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장 (1~4부 통합) —
— 1부 | 사라지기 쉬운 기록
(When I Hold You in My Arms — EP17-1)
휴대폰 진동이 베개 밑에서 울렸다.
짧고 딱딱한 소리였다. 사람 체온이 없는 소리.
“여보… 전화 좀…”
아네의 목소리는 잠에 젖어 있었는데, 그 안에 짜증이 섞여 있었다.
예전 같으면 걱정이 먼저였을 톤이 아니었다.
선율은 무거운 몸을 겨우 굴려 손을 뻗었다.
휴대폰을 들어 올리는 속도가—느렸다.
나이가 들어서가 아니라, 늘 같은 일상이 몸의 반응을 늦춘 것처럼.
화면을 켜자 알림이 눈을 찔렀다.
새벽 4시 30분. 긴급 미팅. 사이버 수사대.
선율은 낮게 욕처럼 중얼거렸다.
“… 아이씨 또 뭐야.”
신참 때는 달랐다.
긴급 호출이 뜨면 심장이 먼저 뛰었다.
‘날 필요로 하는구나.’
그 필요가 하루를 버티게 했다.
그 착각이 사람을 뜨겁게 만들었다.
잠이 덜 깬 몸도 뛰어가게 했다.
지금은… 손가락이 화면 위를 느리게 미끄러졌다.
알림을 확인하는 동작조차 지쳤다.
아네가 이불을 당기며 낮게 말했다.
“또야, 왜 그러는데…?”
선율이 대답하려다 멈췄다.
대답은 늘 같았다.
“어… 다시 자, 금방 갔다 올게.”
“별일 아니야.”
별일 아닌 적은 없었고, 금방이었던 적도 없었다.
아내는 등을 돌렸다.
처음엔 남편이 없을 때 불안했다.
혼자 가게를 닫고 집에 오면,
문 소리 하나에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경찰 생활하다가 늦게 오면 혹시나 괜찮을까 하고 마음을 졸였다.
눈물로 기도할 때도 있었고, 뜬눈으로 밤을 새운 적도 있었다.
지금은—피곤했다.
새벽에 울리는 전화가 걱정이 아니라 잠을 찢는 소음처럼 들렸다.
점점 혼자서 잠드는 일이 일상이 되어 갔다.
처음엔 그리웠다.
나중엔 화가 났다.
이제는… 무덤덤했다. 감정이 닳아 없어지는 단계까지 와 있었다.
어떤 날에는, 선율이 별 뜻 없이 뱉은 말에도 아네가 예민하게 튀어 오르곤 했다.
“여보, 이걸 이렇게 놔두면 어떡해!”
“당신만 힘든 거 아니잖아!”
“좀 작작 좀 해!”
신혼 3년 차, 피 터지게 쓸데없는 이유로 싸우던 때와는 달랐다.
지금은 ‘미움’이 아니라 ‘피로’가 싸우게 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남은 마지막 체력을 갉아먹는 방식으로.
선율은 대충 옷을 주워 입었다.
샤워도 못 하고, 이도 닦지 않은 채.
‘서에 가서 하면 되지.’
그런 생각으로 나갔다가, 예상 밖의 사건이 터지면
며칠을 노숙자처럼 굴러다니는 날도 있었다.
바지 주머니엔 영수증이 구겨지고,
셔츠엔 커피 자국이 남고, 잠은 의자에서 쪼개졌다.
새벽 4시 5분.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문을 나서는 순간, 아네가 낮게 말했다.
“몸이나 좀 챙겨.”
그 한마디가 더 아팠다.
예전의 “조심해”가 아니라, 지친 사람의 습관적인 배웅 같아서.
차에 타자 공기가 차갑게 폐로 들어왔다.
선율은 차에 연결된 유튜브로 플레이리스트에 담아 둔 노래를 켰다.
자주 듣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어떤 날엔 그 노래가 선율을 버티게 했다.
한 곡 정도는 예전의 자신을 잠깐 돌려놓아 줬다.
