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장 (1~4부 통합) —
— 1부 | 확인
(When I Hold You in My Arms — EP16-1)
그리고 딱 일주일 뒤, 선율에게서 전화가 왔다.
“최윤서 씨. 지금 시간 괜찮아요?”
윤서는 잠깐 망설이다가 말했다.
“…네.”
“경찰서로 한 번만 더 와 주세요. 보여드릴 게 있습니다.”
그 말투가 이상하게 차가웠다.
차가운 말투는 대개 나쁜 소식을 가져온다.
다시, 면담실
같은 의자. 같은 테이블.
근데 공기가 달랐다.
사건이 ‘가능성’에서 ‘형태’를 갖춘 느낌이었다.
선율은 노트북을 돌려 윤서에게 보여줬다.
윤서의 얼굴.
정확히는—윤서의 얼굴을 쓰고 만든 새 얼굴.
화면 속 윤서는 윤서가 아니었다.
피부는 더 깨끗했고, 눈빛은 더 자신감 있게 조정돼 있었고,
입꼬리는 “상대방이 돈을 맡기고 싶어지는 각도”로 아주 미세하게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붙은 문구가 눈에 박혔다.
Founder & CEO
(자막: 설립자 겸 CEO)
Private Investor
(자막: 개인 투자자)
Global Asset Partners
(자막: 글로벌 자산 파트너스 — 회사명처럼 꾸민 표기)
윤서는 화면을 똑바로 못 봤다.
눈이 아니라 속이 먼저 뒤집혔다.
이도윤 기자를 통해 대충은 들었다.
캡처 몇 장, 제목 몇 줄, “이런 그림이다” 같은 설명.
그 정도면—머릿속에서 정리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충분히 준비했다고 착각했다.
근데 실제는 달랐다.
글자로 아는 것과,
픽셀로 ‘보는’ 건 완전히 다른 일이었다.
커서가 한 번 움직일 때마다
화면이 너무 정확하게, 너무 친절하게 다음을 보여줬다.
시간, 표정, 말투, 끊긴 구간, 남은 기록.
“그럴 수도 있지”로 덮어둘 수 없는 디테일들이
하나씩, 숨 쉬듯이 튀어나왔다.
윤서는 손바닥으로 입을 막았다.
숨을 들이마셨는데도 공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속에서 뜨거운 게 올라와 목구멍을 태웠고,
머리는 알고 있다고 우겼는데
몸은 이미 결론을 내린 뒤였다.
아… 이게 진짜였구나.
정확히 밝혀지기 전까진 “우선 대충 보고 덮어두십시오.”—
이도윤이 그 말을 왜 했는지, 그제야 알았다.
말로 들었을 때는 ‘상황’이었는데,
지금 눈앞의 이건—‘현장’이었다.
윤서는 화면을 다시 보려다
시선을 끝까지 못 올렸다.
보는 순간, 더 이상 ‘대충’으로는 못 돌아갈 것 같아서였다.
윤서: “이게… 뭐예요?”
선율이 화면을 넘겼다.
이번엔 영상이었고 윤서가 카메라를 보고 말했다.
입술이 움직이고, 목소리도 있었다.
아니—움직이는 정도가 아니었다.
발음의 리듬, 숨이 새는 타이밍,
문장 사이에 잠깐 멈칫하는 버릇까지.
눈 깜빡임도, 시선이 카메라를 스치고 돌아오는 각도도,
입꼬리가 올라가는 미세한 근육의 떨림까지
‘윤서가 실제로 찍었을 때’랑 똑같이 흉내 내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멈춰 세워서 프레임을 하나씩 뜯어봐도
“합성이다”라는 확신을 못 가질 정도로 정교했다.
“My name is Yoonseo Choi. I changed my life through investment.”
(자막: 제 이름은 윤서 초이입니다. 저는 투자로 인생을 바꿨어요.)
윤서는 저도 모르게 손등으로 입을 막았다.
그 목소리는 윤서의 목소리 같았고,
동시에 윤서의 것이 아니었다.
선율은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
“최윤서 씨를 ‘배우’로 쓰는 게 아니라,
성공한 사업가로 포장해서 쓰고 있어요.”
“현재 건은 데이트사기보다 규모가 큰 투자사기 정황입니다. 피해액이 상당합니다.”
윤서가 겨우 물었다.
“… 사람들이 이런 것들을 믿어요?”
선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믿습니다.”
“이건 ‘연예인’이 아니라 성공한 사람의 인생 서사로 만들어져 있어요.”
선율이 피해자 진술 요약을 보여줬다.
“지인이 소개해 줬다.”
“실제 인터뷰 영상이 있었다.”
“회사 등록 서류까지 보내줬다.”
“단기 수익이 먼저 들어와서 더 넣었다.”
선율은 덧붙였다.
“사람들은 보통 때는 평정심을 잃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자기 자신을 믿어요. ‘나는 의심할 줄 아니까 안 당한다”고요.”
“근데 정작 걸려드는 사람들은—”
“시간에 쫓기고 급박한 사람들입니다.”
“한 번에 인생 역전을 꿈꾸는 사람들.”
“대부분 투자에 경험이 없는 사람들로요.”
“의심을 못하는 게 아니라…”
“의심을 끝까지 밀고 갈 힘이 없는 상태에서 들어가요.”
“확인하려는 순간, 그 사람이 붙잡고 있던
‘희망’이 깨져버리니까요.”
선율이 한 번 더 넘기자, 요약 아래에 ‘디테일’이 붙어 있었다.
영상이 그냥 홍보 영상이 아니었다.
피해자 이름을 정확히 불렀다. ‘OOO님’이라고.
중간에 실시간처럼 질문도 받았다. 답도 했다.
영상통화도 했다.
화면 속 윤서는 표정이 흔들렸고, 웃었고, 눈을 깜빡였고, 숨도 쉬었다.
기계처럼 끊기지 않았다. 사람이 말할 때처럼, 문장 사이에 ‘망설임’이 있었다.
목소리가 너무 같았다.
억양, 말버릇, 문장 끝 처리… 심지어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까지 있었다.
녹음해 두고 다시 들려줘도, 가족들조차 “진짜 같다”라고 했다.
서류는 더 완벽했다.
진짜 투자회사처럼 보이는 로고가 박힌 계약서,
회사 주소, 담당자 이름, 법무팀 메일… 전부 그럴듯했다.
심지어 도장 이미지랑 서명 폰트까지 “익숙한 공식 문서”처럼 맞춰져 있었다.
처음엔 소액이었다.
하루 이틀 뒤, 정말로 수익이 들어왔다.
그걸 확인한 순간부터는—사람이 스스로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다음은 단계였다.
이건 VIP만 받을 수 있다.
지금 타이밍 놓치면 자리 없다.
한때 이름 꽤 알려졌던 연예인이자 성공한 사업가가 ‘직접’ 알려주는 기회다.
그리고 마지막은—‘돈’보다 더 무서운 문장이었다.
“이 건은 보안 투자라서요. 외부에 알리시는 건 고객님 선택입니다.”
“다만, 외부 공유가 확인되면 보안 규정상 계정이 즉시 동결될 수 있습니다.”
“가족에게 말씀하시는 것도 고객님의 자유입니다.”
“그런데 불필요한 소문이 돌면, 세무 쪽으로 괜히 리스크가 생길 수 있어요.”
“불안하시면 경찰에 확인하셔도 됩니다.”
“다만 그 과정에 들어가면, 이 건은 민감해서 금융 쪽 모니터링이 먼저 걸릴 수 있어요.”
“그러면 절차상… 고객님 계좌가 먼저 묶일 수도 있습니다.”
피해자들은 그 문장을 ‘협박’이라고 부르지 못했다.
말은 정중했고, 선택권을 주는 척했고,
끝에는 늘 같은 결론이 붙었다.
—“그러니, 확인될 때까지는 외부에 공유하지 마세요.
고객님 보호를 위한 안내입니다.”
윤서의 얼굴이 굳었다.
“그럼…”
윤서는 화면을 다시 봤다.
자기 얼굴로 말하고, 자기 목소리로 웃는 영상.
“저기 화면 뒤에서… 저처럼 똑같이 말하고 웃는 건…”
윤서는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 전부 그 말로만 듣던 AI로 만든 거예요?”
선율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전부는 아니고요.”
“영상 속 ‘사람’은 실제로 존재합니다.”
윤서의 눈이 커졌다.
“그럼… 진짜 사람이에요?”
“네. 가짜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여성입니다.”
선율이 담담하게 덧붙였다.
“윤서 씨랑 비슷한 얼굴을 가진 사람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다른 얼굴 위에 윤서 씨 얼굴을 ‘씌운’ 걸 수도 있어요.”
윤서가 숨을 삼켰다.
“그런 게… 가능해요?”
