 밖으로 사라지면

그때부터 사람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게 여기 규칙이었다.

소리 없이 처리되고, 숫자에서 지워지는.


그래서 작업실의 웃음은

기쁨이 아니었다.


오늘은 “삭제”되지 않겠다는

그냥—하루 연장.


채무 계약서의 함정

처음엔 “일”이었다.

그다음엔 “정산”이었다.


항공권. 숙식. 교육비.

통역비. 장비비. “관리비.”

그리고 규정 위반 벌금.


무슨 이름을 붙이든 상관없었다.

결론은 하나였다.

너는 이미 빚졌다.

그래서 급여는 없었다.

받는 게 아니라, “깎이는” 척만 했다.


오늘 실적이 부족하면—

내일은 빚이 늘었다.


실적이 멈추면—

그건 단순한 ‘0’이 아니었다.

0은 곧, 누군가의 손이 움직인다는 신호였다.


사람들은 숫자를 올리려고 웃었다.

돈을 벌려고가 아니라—

오늘 밤을 넘기려고.


탈출 시도자 ‘본보기’ 처벌

도망치려다 잡힌 사람은

그 자리에서 끝나지 않았다.


여기선 처벌이 목적이 아니었다.

목적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접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을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보이게 만들었다.


복도 한가운데.

카메라 바로 아래.

사람들이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길목.


누군가는 고개를 숙인 채 걸었고,

누군가는 일부러 시선을 고정했다.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안 보면, 다음이 자기일까 봐.


처벌은 길지 않았다.

길게 할 필요가 없었다.

한 번으로 충분했다.


그 한 번이,

며칠을 살게 하고

몇 달을 죽게 만들었다.


그 뒤부터 작업실엔 규칙이 생겼다.

“탈출”이라는 단어가 금지어가 됐다.


그리고 가끔—

사람이 아예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처음엔 다들 “다른 곳으로 옮겨졌나 보다”라고 했다.

다음엔 “벌점이 쌓여서 팔려 갔나 보다”라고 했다.

그 말들이 오래 유지되지 못했다.


어느 날부터는,

아무도 묻지 않았다.


묻는 순간,

그 사람의 이름도

질문도

표정도

기록이 된다는 걸 알았으니까.


여기서 죽음은 드라마가 아니었다.

비명이 아니라 공백으로 왔다.


한 사람 자리의 공백.

한 사람 ID의 삭제.

한 사람 화면의 ‘OFF’ 표시.


그리고 다음 날,

감시방은 똑같이 말했다.


(자막: “Next.” / 다음.)


의료의 부재

여기서 아픔은 ‘상태’가 아니었다.

아픔은 ‘방해’였다.

그래서 치료는 없었다.

있는 건 복귀뿐이었다.


약은 사람을 낫게 하려고 주는 게 아니었다.

사람을 다시 앉히려고 주는 거였다.


잠을 못 자는 사람에게 필요한 건 휴식이 아니라—

다음 날도 웃을 수 있는 얼굴이었다.


멍은 지워지지 않았다.

대신 가려졌다.

컨실러, 파운데이션, 목까지 올라오는 셔츠.


카메라 프레임 안에서만 멀쩡하면 됐다.

프레임 밖은 상관없었다.


여긴 사람을 살리는 곳이 아니라,

사람을 계속 굴리는 곳이었다.


언어의 붕괴

여기선 말이 점점 줄어들었다.

줄어든 말만 남았다.


처음엔 이름이 있었다.

하지만 곧 번호가 됐다.


ID. 등급. 실적. 벌점.

사람을 부르는 소리가 아니라

사람을 분류하는 소리였다.


지시도 길지 않았다.

길게 말할 필요가 없었다.


(자막: “Good.” / 좋아.)

(자막: “Next.” / 다음.)


그 두 단어만으로도

사람들은 움직였다.

작업실의 웃음은

기쁨이 아니었다.


오늘은 “삭제”되지 않겠다는

그냥—하루 연장이었다.


— (장면 복귀) —


선율이 다시 민수를 바라봤다.

민수는 잠깐 말을 잃었다.


선율이 “시설”이라고 말했을 때,
그게 그냥 비유가 아니라는 걸

이제야 느낀 얼굴이었다.


민수가 조용히 물었다.


“그럼… 저 사람들은 전부 범인입니까?”


선율은 한 박자 쉬었다.


“전부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 말이 민수를 더 아프게 했다.
범인은 미워하면 되는데,
‘범인일지도 모르는 사람’은… 분노를 둘 곳이 없다.


민수는 고개를 숙였다.