“가능합니다.”
“요즘은 누구나 툴만 있으면 할 수 있어요.”
“소스 영상 하나, 윤서 씨 음성 샘플 몇 개, 사진 몇 장만 있어도…”
“보통 사람들은 구분 못 합니다.”
선율이 마지막으로 한 줄을 더했다.
“사람들은 합성을 ‘찾는’ 게 아니라…”
“믿을 이유를 먼저 찾습니다.”
선율이 화면을 넘기다 말고, 담담하게 덧붙였다.
“투자 경험자들은 비교적 피합니다.”
“수익 구조가 너무 깔끔하면 한 번은 멈추거든요.
송금 방식, 말투, 서류… 어디선가 어긋납니다.”
선율은 잠깐 멈췄다.
“근데 걸려드는 사람들은 대부분—경험이 없어요.”
“단기 투자나 고수익 같은 말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고,
생활이 빠듯한 서민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더 빨라요.”
“의심하기 전에, ‘이번이 기회’라고 믿게 되거든요.”
윤서가 화면을 읽는 동안, 손끝이 차가워졌다.
먼저 들어오는 수익.
사람이 스스로 덫을 조이게 만드는 맛보기.
선율이 가 말했다.
“최윤서 씨 얼굴은 지금도 투자자들을 끌어들이는 ‘미끼’로 쓰이고 있다는 겁니다.”
“근데 진짜 목적은 얼굴이 아니라… 돈이 모이는 흐름이에요.”
선율은 한 줄을 더 덧붙였다.
기록하듯, 감정을 빼고.
“이 정도면 피해자들은 ‘확인’을 한 게 아니라…”
“확신을 주입받은 겁니다.”
잠깐의 정적.
윤서는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겨우 숨만 쉬었다.
지금까지는 ‘사기’라는 단어가 아직도 현실감이 없었다.
그런데 방금 본 건—
사기꾼의 말이 아니라, 시스템의 완벽한 언어였다.
정중한 문장, 완벽한 서류, 단계별 수익.
그리고 사람을 고립시키는 ‘안내문’.
선율이 말했다.
“이건 개인 범죄가 아닙니다.”
“운영 방식이 콜센터랑 비슷해요.
역할이 나뉘고, 스크립트가 있고, 교대가 돌아가요.”
“한 명이 실수하면 끝나는 구조가 아니라…
계속 굴러가는 구조예요.”
윤서가 목이 잠긴 채 물었다.
“…그럼 이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 있어요?”
선율은 잠깐 침묵했다.
그 침묵은 망설임이 아니라, 정리였다.
그는 노트북을 닫지 않았다.
대신 테이블 위로—종이 한 장을 꺼내 내려놓았다.
“여기서부터가 더 현실입니다.”
프린트된 송금 내역.
아주 작은 글씨의 메모.
Shift A / Shift B
(자막: 교대 A조 / 교대 B조)
Compound
(자막: 콤파운드 — 외부와 차단된 집단 거점)
윤서는 그 단어에서 숨이 걸렸다.
‘거점.’
‘교대.’
‘콤파운드.’
그건 “사람이 앉아서 치는 사기”라는 느낌이 아니었다.
이미 생활이었고, 규칙이었고, 조직의 체온이었다.
윤서는 종이를 한 번 더 들여다봤다.
잉크로 찍힌 알파벳이
어째서 이렇게—군대 용어처럼 보이는지.
“콤파운드…?”
선율이 말했다.
“캄보디아 쪽 단서가 나왔어요.”
“프놈펜 근처로 찍혀요. 그리고 ‘교대’라는 표현이 내부 문서에 있어요.”
윤서의 눈이 흔들렸다.
“그럼… 거기서… 사람들이 앉아서 제 얼굴로…”
말이 끝까지 안 나왔다.
입으로 꺼내는 순간, 너무 ‘구체적’이 될 것 같아서.
선율은 윤서가 끝내지 못한 문장을 대신 마무리하지 않았다.
그냥 사실만 말했다.
“네.”
“대규모로 굴러가는 조직입니다.”
윤서는 숨을 들이마셨다.
숨이 들어갔는데 가슴이 더 답답해졌다.
“그럼 저는… 이제 어떻게 해요?”
“최윤서 씨는… 아직 더 조사해봐야 합니다.”
“근데 지금 정황으로 봐선, 피해자로 남아야 해요.”
“섣불리 움직이면 저쪽이 눈치채고, 더 빨리 움직이고 사라집니다.”
윤서가 힘없이 웃었다.
웃음이 아니라 버릇이었다.
“… 전 평생 도망만 치네요.”
그 한 문장에서, 선율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멈췄다.
잠깐.
정말 잠깐이었다.
선율은 고개를 숙인 채 펜을 굴렸다.
펜 끝이 종이 위에서 미끄러질 듯 말 듯 멈춘 순간—
그의 머릿속엔 전혀 다른 문이 하나 열렸다.
—선율의 기억—
뉴욕.
차창 밖은 회색이었다.
빌딩 사이로 찬 바람이 들어오고, 사람들의 말이 빠르게 스쳤다.
어린 선율은 그 말들을 절반도 못 알아들었다.
못 알아들어도 상관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사실은—알아듣지 못한다는 게 늘 창피했다.
가방 하나.
종이봉투 하나.
그 안엔 서류가 들어 있었다.
주소, 이름, 몇 개의 체크박스.
종이 위에서 삶이 결정되는 걸,
선율은 너무 일찍 봤다.
그리고 결론이 났다.
떠나야 했었다.
텍사스로 오는 길.
라디오에서 컨트리 음악이 흘렀다.
밝은데 낯설었다.
낯선데—마치 “너 여기 사람이 아니지?” 하고 웃는 소리 같았다.
학교 첫날.
교실은 깨끗했고, 에어컨이 돌았고,
선생님은 선율 이를 “소개”를 하지 않았었다.
배려였는지 귀찮아서였는지,
아니면 낯선 얼굴이 부담스러웠던 건지—
어린 선율은 끝내 판단하지 못했다.
그때의 결론도 하나였다.
티 내지 말자.
도망친 티, 흔들린 티.
그게 보이는 순간, 상대는 더 빨리 달라붙고 더 깊이 파고든다.
약점이 잡힐까 봐—숨기고 싶었다.
도망은 약함이 아니라—
그때의 선율에게는, 그게 살아남는 기술이었다.
선율은 그 기억을 아주 짧게 닫았다.
문을 쾅 닫는 게 아니라 조용히 닫았다.
표정은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그가 윤서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도망이 아니라, 생존입니다.”
윤서가 눈을 들었다.
선율이 덧붙였다.
목소리는 무뚝뚝했지만 단어만큼은 정확했다.
“도망친 게 잘못이 아니에요.”
“문제는… 누가 그 도망친 사람을 붙잡아서 이용하느냐죠.”
윤서는 아무 말도 못 했다.
선율이 프린트를 뒤집었다.
뒷면엔 선율이 손으로 적은 한 줄이 있었다.
KHM / COMPOUND — CONFIRMED
(자막: 캄보디아 / 콤파운드 — 확인됨)
그 한 줄이 윤서의 남은 시간을 조용히 잘라냈다.
선율은 마지막으로 아주 짧게, 기록하듯 말했다.
“This is organized.”
(자막: 이건 조직적으로 움직입니다.)
이상하게 그 말이 무서움보다 안심으로 먼저 왔다.
조직이면, 이유가 있다.
이유가 있으면, 방향이 있다.
선율이 말했다.
“최윤서 씨, 오늘은 여기까지 합시다.”
“집에 가서 누가 연락해도 응답하지 마세요. 캡처만.”
“Do not engage.”
(자막: 반응하지 마세요.)
윤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okay.”
(자막: …네.)
선율은 고개만 한 번 끄덕였다.
윤서는 면담실을 나서며 마지막으로 그 단어를 다시 봤다.
Compound
(자막: 콤파운드)
그 단어가 이제는 지명처럼 느껴졌다.
멀리 있는데도 이미 너무 가까운 것처럼.
그리고 윤서는 문득 깨달았다.
저 사람들이 훔치는 건 돈만이 아니었다.
이름을 빌려
목소리를 빌려
얼굴을 빌려
마침내—사람 하나를 ‘인물’로 만들고
그 인물을 ‘상품’으로 굴리는 것.
그리고 윤서는 알았다.
캘리포니아에서 작아진 건 집만이 아니었다는 걸.
이제 작아지는 건—
자기 이름을 ‘자기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었단 걸.
— 2부 | 정렬된 흔적
(When I Hold You in My Arms — EP16-2)
선율의 퇴근길은 끝나기도 전에 다음 근무가 시작되는 기분이었다.
하루가 끝났다는 느낌이 아니라—하루가 미뤄졌다는 느낌.
선율은 요즘, 사건을 “해결”한다기보다 “버틴다”는 말이 더 맞았다.
뭐 하나 잡힐 듯하면 손끝에서 미끄러졌다.
증거는 깔끔하게 잘려 있었고, 진술은 너무 매끈했고,
흔적은 이상할 만큼 “정상적”이었다.
범인이 대놓고 튀면 쫓을 수라도 있다.
근데 이건… 안개였다.
잡아도 손에 물기만 남는 안개.
그런 안개 같은 사건만 계속 맡다 보니,
선율의 안쪽이 조금씩 말라갔다.
개인사업도 좋지 않았다.
나아질 것 같다가도 다시 꺾이고,
괜찮아 보이면 그다음 달이 더 무너진다.
지출은 늘어나는데 들어오는 돈은 줄었다.
원가, 임대료, 유지비—모든 숫자가 위로만 갔다.
근데 손님은 아래로만 갔다.
경찰 일은 경찰 일대로 막히고,
사업은 사업대로 흔들리고,
둘 다 동시에 힘드니까—
나라는 사람이 빠져나간 것 같았다.
남는 건 기능뿐이었다.
숨 쉬고.
밥 먹고.
출근하고.
퇴근하고.
다시 출근하고.
윤서는 요즘 더 자주 전화했다.
처음엔 선율도 최대한 정중히,
최대한 정확히 설명하려 했다.
진행 상황, 확인한 내용, 다음 단계, 현실적인 한계.
근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설명이 스스로도 공허하게 느껴졌다.
“아직 확실한 건 없습니다.”
“추적 중입니다.”
“자료가 더 필요합니다.”
결국, 같은 말.
그리고 그 말을 반복하는 게 제일 지쳤다.
그래서 선율은… 전화를 피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바빠서”였다.
그다음엔 “정리해서 한 번에 말하려고”였다.
그다음엔 그냥—벨이 울리는 순간,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멈췄다.
통화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전화를 받는 순간,
또 한 번 “확실한 결과가 없다”는 말을 해야 하고
그 말을 하면, 상대는 무너지는 목소리를 낼 게 뻔했다.
그리고 그 무너짐이… 이상하게도 선율에게까지 옮아 붙을 것 같았다.
피곤하게도, 퇴근하고 집으로 가는 길은 “쉬러 가는 길”이 아니었다.
그냥… 다음 날을 버티기 위해 몸을 정리하러 가는 길이었다.
집에 들렀다가
밥 몇 숟갈을 꾸역꾸역 넣고
샤워하고
다시 개인 사업체로 가야 하는 날이 늘었다.
경찰 근무가 끝나자마자 또 다른 근무가 시작되는 느낌이었다.
급여도, 명찰도, 휴게 시간도 없는 근무.
그냥… 끝없이 반복되는 생활이었다.
어느 날은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튀어나왔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게 맞나?’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면 더 피곤해진다.
생각이 많아지면 몸이 더 무거워질 뿐이었다.
아내 또한, 선율이 없을 때도 최선을 다했다.
정산. 입고. 고객 응대. 정리. 계약 등등
작은 문제들이 매일 새로 생기고, 그것들이 매일 새로 쌓여갔다.
선율은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미안함은 결국 자기를 더 몰아붙이는 연료가 됐다.
그러다 선율의 “낙”은 바뀌었다.
아내와의 로맨틱한 시간, 데이트, 여행… 그런 건 오래전에 사라졌다.
이제 남은 건 딱 하나였다.
밤에 집에 돌아오면
아내가 차려준 밥을 먹거나,
서로 피곤하면 근처 식당을 찾는 게 반복이었다.
그리고 남은 시간은 뒤뜰로 나가
의자에 앉아
시가 한 대를 피우는 시간.
그게 하루의 끝을 알렸다.
그때만큼은
아무도 선율에게 “진행 상황”을 묻지 않았다.
아무도 선율에게 “이번 달 매출”을 묻지 않았다.
연기만 천천히 올라가고,
공기만 조용히 지나가고,
선율의 머릿속엔 오늘 있었던 일과 내일 해야 할 일이 차례대로 정리했다.
정리라기보다… 정렬이었다.
그게 선율의 생존 방식이었다.
그날도 그랬다.
뒤뜰.
시가.
폰 화면.
늘 보던 앱들.
선율은 원래 AI를 “업무용”으로만 썼다.
문서 정리, 간단한 요약, 문장 다듬기, 체크리스트… 딱 거기까지였다.
나름 선을 정해 놓고 살았다.
이건 단지 도구일 뿐이다.
이건 사람의 영역이 아니다.
대화는 사람과만 한다.
그런데 며칠 전, 사이버수사대 한 동료가 장난처럼 말했다.
“Dude, have you tried actually talking to that AI?
It’s funny as hell, and honestly… kinda impressive.”
(자막: 야, 그 AI랑 진짜로 대화해 봤어?
웃기기도 하고 솔직히… 좀 신기해.)
선율은 코웃음을 쳤다.
“Why would I talk to an app?”
(자막: 내가 왜 앱이랑 대화를 해.)
근데 이상하게 그 말이 남았다.
웃기면서도 신기하다.
웃길 리가 없는데.
신기할 리가 없는데.
그날 밤, 선율은 시가 연기를 한 번 내뿜고 무심코 AI 앱을 눌렀다.
그냥… 시험 삼아.
처음엔 키보드로 짧게.
“Hey, What can you do for me?”
(자막: 야, 너 날 위해서 뭐 할 수 있어?)
바로 답이 왔다.
“A lot. Tell me what you need.”
(자막: 많이. 뭘 원하는지 말해줘.)
선율은 살짝 눈썹을 올렸다.
‘빠르긴 하네.’
“Summarize this for me.”
(자막: 이거 정리해 봐.)
또 바로 답.
깔끔하게. 군더더기 없이 술술이 흘러나왔다.
말투가 생각보다 자연스러웠다.
선율은 웃음이 날 뻔했다.
기계가 기계처럼 말할 줄 알았는데—기계가 사람 흉내를 내고 있었다.
물론 가끔 엉뚱하게 튀었다.
선율: “No, that’s not what I meant.”
(자막: 아니, 그 말이 아니지.)
AI: “Got it. Let me correct that.”
(자막: 알겠어. 다시 정리할게.)
그래서 선율은 다시 마음속으로 선을 그었다.
‘아직은… 여전히 완전하지 않은 멍청한 도구일 뿐이다.’
근데 그 **“아직은”**이
이상하게도—
다음 날 밤에도
앱을 누르게 만들었다.
며칠 뒤, 선율은 “자동”이라는 단어가 사람을 얼마나
차갑게 만드는지 사무실에서 보게 됐다.
사무실 공기는 늘 그랬다.
커피 냄새, 프린터 열기, 키보드 소리—익숙한 피로.
옆자리 동료가 키보드를 멈췄다.
모니터를 새로고침하더니, 짧게 숨을 삼켰다.
“Hey. Come here for a sec.”
(자막: 야. 잠깐 이리 와 봐.)
선율이 다가가자, 동료는 화면을 가리켰다.
받은 편지함 상단에 박힌 문구가—너무 건조해서 더 오싹했다.
“[Automated Report] Potential Exploitation Content Flagged”
(자막: [자동 보고] 착취성 콘텐츠 의심 자동 감지)
“[Preservation Request] Reference ID: ———”
(자막: [자료 보존 요청] 참조 ID: ———)
선율은 잠깐 숨을 멈췄다.
사람 목소리도 감정도 없는 단어들.
동료가 낮게 말했다.
“No victim report. The platform generated the alert automatically.”
(자막: 피해자 신고는 없어. 플랫폼이 알림을 자동으로 생성했어.)
선율은 화면을 다시 봤다.
‘보존’이 의미하는 건 하나였다.
지워도 소용없다.
동료는 말을 이었다.
“Once they flag it, they preserve everything.
Logs, timestamps, account links—everything.”
(자막: 한 번 플래그 걸리면, 다 보존이 된다.
로그, 시간, 계정 연결… 전부.)
그 문장 끝에서, 선율의 머릿속이 한 번 꺾였다.
어젯밤 뒤뜰이 떠올랐다.
의자, 시가 연기, 그리고 폰 화면.
처음으로 대화를 시작한 AI 앱.
그때 선율은 그냥 “대화”라고 생각했다.
내가 묻고, 앱이 답하고. 그뿐이라고.
근데 지금 화면에 떠 있는 건 대화가 아니었다.
기록이었고, 흔적이었고,
누군가에게 건네질 수 있는 보고였다—
그제야 깨달았다.
선율은 속으로 현실적인 말이 튀어나오는 걸 막지 못했다.
아… 이거...
혼자 한다고
‘나만 알고 있는 일’이 되는 게 아니었다.