잠깐 웃음이 새어 나올 뻔했다.
이게 웃을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아서,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도…”


민수가 고개를 들었다.


“경사님. 저는… 결과가 필요합니다.”


선율은 정직하게 말했다.


“김민수 씨가 기대한 방식으로 오늘 끝나진 않을 겁니다.”


“… ”


“하지만 이 자료는 큽니다. 연결이 됩니다. 묶입니다.
확장 수사로 올릴 수 있습니다.”


민수는 잠깐 말을 잃었다.
돈이 돌아오는 결말이 아니었다.


바로 누군가 잡혀가는 결말도 아니었다.
민수의 기대에 못 미치는 결과였다.

그런데도—
민수는 입을 열었다.


“제가… 바보 같은 짓 한 거 압니다.”


선율이 말을 받으려 하자, 민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냥… 들어주세요.”


민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돈도 돈인데… 제가 너무 쉽게 믿었다는 게…
그게… 미치겠어요.”


목소리가 떨렸지만, 울음은 삼켰다.
울면 무너질 것 같아서.

그리고 민수가 선율을 똑바로 봤다.


“경사님.”


민수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저 사람들… 제발 잡아주세요.”
“저 말고도 또 당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민수는 스스로를 설득하듯 덧붙였다.


“돈은… 못 돌려받아도… 괜찮다고 할게요.
근데 꼭 잡아주세요.”


선율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제가 할 수 있는 데까지 하겠습니다.”


약속처럼 들리지만,

현실에서 경찰이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말.


민수는 고개를 숙였다.
고맙다는 말조차 가벼울까 봐, 그냥 삼켰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 앞에서 한 번 멈추고,
뒤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경사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조용히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들렸다.


그 소리는 “퇴장”이 아니라,
민수의 마지막 버팀목이 바닥에 닿는 소리 같았다.


선율은 한동안 문을 바라봤다.

누군가 나가면 사건이 끝나는 게 아니라,
보통은 그때부터 사건이 시작된다는 걸—

선율은 이미 너무 많이 봐왔으니까.


그는 민수의 파일을 다시 열었다.

화면 구석에 아직도 남아 있는 글자.


CAM-07


작은 글자 하나가,
마치 다음 문을 열어버리라는 신호처럼
조용히 박혀 있었다.


김민수가 나가고 문이 닫히자,

면담실 안이 갑자기 넓어졌다.
넓어진 만큼—허전했다.


선율은 등받이에 기대지도 못한 채, 잠깐 눈을 감았다.


“저 사람들… 제발 꼭 잡아주세요.”


그 말이 아직도 귀 안쪽에 붙어 있었다.

모니터가 한 번 깜빡였다.


새로 들어온 접수 알림.

선율은 반사적으로 화면을 눌렀다.


[신규 접수]

유형: 신원 도용 · 투자 사기

관련자: 최윤서 (여, 한국어 가능)

지위: 미확정 (가해자 의심으로 출석 예정 / 피해자 가능성 배제 불가)

특이사항: 한국어 가능(통역 불필요 가능) / 최근 이주(캘리포니아 → 텍사스)


선율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또…’


김민수가 떠나면서 남긴 말이,

이번엔 문장으로 돌아와 있었다.


“저 말고도 또 당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선율은 마우스를 잡았다.

오늘 접수된 건—

김민수 사건의 다음 페이지처럼 느껴졌다.


—다음: 15장-1부 에서…


안녕하세요.

독자분들의 원활한 열람을 위해 본편(최신 회차) 업로드 일정을 아래와 같이 안내드립니다.

[본편 연재 업로드 일정]

3부 구성 챕터: 화~목, 하루 1부씩 업로드

4부 구성 챕터: 화~금, 하루 1부씩 업로드

※ 가능한 한 각 챕터는 동일 주 내 업로드를 완료하여, 이야기 흐름이 끊기지 않도록 운영하겠습니다.


통합본(정주행용) 업로드 안내

통합본은 매주 월요일 업로드됩니다.

현재 통합본은 본편 진행 상황 대비 약 2~3 챕터 정도 후행하고 있습니다. 통합본은 정주행 하시는 분들을 위한 아카이브(묶음) 버전으로, 완결된 챕터부터 순차적으로 묶어 업로드하기 위한 방식입니다.

꾸준히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안내 — 모방 범죄 주의]
본 작품에는 범죄 수법·수사 절차·법정 장면이 현실적으로 묘사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범죄를 미화하거나 정당화하기 위함이 아니며, 현실에서의 모방을 강력히 금합니다.
작품 속 사건은 허구 또는 각색이며, 어떠한 범죄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저작권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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