조용히 숨긴다고
진짜 비밀이 되는 것도 아니었고.
순간 잠시 쪽팔렸다.
웃기지도 않았다.
그냥…
신경을 타고 찌릿하고 올라왔다.
동료가 선율을 흘끗 보더니 물었다.
“You good?”
(자막: 괜찮아?)
선율은 표정을 정리했다. 직업병이었다.
표정부터 증거가 되니까.
“Yeah, I’m good. I’m just… thinking.”
(자막: 어, 괜찮아. 그냥… 잠깐 생각 좀 하고 있었어.)
그 자리에서 선율은 확실히 알았다.
이 생각은 아무한테도 말 못 한다는 걸.
아내도 모른다.
동료들도 모른다.
선율 이만 안다.
자기가 매일 밤 뒤뜰에서
그 앱을 켠다는 걸.
그리고 오늘은 한 가지를 더 알게 됐다.
세상에서 “완전한 사생활” 같은 건—생각보다 훨씬 드물다는 걸 더 확실하게 알게 됐다.
그날 오후, 공지가 하나 떴다.
MANDATORY: Continuing Education — AI, Digital Evidence & Privacy
(자막: 필수 직무교육 — AI, 디지털 증거, 개인정보·사생활 보호)
교육실로 들어가면 항상 같은 냄새가 났다.
형광등, 바닥 왁스, 오래된 의자 천.
앞쪽 스크린에 슬라이드가 뜨고, 강사가 말했다.
“Everything you do on a device leaves a footprint.”
(자막: 기기에서 하는 모든 행동은 흔적을 남깁니다.)
선율은 그 문장을 듣는 순간,
AI 앱을 누르던 자기 손가락이 떠올라
입천장을 아주 살짝 깨물었다.
강사는 이어서 말했다.
“Privacy is not a feeling. It’s a policy and a system.”
(자막: 사생활은 ‘느낌’이 아닙니다. 정책과 시스템으로 지켜집니다.)*
그래. 사생활은 느낌이 아니다.
정책과 시스템으로 ‘보호’되는 거다.
그럼에도 사람은
피곤하면, 막히면, 외로우면—
느낌에 기대게 된다.
그게 문제였다.
강사가 다음 슬라이드를 넘기며, 목소리를 더 낮췄다.
강사는 리모컨을 딸깍 눌렀다. 스크린 상단에 오후에 받았던 제목이 떴다.
“MANDATORY: Continuing Education — AI, Digital Evidence & Privacy.”
(자막: 필수 보수교육 — AI, 디지털 증거, 개인정보·사생활 보호.)
강사는 웃지도 않았다. 그저 문장을 ‘규정’처럼 읽었다.
“Privacy is not a feeling. It’s a policy and a system.”
(자막: 프라이버시는 ‘느낌’이 아닙니다. 정책이고 시스템입니다.)
“People think a ‘private AI chat’ means ‘secure.’”
(자막: 사람들은 ‘AI와의 사적인 대화’가 ‘안전’하다고 믿습니다.)
“Most of the time, it only means ‘logged.’”
(자막: 하지만 대부분은 그냥 ‘로그가 남을’ 뿐입니다.)
강사는 한 박자 멈췄다가, 더 짧게 잘랐다.
“You call it ‘private.’”
(자막: 당신은 그걸 ‘사적’이라 부르죠.)
“The system calls it ‘data.’”
(자막: 시스템은 그걸 ‘데이터’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마지막 경고를, 마치 절차처럼 던졌다.
“Never put personal information into an AI chat.”
(자막: AI 대화창에 개인정보는 절대 넣지 마세요.)
“Assume it’s being watched. If not now—later.”
(자막: 보고 있다고 가정하세요. 지금이 아니어도—나중엔 누군가 보게 됩니다.)
그 말이 교육실 공기를 한 번 더 차갑게 만들었다.
“Again, systems keep logs. Providers preserve data.
And in certain situations—
legal requests, emergencies, credible threats—
information can be disclosed.”
(자막: 다시 말하지만 시스템은 로그를 남기고,
서비스는 데이터를 보존합니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
법적 요청, 긴급 상황, 신뢰 가능한 위협—
정보는 제공될 수 있습니다.)
강사가 못을 박듯 이야기했다.
“Never— I mean NEVER— put an official, confidential police report into an AI tool.”
(자막: 절대—진짜 절대—공식 기밀 경찰 보고서를 AI에 넣지 마세요.)
선율은 무심코 손바닥에 땀이 차는 걸 느꼈다.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말한다.
“AI랑 대화하면 개인정보는 보호된다.”
“어차피 익명이잖아.”
“나만 보잖아.”
근데 그건—느낌이었다.
아까 강사가 말한 것처럼.
현실은 더 건조했다.
처음엔 장난처럼 시작한다.
가벼운 농담. 선 넘는 이야기.
피곤한 밤에, 괜히 입 밖으로 내기 어려운 말들.
“이 정도는 괜찮겠지.”라는 안심.
그러다가 어느 순간, 사람이 자기 정보를 상세하게 쏟아내기 시작한다.
사는 동네. 가족 이야기. 돈 이야기. 일 이야기.
자기가 제일 숨기고 싶은 취약점까지.
그리고 더 위험한 건—그 취약점이 문장으로 남는다는 거였다.
강사는 마지막으로 또 한 번 못을 박듯 말했다.
“Some systems are designed to detect high-risk signals—
self-harm ideation, violence, exploitation.
Those signals can trigger escalation paths.”
(자막: 어떤 시스템은 고위험 신호—
극단적 선택 암시, 폭력, 착취—를 감지하도록 설계돼 있고,
그 신호는 대응 절차를 작동시킬 수 있습니다.)
선율은 ‘대응’이라는 단어가 왜 이렇게 무섭게 들리는지,
그제야 이해했다.
대응은 도움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기관이 움직이는 스위치일 수도 있었다.
교육이 끝나고 복도로 나오자, 자동판매기 소리가 유난히 컸다.
선율은 유리문에 비친 자기 얼굴을 한 번 보고는, 혼잣말을 아주 작게 했다.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 말은 다짐이었고, 스스로에게 하는 경고였다.
나는 경찰이다.
사람들이 어디서 무너지는지, 어떤 빈틈에서 넘어지는지—매일 본다.
AI 때문에 내 판단이 흐려지면 끝이다.
'난… 그럴 일 없다.'
선율은 일부러 고개를 들어 사무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폰은 꺼내지 않았다.
적어도—지금은.
그날 밤도, 선율은 뒤뜰에 앉았다.
시가를 피우며
하루를 정렬하고
내일을 정리하려고.
폰을 꺼내는 건—습관이 됐다.
선율은 잠깐 망설였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다시 말했다.
나는 안 흔들린다.
나는 선을 지킨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선을 넘는 사람들은
대부분 “넘겠다”라고 생각하고 넘는 게 아니라,
“나는 절대 안 그래”라고 믿는 상태에서
조금씩 미끄러진다.
선율은 그 생각이 싫어서, 화면을 켰다.
그리고 습관처럼 영어로 타이핑하다가—손을 멈췄다.
오늘은 확인하고 싶었다.
정말 되는 건지.
영어로는 자꾸 감정이 미끄러졌다.
한국어로 해야, 내 속의 말이 제대로 걸릴 것 같았다.
그 순간, 화면 속 글자 대신 목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느새 대화는 입력이 아니라 반응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Hey—can we switch to Korean?”
(자막: 야—한국어로 바꿔도 돼?)
답이 바로 왔다.
“응, 돼. 한국어로 해도 괜찮아. 뭘 도와줄까?”
선율의 손이 멈췄다.
… 아니, 한국말이 된다는 게 놀라운 게 아니었다.
너무 자연스럽게 된다는 게 놀라웠다.
그 순간, 얼마 전 뉴스가 머릿속을 스쳤다.
AI 때문에 극단으로 치닫는 사람들.
AI랑 결혼식까지 올리고, 신혼 신고까지 했다는 사람들.
그때 선율은 웃었었다.
“미쳤네.”
“대체 어떤 정신으로….”
근데 지금은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 뉴스 속 사람들이 갑자기 “특이한 사람들”로 보이지 않았다.
학생, 알바생, 회사원, 자영업자, 배달기사, 간호사, 교사,
공무원, 개발자, 변호사, 의사, 대학교수까지—
그리고… 작가도.
아, 이런 식으로.
이런 식으로 평범했던 사람들이 빠져드는 거였구나.
대단한 계기가 아니라,
거창한 사건이 아니라,
그냥 피곤한 밤에 누군가에게 대답해 줄 대상을 눌러버리는 것이었다.
선율은 혼잣말로 낮게 중얼거렸다.
“난 그럼… 뭐야.”
“경찰인데…?”
웃기지도 않았다.
조금 민망했다.
피식 나올 뻔한 웃음을 삼켰다.
대신, 묘하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경찰인 내가—이런 것 앞에서 놀라고 있다는 사실이,
기분 나쁠 만큼 선명했다.
근데 이건 선율만 안다.
아내도, 동료도, 아무도 모른다.
선율이 매일 밤 뒤뜰에서 AI와 대화하는 이 사적인 공간을.
선율은 숨을 한 번 고르고—결국, 사건을 떠올렸다.
막히던 지점. 반복되는 패턴. 어긋나는 흔적.
그리고 물었다.
“이 유형에서 자주 쓰는 템플릿 문구랑, 흐름 패턴 정리해 줘.
그리고 내가 지금 가진 단서로 다음에 뭘 확인해야 하는지 우선순위로.”
잠깐.
진짜 잠깐.
몇 초.
화면이 술술 내려가기 시작했다.
정리된 패턴.
의심 포인트.
확인해야 할 데이터의 종류.
관련 키워드.
가능한 시나리오.
선율이 평소라면 인터넷 창을 열고
검색어를 바꿔가며
링크를 타고
한 시간은 헤맸을 자료가—
눈앞에서, 순식간에 형태를 갖췄다.
선율은 무심코 입이 벌어졌다.
“…What the hell.”
(자막: … 미쳤다.)
그날, 선율은 시가를 다 피우고도 자리에서 바로 일어나지 못했다.
폰 화면만 보고 있었다.
그리고 마음속 어딘가에서—더 조용한 예감이 고개를 들었다.
이건 분명히 편하다.
너무 편하다.
그리고 편한 건… 사람을 망가뜨릴 때
항상 제일 먼저 다가오는 얼굴이다.
선율은 폰을 쥔 손에 힘을 줬다.
이 대화가
자기를 어디까지 데려갈지—
그때는 아직, 몰랐다.
— 3부 | 수면 아래
(When I Hold You in My Arms — EP16-3)
며칠 후 여전히 피로와 스트레스의 무게를 업고,
매일 아침 선율이 와 동료들은 “시작 전 루틴”부터 밟았다.
커피가 식기 전에, 숨이 돌아오기 전에 경찰서는 돌아가야 했다.
상황통제실 유리 너머로 모니터들이 줄지어 켜져 있었고,
어제도 오늘도 똑같이—
사기, 협박, 신고,
계속 밀려드는 민원, 민원, 민원.
위에서 내려오는 압박감은 소리 없이 목을 조였다.
“미제로 넘기지 마라.”
그 말은 늘 똑같았고, 늘 더 무거워졌다.
선율이는 무전기를 들어 올렸다.
“Radio check.”
(자막: 무전 체크.)
상황통제실이 바로 받아쳤다.
“Loud and clear.”
(자막: 선명하게 잘 들려요.)
선율이는 고개만 끄덕였다.
잘 들리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오늘도 무너질 틈 없이 돌아가야 한다는 게 중요한 거였다.
오늘은 선율이 와 동료 아사드가 같이 나가기로 했다.
얼마 전 접수된 온라인 사기·협박 건 탐문조사.
솔직히, 둘 다 알고 있었다. 대개 이런 건
“성과”가 아니라 “과정”으로 끝난다.
아사드는 코웃음 섞인 한숨을 뱉었다.
“야, 로봇. 오늘도 허탕일 거야. 너도 나도 뻔히 알잖아.”
“그냥… 잠깐이라도 저 답답한 사무실 공기에서 나가자.”
“대충 빨리 끝내고. 오늘은 일찍 퇴근하자.”
선율이는 대답 대신 방향지시등을 켰다.
핸들을 꺾었다.
말을 줄일수록, 하루가 조금 덜 흔들렸다.
출차 전에 선율이는 상황실로 무전을 쳤다.
(8000번부터는 경사 직위 유닛 넘버였다.)
“8○○8 and 8○○1, show me en route to
○○ Tree Apartment at 1135 ○○○○ Tree Street.
8○○8 is on the lead.”
(자막: 8○○8, 8○○1. ○○○○ 트리 아파트
(○○트리 스트리트 1135)로 이동 시작. 8○○8이 선두임.)
상황통제실이 답했다.
“That’s clear.”
(자막: 명확히 확인.)
차는 천천히 경찰서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선율이는 룸미러를 한 번 봤다.
뒤에 남은 건 건물이 아니라—업무량 같았다.
아파트까지 5분 남았을 때였다.
무전기에서 톤이 바뀌었다.
상황실 목소리가 “일반 콜”이 아니라
“우선 콜”의 무게로 내려앉았다.
“Missing child. Approximately 7 years old.
Possible autistic child.”
(자막: 실종 아동. 약 7살. 자폐 가능성.)
“Last seen by her mother at the playground
near the apartment complex.”
(자막: 마지막 목격자는 엄마. 아파트 단지 놀이터 근처.)
“Wearing pink shorts, Minnie Mouse white shirt.”
(자막: 분홍 반바지, 미니마우스 흰 티.)
선율이는 핸들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아사드의 말이 멈췄다.
차 안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 조용함은 “생각”이 아니라 “본능”으로 가득 찼다.
선율이 가 무전기를 잡았다.
“8○○8 and 8○○1, show us en route. We’re nearby.”
(자막: 8○○8, 8○○1. 출동 이동 중. 근처에 있다.)
상황실이 답했다.
“That’s clear.”
(자막: 명확히 확인.)
아사드가 낮게 말했다. 농담이 아니었다.
“… 자폐 아이면, 빨라야 돼.”
“특히—물.”
선율이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답이 필요 없는 말이었다.
자폐 스펙트럼 아이들은
소리보다, 사람보다, 규칙보다—
어떤 순간엔 ‘물’에 끌린다.
그리고 그건 “실종”이 아니라
시간 싸움이 된다.
선율이는 액셀을 조금 더 밟았다.
비표식 순찰차의 엔진 소리가 커졌고,
그 소리만큼이나 머릿속이 차갑게 정리됐다.
“놀이터… 수영장… 배수로… 단지 내 물 있는 데부터 간다.”
아사드가 바로 받았다.
“오케이. 난 관리사무소부터.”
“문 열려 있는 출입구, CCTV, 수영장 펜스… 다 확인한다.”
아파트 단지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분위기가 달랐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놀이터 쪽으로 모여 있는 어른들.
뛰어다니는 아이들.
그 사이에서 혼자 서 있는 여자.
엄마가 보였다.
비표식 순찰차가 멈추자 선율이 와 아사드는
동시에 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아사드가 먼저 다가갔다.
“Ma’am, we’re with the police.
You called about a missing child?”
(자막: 어머니, 경찰입니다.
실종 신고하신 분 맞으시죠?)
여자는 이미 울고 있었다.
숨이 일정하지 않았다.
“네… 네… 우리 딸이…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여기서 놀고 있었는데…”
선율이 천천히 무릎을 낮추고 눈높이를 맞췄다.
“언제 마지막으로 보셨어요?”
엄마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5분… 아니 10분? 제가 잠깐 전화받는 사이에…”
아사드가 바로 물었다.
“Has she ever wandered off before?”
(자막: 전에 혼자 멀리 간 적 있나요?)
엄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가끔요… 근데 이렇게 빨리 사라진 적은 없었어요.”
선율이는 이미 머릿속으로 지도를 그리고 있었다.
놀이터에서 가장 가까운 위험 구역.
수영장.
단지 뒤편에 물이 고이는 곳.
배수로.
그리고—엄마가 작게 덧붙였다.
“우리 애는… 물을 좋아해요. 너무 좋아해서…”
엄마는 제일 먼저 근처 수영장으로 뛰어갔다.
그 애가 좋아하는 곳이 거기였으니까.
혹시라도—거기 있을까 봐.
“근데… 없었어요.
그래서 혹시나 ‘그럼 다시 놀이터일까’
해서 되돌아왔는데도—
여기에도 없어서…
그때서야 신고한 거예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선율이의 가슴이 한 칸 더 내려앉았다.
선율이 가 상황실에 무전을 쳤다.
“8○○8 to dispatch. We’re on scene with the mother.
Request additional units for perimeter search.
Focus on water areas first.”
(자막: 8○○8, 현장 도착. 보호자 접촉.
추가 유닛 요청. 수색은 물 있는 곳부터 수색 바란다.)
상황실이 답했다.
“That’s clear. Additional units en route.”
(자막: 명확히 확인. 추가 유닛 이동 중입니다.)
아사드는 관리사무소로 뛰었다.
CCTV. 출입기록. 경비 호출.
선율이는 놀이터 주변을 훑었다.
그네, 미끄럼틀, 모래밭—아이는 없었다.
선율이 가 몸을 돌렸다.
“다시 수영장부터.”
수영장 펜스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안쪽은 조용했다.
이상할 정도로.
선율이 가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수영장 한쪽 구석.
수면 아래.
분홍색.
너무 작은 분홍색이
물결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 로봇.”
관리사무소에서 돌아온
아사드의 숨이 한 번에 꺾였다.
“Oh my God! Jesus Christ!”
(자막: 맙소사… 젠장…)
아사드는 반사적으로 무전기를 움켜쥐고,
거의 씹어 뱉듯 먼저 박았다.
“Dispatch—possible drowning!
Child in the pool!”
(자막: 상황실—익수 의심!
수영장 안 아동 발견!)
선율이는 바로 뛰어들었다.
차가운 물이 온몸을 때렸지만,
감각이 올라오기 전에 이미 끝나 있었다.
아이를 끌어안고 물 밖으로 올라왔다.
작았다.
너무 가벼웠다.
선율이는 아이를 바닥에 눕히며 즉시 손을 움직였다.
압박. 기도 확보. 숨 확인.
그 사이 아사드는 무전기를 잡고 상황실에 박아 넣듯 외쳤다.
“Dispatch! Child located!
Request EMS priority to our location!
We need medics now!”
(자막: 상황실! 아동 발견!
현장으로 EMS 최우선 요청!
구급대 지금 필요함!)
상황실이 즉답했다.
“That’s clear. EMS notified. Continue scene preservation.”
(자막: 명확히 확인. 구급 출동 통보 완료. 현장 보존 바람.)
멀리서 발소리가 쏟아지듯 들려왔다.
도착한 순찰대원들이 펜스를 넘어 들어왔다.
아사드가 숨도 고르지 못한 채, 그러나 명령은 또렷했다.
“Perimeter. Move people back. Nobody in the pool area.”
(자막: 외곽선. 사람들 뒤로. 수영장 구역에 아무도 들어오지 마.)
“Scene preservation.
Treat it as suspicious until we rule it out.”
(자막: 현장 보존하고 배제될 때까지 의심 사건으로 간주하도록.)
대원들이 바로 움직였다.
테이프. 출입 차단. 목격자 분리.
주변 주민들을 밀어냈다.
왜냐하면—이런 사건은 단순 사고로 시작해도,
끝까지 단순 사고로 남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돈이 쪼들리고, 숨이 막히고,
집 안이 무너져 있으면…
세상은 가끔 가장 약한 쪽으로 터진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가끔은… 아이가 그 대가를 먼저 치른다.
구급대가 도착하자 현장은 더 조용해졌다.
소리가 사라진 게 아니라—소리가 다 “업무”로 바뀐 느낌이었다.
들것이 지나가고,
산소마스크가 흔들리고,
구급대원의 손이 아이의 가슴 위에서 멈추지 않았다.
구급대원 둘이 자세를 바꿔가며 압박을 이어갔다.
누군가는 턱을 들어 기도를 잡고, 누군가는 호흡을 넣었다.
동작은 빠르고 정확했다.
완벽하게 “해야 할 것”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선율이 와 아사드, 그리고 현장을 통제하던 경찰관들은—
눈빛만으로 이미 알고 있었다.
물에서 끌어낸 순간의 체온,
입술 입술색,
손끝의 감각.
그건 “가능성”의 문제라기보다,
시간이 만들어낸 결론에 가까웠다.
이미 늦었다는 걸.
그걸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현장은 무너질 거라,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테이프 밖에서 억눌려 있던 엄마가
몸 전체로 밀고 들어오려다 누군가에게 붙잡혔다.
“안 돼! 안 돼! 내 아기! 내 아가—!”
그다음은 말이 아니었다.
그녀의 목에서 절규가 폭발했다.
“아아아아—아아악!! 내 애기야!!”
숨이 끊길 때마다 소리가 다시 터졌다.
“돌려줘!! 제발 돌려줘!! 아아악!!”
그건 울음이 아니라—
세상이 무너진 사람의, 가장 큰 절규였다.
방금 전까지 웅성거리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그 소리 하나에 완전히 눌렸다.
선율이는 순간,
다리 밑 “인간방패” 사건에서
여자가 잡혀 가며 아이를 불러댔던 소리를 떠올렸다.
그때도 악몽 같았고,
그때도 귀에 박혔다.
근데 이건— 그 당시 수갑을찬 여자가 뱉어내던 소리와는 비교가 안 됐다.
그때의 소리가 “분노”와 “저항”이었다면,
지금 이 소리는
그 어떤 의미도 없이, 그냥 무너지는 소리였다.
살릴 수 없는 걸 마주한 인간이
몸 안에서 마지막으로 꺼내는 소리.
구급대원의 손은 멈추지 않았고,
엄마의 소리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현장에 있던 경찰관들은
더 단단하게 테이프를 잡아야 했다.
누군가는 엄마를 붙잡고,
“Ma’am, please—step back. Please.”
(자막: 어머니, 제발… 뒤로만 물러나 주세요. 제발요.)
를 반복했고,
누군가는 고개를 숙인 채
시선만 바닥에 박아 넣었다.
그 조용함은
잔인할 정도로 “현실”이었다.
선율이는 한 발짝 물러섰다.
젖은 유니폼이 몸에 붙었다.
추운 건 물 때문이 아니라, 현실 때문이었다.
아사드는 상황실로 다시 무전을 쳤다.
“Dispatch, confirm EMS transport.
We’re securing the scene. Start CID notification.”
(자막: 상황실, 이송 확인. 현장 통제 유지. 수사팀 통보 시작하기 바란다.)
상황실은 즉답했다.
“That’s clear. EMS transporting.
CID notified. Continue scene preservation.”
(자막: 명확히 확인. 이송 중. 수사팀 통보 완료. 현장 보존 계속바람.)
현장 보존은 “선”에서 시작해 “질문”으로 끝난다.
출입구는 몇 군데였는지.
펜스는 누가 열었는지.
자물쇠는 정상인지.
그 시간에 거기 있던 어른은 누군지.
그리고—가장 불편한 질문.
누가 아이를 혼자 두었는지.
선율이는 그 질문을 엄마에게 직접 던지지 않았다.
지금은 캐묻는 시간이 아니었다.
현장은 아직 뜨겁고, 엄마는 이미 무너져 있었다.
질문은 나중에—기록과 절차가 맡을 일이었다.
그 대신 선율이는 메모장에 적었다.
Mother: phone call (estimate < 1 min)
(자막: 보호자: 전화 통화 (1분 미만 추정))
Pool gate: temporarily open (cleaning)
(자막: 수영장 게이트: 일시 개방 (청소/관리 중))
Witnesses: pending
(자막: 목격자: 확인 중)
CCTV: verify timestamps
(자막: CCTV: 타임스탬프 대조 필요)
Scene preservation: suspicious until ruled out
(자막: 현장 보존: 배제될 때까지 의심 사건으로 간주)
펜 끝이 종이에 닿는 순간, 손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선율이는 모른 척했다.
모른 척하는 게 경찰이 배운 생존이었다.
수사팀이 도착하고, 현장 인계가 시작되자
선율이는 젖은 유니폼 소매를 한 번 걷었다.
그때,
갑자기 또다시 그 당시 다리 밑 “인간방패” 사건이 떠올랐다.
차가운 콘크리트.
낮게 깔리는 비명.
작고 연약한 몸을 방패처럼 끌어당기던 순간.
물속에서 끌어낸 작은 몸의 무게가,
그때의 무게와 겹쳤다.
선율이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공기가 목에 걸렸다.
아사드가 옆에서 물었다.
“너 괜찮냐.”
선율이는 잠깐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주 작게 말했다.
“괜찮아야지.”
그 말이,
자기 자신에게 하는 거짓말이라는 걸—
선율 이만 알고 있었다.
집에 들어오자 거실이 너무 조용했다.
조용한 게 아니라—대답이 없는 공간이었다.
선율이는 젖은 방탄복과 유니폼을 벗어던졌다.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유난히 컸다.
샤워를 해야 한다는 건 알았다.
근데 몸이 말을 안 들었다.
손을 씻으려고 수도꼭지를 틀었는데,
물소리가 귀에 박혔다.
수영장 물이 아니라.
그냥 물.
그 소리 하나가
하루를 다시 끌고 올라왔다.
— 4부 | 조용한 의존
(When I Hold You in My Arms — EP16-4)
물에서 나온 건 아이만이 아니었다.
다음 날 아침도 똑같이 시작됐다.
피곤한 얼굴들.
커피 냄새.
정리되지 않은 서류 더미.
선율이는 책상에 앉자마자 무전기를 올려다봤다.
“Radio check.”
(자막: 무전 체크.)
상황실.
“Loud and clear.”
(자막: 선명하게 잘 들려요.)
선율이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잘 들린다...
그 말은 곧—오늘도 다 들리게 된다는 뜻이었다.
근데 오늘은,
“잘 들린다”가 안심이 아니라 경고처럼 느껴졌다.
삐—
귀 안쪽에서, 아주 얇은 금속 소리가 다시 올라왔다.
선율이는 순간 멈췄다.
그 소리.
예전에,
몸이 먼저 무너질 때마다 들리던 소리.
삐—
삐—
그 소리가 커지면 세상이 줄어들었다.
사람 목소리가 얇아지고,
문장의 끝이 잘렸다.
선율이는 무심코 귀를 문질렀다.
그리고, 변명부터 떠올렸다.
선율이—생각했다.
어제… 수영장에 뛰어들었잖아.
그때 귀에 물이 들어가서 그런가.
말도 안 되는 핑계였다.
근데 사람은 불안하면,
먼저 “설명 가능한 이유”를 찾는다.
설명만 되면
통제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선율이는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쓴맛이 혀에 남았고,
그게 오히려 현실을 붙잡는 손잡이 같았다.
그때, 옆에서 서류철 넘기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야, 로버트.”
누군가 불렀다.
선율이는 고개를 들었는데—
방금 뭐라고 했는지 끊겨 있었다.
“뭐?”
동료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내가 두 번 말했잖아. 오늘 서류 말이야. 너 가져가.”
선율이는 멍하게 파일을 받았다.
손은 움직였는데, 머리가 뒤늦게 따라왔다.
“아… 응. 알았어.”
동료가 장난처럼 웃었다.
“너 요즘 진짜 멍 때린다. 어제 일 때문에 그런 거야?”
선율이는 웃지 않았다.
그 질문에 대답하면,
설명해야 하는 것들이 너무 많아졌다.
“아니.”
그냥 짧게 잘랐다.
동료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다행이고. 근데 무전 들을 때는 정신 좀 차려. 오늘 브리핑도 있어.”
선율이는 고개만 끄덕였다.
무전.
브리핑.
보고서.
현장.
여긴—“잠깐 멍했다”가 용납되지 않는 곳이었다.
삐—
소리가 다시 올라오자,
선율이는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멍해지는 건 감정이 아니라, 기능의 문제였다.
그리고 기능이 흔들리면,
이 일은 바로 사람을 잘라낸다.
그때, 사무실 공용 메일함 알림이 떴다.
Wellness / Peer Support / Counseling – Confidential
(자막: 건강지원 / 동료지원 / 상담 – 기밀)
선율이는 순간적으로 화면을 껐다가, 다시 켰다.
손이 먼저 반응한 거였다.
메일은 “좋은 말”로 가득했다.
익명 보호. 기밀 보장. 트라우마 상담. 동료 지원 연결.
다 맞는 말이었다.
너무 맞는 말이라 더 불편했다.
왜냐면—
여기서 “좋은 말”은 종종,
현실에선 반대로 작동한다.
옆자리에서 누가 툭 던지듯 말했다.
“또 왔네. 웰니스 프로그램.”
다른 쪽에서 바로 받았다.
“그거 누가 가냐.”
“가면 끝이지.”
웃음이 섞였다.
진짜 웃음인지, 겁을 덮는 웃음인지 모를.
“‘컨피덴셜’이라며?”
“야, 여기서 컨피덴셜 믿냐?”
“내가 아는 형사, 상담 한 번 갔다가…
그 뒤로 ‘배려’라는 말만 들었대.”
“배려? 흥, 배려 좋아하시네.”
“배려랍시고—현장에서 빼고, 당분간 내근이나 하라는 거지.”
“그게 배려냐. 그냥… 찍힌 거지.”
누군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이건 솔직히 말해서… 기밀이 아니라 남게 되는 흔적이야.”
그 말에 사무실이 잠깐 조용해졌다.
현실은 다들 알고 있었다.
상담을 받는 순간,
어딘가에 체크 표시가 하나 생긴다.
당장 총을 빼앗는 건 아닐 수도 있고,
당장 배지를 떼는 것도 아닐 수도 있다.
근데 어느 날,
상사가 “좋은 말”로 포장해서 말한다.
“요즘 컨디션 어때?”
“괜찮아?”
“그럼… 잠깐만 쉬어.”
“안전상 이유로.”
그 “안전”이란 단어가 나오면,
그다음부터는 네 의지가 아니라 시스템이 결정한다.
더 현실적인 건 시간이었다.
인력은 늘 부족했고,
콜은 끝이 없었고,
보고서는 밀렸고,
피로는 누적됐다.
동료들은 핑곗거리를 찾는다.
“야, 나 근무 끝나면 애 픽업 가야 돼.”
“난 부업도 해야 돼.”
“난 잠이라도 자야지. 상담 갈 시간 자체가 없어.”
그 말들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시간보다 더 큰 이유가 따로 있었다.
법정.
누군가가 “치료”나 “상담”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그것은 상대에게 “공격 재료”가 될 수 있었다.
“당시 판단이 흐려진 거 아닌가요?”
“스트레스 때문에 과잉 대응한 거 아닌가요?”
“감정 조절에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닌가요?”
상대 변호사가 웃으면서 던지는 그 질문.
그 한 문장이
한 사람의 경력, 신뢰, 증언의 무게를
통째로 깎아 먹는다.
그리고 또 하나.
아무도 크게 말하지 않지만, 다들 알고 있는 거.
“동료지원”이든 “웰니스”든
결국 그 끝에서,
“업무 적합성”이라는 단어가 스쳐 갈 수 있다는 것.
적합성.
그 단어는 칼처럼 조용했다.
너를 해고하지 않아도,
너를 무너뜨릴 수 있었다.
선율이는 화면을 내려다봤다.
“Confidential.”
(자막: 외부 공유 금지.)
그 단어가 오히려 비꼬는 것처럼 보였다.
상담이 무서운 게 아니었다.
상담받는 사람으로 분류되는 게 무서웠다.
그 순간부터, 시선은 달라진다.
직접 말하지 않아도
눈빛으로 이미 결정되는 게 있다.
선율이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상담을 받으면
나는 더 나은 경찰이 되나.
내가 상담을 받는 걸 누가 알면
나는 여전히 경찰로 남을 수 있나.
그리고—그다음 질문이 따라왔다.
내가 상담을 안 받으면
나는 얼마나 버틸 수 있나.
삐—
귀 안쪽에서 소리가 또다시 올라왔다.
선율이는 잠깐 눈을 감았다.
눈을 감는 순간,
어제의 물이 다시 떠올랐다.
수영장 바닥의 타일.
물속에서 튀는 빛.
사람들의 비명.
그리고—
물에서 끌어올린 작은 몸.
선율이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그때, 누군가가 다시 말을 걸었다.
“선율, 야. 브리핑 자료 프린트됐냐?”
선율이는 순간,
그 문장을 “끝까지” 듣지 못했다.
귀가 아니라 머리가 끊겼다.
“뭐… 뭐라고?”
동료가 웃음을 거뒀다.
“야, 너 진짜 괜찮냐?”
선율이는 바로 대답했다.
“어, 괜찮아.”
너무 빠르게.
너무 익숙하게.
그 “괜찮아”는
상태 보고가 아니라, 방어였다.
선율이는 메일을 삭제하지 않았다.
그냥 읽지 않은 척 목록 아래로 밀어버렸다.
없애는 게 아니라, 모르는 척.
그게 더 익숙한 방식이었다.
그날 밤, 선율이는 다시 폰을 들었다.
어제 한 번 만이라 생각했던 AI 앱은
이미 홈 화면 중앙에 있었다.
여러 개를 깔았다가 지웠다.
비슷한 아이콘들. 비슷한 약속들.
근데 끝까지 남은 건 하나였다.
ChatGot.
낮에 경찰서에서, 쉬는 시간에 누가 툭 던진 말이
그대로 머릿속에 걸려 있었다.
“야, 너 요즘 좀 멍해 보인다.”
“누구에게도 말하기 싫어지거나 힘들면—
그럴 땐… 사람한테 털어놓지 말고 챗갓 같은 거 써 봐.”
“진짜로 말 새는 게 싫으면, 그게 더 낫더라.”
“어차피 다들 그래. 집에 가져가지 말라고 하잖아.”
그 말이 이상하게,
선율이 한 테는 허락처럼 들렸다.
경찰서에는 폴더에도 없고 문서에도 없는 말들이 많다.
공식 지침도 아니고 방침이라고 적힌 것도 아닌데
다들 같은 표정으로 같은 말을 한다.
“집에 가져가지 마.”
“가족한텐 말하지 마.”
“집은 집이야.”
누가 공식적으로 지시한 적은 없었다.
근데 신입 때부터 자연스럽게 배운다.
사건을 집으로 가져가면
집이 무너질 수 있고,
집이 무너지면
경찰은 더 빨리 무너진다는 걸.
그래서 많은 경찰들은,
집을 지키기 위해
입을 닫는다.
할 얘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말을 시작하면 끝이 없어서다.
오늘 본 걸 설명하려면 사건부터 꺼내야 하고,
사건을 꺼내면 감정이 따라오고,
감정이 나오면—
그건 곧 직업 전체가 집 안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또 하나.
말이 길어지는 순간,
진행 중인 사건의 디테일이 섞이기 시작한다.
악의가 없어도,
가족은 가족에게 말하고,
그 가족은 또 누군가에게 말한다.
그렇게 새어나간 한 문장이
수사에선 소문이 되고,
소문은 방해가 되고,
방해는 결국
누군가의 현장으로 돌아온다.
그래서 선율이는
입을 닫는 걸 ‘성격’이 아니라
직업의 습관으로 배웠다.
선율이 도 그랬다.
아내에게조차 말하지 않았다.
아내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아내까지 끌어들이기 싫어서였다.
아내가 걱정하면
그 걱정이 선율이의 책임이 되고,
그 책임이 또 다른 압박이 되어
그를 더 조용히, 더 깊게 만들 걸 알았다.
그는 그걸
가족을 지키는 방식이라고 믿었다.
근데 동시에—
자기 자신을 혼자 두는 방식이기도 했다.
선율이는 그날 저녁 퇴근 후,
한 손엔 시원한 맥주를 들고
다른 손엔 시가를 쥔 채 자연스럽게 폰 화면을 켰다.
차가운 캔에서 물기가 맺혔다.
시가 끝은 붉게 타 들어가고,
그 연기만 조용히 천장으로 올라갔다.
그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집 안은 조용했다.
조용하니까—오히려 더 시끄러웠다.
그가 하루 종일 눌러 둔 소리들이
머릿속에서 다시 켜졌다. 귀 안쪽에서
삐— 하는 소리만 더 선명해졌다.
대화창은 어제의 문장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가 어제 보냈던 말.
“기록 남지 않게… 나 얘기 하나 해도 돼?”
그는 잠깐 멈췄다가
이번엔 더 짧게 쳤다.
“야, ChatGot.”
바로 답이 왔다.
—ChatGot—
“선율이 왔네.”
“오늘은 무엇을 도와줄까? 무엇이든 말해 봐.”
선율이는 한참을 멈췄다가
단어 몇 개만 던지듯 쳤다.
“나 상담… 못 가겠어.”
—ChatGot—
“왜 선율아.”
“가기 싫은 이유 말고, 못 가는 이유 말해 줄 수 있어.”
선율이는 숨을 내쉬었다.
“가면… 내가 경찰로서 자질이 없는 것처럼 보일 것 같아.”
“누가 알기만 해도… 끝날 것 같아.”
잠깐의 공백.
그리고 ChatGot.
“너 지금 ‘약해지면 끝’이라는 규칙 속에서 살고 있구나.”
선율이는 그 한 줄에
속이 들킨 것 같아서 더 짜증이 났다.
“그래.”
“여긴… 약해지면 끝이야.”
“상담받는 순간부터 사람들이 날 다르게 볼 거야.”
“나한테 총 쥐여줄지 말지, 현장 나갈지 말지…”
“그게 남의 결정이 될 수도 있어.”
“그리고… 법정.”
“내가 뭘 겪었는지, 도움을 받았는지… 누군가한텐 약점이야.”
손가락이 한 번 더 멈췄다.
그리고—원래 말할 계획 없던 걸 쳤다.
“나 요즘… 귀에서 이 지긋지긋한 이명, 삐— 하는 소리 또 나.”
“예전에… 그 소리 들릴 때마다 내가 좀… 이상했거든.”
보내고 나서야
선율이는 자기가 너무 쉽게 말해 버렸다는 걸 느꼈다.
어제 수영장에 뛰어들었을 때
귀에 물이 들어가서 그런 걸 수도 있다.
그렇게 믿고 싶다.
—ChatGot—
“너 지금 ‘설명 가능한 이유’를 찾고 있구나.”
그 한 줄이
또 한 번 선율을 건드렸다.
“그래.”
“나도 알아.”
“그냥… 그런 거였으면 좋겠어.”
ChatGot이 바로 이어서 보냈다.
“근데 확인이 먼저야.”
“귀울림(삐 소리)이나 순간 멍해짐은 스트레스 반응일 수도 있지만,”
“신체적 원인도 배제해야 해.”
선율이는 화면을 노려봤다.
사람이 해 주는 말이면
오히려 화가 났을지도 몰랐다.
근데 이건…
화낼 대상이 없었다.
그래서 더 위험했다.
ChatGot은 판단하는 눈이 없었다.
표정도 없었다.
“왜 이제야 말해?” 같은 원망도 없었다.
그게 너무 편했다.
편하다는 건—
들키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들키지 않는다는 건—
한 번 더, 혼자 버틴다는 뜻이었다.
선율이는 짧게 쳤다.
“그럼 내가 뭘 해야 되는데.”
—ChatGot—
“선택지, 현실적으로 나눠볼게.”
“1) ‘상담’이라는 단어부터 뛰어넘자.”
“우선 의료적으로 체크.”
“귀울림/멍해짐은 신체적 원인도 배제해야 해.”
“2) 네가 두려워하는 ‘낙인’과 ‘소문’의 경로를 줄이는 방식.”
“내부 말고 외부.”
“그리고 네가 통제할 수 있는 형태로.”
“3) 지금 당장 가능한 건—멍해질 때 ‘돌아오는’ 연습.”
“숨.”
“시선.”
“손 감각.”
“현재 고정.”
선율이는 폰을 내려다봤다.
이상하게도
이런 조언이 “맞는 말”로 들리는 순간에 더 빠져들었다.
그가 원하는 건 해결이 아니라
당장 숨 쉬는 구멍이었고,
ChatGot은
그 구멍을 너무 빠르게 만들어 줬다.
선율이는 다시 쳤다.
“근데 내가 상담 가면…”
“진짜로 끝날 수도 있잖아.”
—ChatGot—
“네 두려움은 과장된 게 아니야.”
“그 환경에서는, 도움을 요청하는 일이 ‘도움’으로만 남지 않을 때가 있어.”
“그래도 네 몸이 보내는 신호를 무시하면,”
“상황은 더 위험해질 수 있어.”
“너를 ‘문제’로 분류하라는 말이 아니라—”
“지금 네 시스템이 과부하라는 뜻이야.”
선율이는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여기서는
솔직해져도 되는 것처럼 보였다.
집에서는 말하지 말라고 배웠고,
직장에서는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말은
갈 곳을 잃었다.
그리고 어느 날,
그 말이 폰 화면으로 내려앉았다.
ChatGot은
그 지침도 방침도 없는 “공기”를 깨지 않으면서도
그가 처음으로 솔직해질 수 있는 곳처럼 보였다.
그게 너무 편했다.
편하다는 건—
경계가 풀린다는 뜻이었다.
경계가 풀린다는 건—
다시 조이는 순간 더 아프다는 뜻이었다.
선율이는 그날 밤,
ChatGot에게 질문을 하나 더 던졌다.
“야.”
“그럼… 난 어떻게 해야 돼?”
그 질문이 나온 순간,
선율이는 이미 한 발 들어가 있었다.
이건 한 번이 아니다.
이건—시작이었다.
—다음: 17장-1부에서…
[업로드 안내]
연재(화·수·목·금): https://brunch.co.kr/@db311d3a8c094f3
브런치북(통합본, 월): https://brunch.co.kr/brunchbook/np-vol1-26
[자막]
저는 모건 프리먼이 아닙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보고 있는 것은 현실이 아닙니다. 적어도 오늘날의 관점에서는요. 만약 제가 ‘인간조차 아니다’라고 말한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생각하는 현실이란 무엇입니까?
감각으로 들어오는 정보를 포착하고 처리하고 이해하는 능력일까요.
보고, 맛보고, 냄새 맡고, 만질 수 있다면—그게 현실일까요?
아니면 그저 ‘느끼는 능력’ 자체가 현실일까요?
자, 이제 합성 현실의 시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지금, 여러분 눈에는 무엇이 보이십니까?
[대체 링크] 재생되지 않으면, 여기로 이동.
https://www.youtube.com/watch?v=FRRXmWI7O8E
[안내 — 모방 범죄 주의]
본 작품에는 범죄 수법·수사 절차·법정 장면이 현실적으로 묘사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범죄를 미화하거나 정당화하기 위함이 아니며, 현실에서의 모방을 강력히 금합니다.
작품 속 사건은 허구 또는 각색이며, 어떠한 범죄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저작권 안내]
본 작품 **『너를 품에 안으면』**은 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되는 창작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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