젊었던 시절, 아직 몸이 반응하던 시절.
희망이 ‘증거’처럼 존재하던 시절.
하지만 오늘은 멜로디 위로 진동이 올라왔고, 화면엔 알림이 연달아 겹쳤다.
노래는 흐르는데, 마음은 자꾸 다른 데로 끌려갔다.
새벽 4시 30분.
‘긴급 미팅.’
그 단어는 늘 누군가의 집을 깨웠고, 누군가의 관계를 닳게 했다.
경찰서에 도착하자 공기가 달랐다.
새벽의 복도는 조용한데, 이상하게 시끄럽게 느껴졌다.
커피 냄새. 전자기기 발열. 바닥을 스치는 구두 소리.
사이버 수사대 미팅룸 문틈으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선율이 문을 열자, 동료 하나가 손짓했다.
눈 밑이 퀭했고, 손엔 태블릿이 들려 있었다.
“야, 로버트, 이거 좀 봐.”
태블릿 화면이 선율에게 돌아왔다.
사진 한 장.
너무 깔끔한 얼굴.
너무 완벽한 조명.
최윤서의 얼굴이었다.
완벽한 건 늘 의심스럽다.
요즘 범죄는 티가 안 나서 무서운 게 아니라, 티가 안 나게 ‘만들어져서’ 더 무섭다.
그리고 화면 상단에는 문서 제목이 떠 있었다.
대한민국 공조 수사 요청
사이버 사기 / 신원·딥페이크 증거 / 자금 운반책(머니뮬) 추적
긴급: 데이터 보존 요청
선율의 속이 식었다.
“한국?”
동료가 피곤한 숨을 섞어 말했다.
“국제 채널로 들어왔어. 보존부터 빨리 해 달래. 지금 당장.”
미팅룸 안쪽에서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팀장이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자, 주목!”
“좋아. 두 갈래로 간다.”
“첫째, 미국 쪽 서비스들에 보존 요청부터. 최대한 빨리.”
“둘째, 법적 절차 라인도 같이 준비한다.
한국이 법정 증거를 원하면 정식 공조 절차로 들어간다.”
옆자리 동료가 물었다.
“뭐야, 미국 연결고리가 있긴 있었어?”
다른 동료가 키보드를 두드리며 답했다.
“자금 흐름 일부가 미국 계정을 스쳤고,
“딥페이크 유포 계정들도 미국 기반 서비스 흔적이 발견됐어.”
팀장이 선율을 봤다.
“야 로버트, 인테이크는 네가 맡고 보존 요청 초안부터 잡아 놔.”
선율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팀장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펜 끝이 파일 한 장을 찍었다.
“야, 로버트, 그리고 최윤서가 캄보디아에 여러 번 갔다 온 정황이 나왔어.”
“그러니까 그쪽 라인을 더 자세히 알아봐. 촬영, 외주, 현지 접촉자까지.”
선율은 고개를 들었다.
딱 한 번, 숨이 깊어졌다.
“네. 확인하겠습니다.”
선율은 메모를 넘기다가 손을 멈췄다.
사건 태그가 화면 한가운데 박혀 있었다.
‘최윤서 딥페이크 투자 사기’
동료가 고개를 들었다.
“그 사람… 한국에서 꾀 잘 나가던 유명인이었다면서요?”
팀장이 낮게 말했다.
“그래서 더 커지고 있는 것 같다.”
“잘 들어. 사람부터 지킨다.
피해자면 보호하고,
연루라면… 끝까지 입증해서 정리한다.
추측은 금지하고. 증거 수집 위주로 가라.”
그 말이 끝나자, 뒤쪽에서 누군가 아주 작은 소리로 피식 웃었다.
“알아봤더니 이제는 아닌 거 같던데…”
웃음은 짧았는데, 공기가 더 차가워졌다.
유명인이라는 단어가, 여기선 보호막이 아니라 불쏘시개였다.
팀장이 펜으로 화이트보드를 툭 두드렸다.
“집중해.”
“보존이 먼저다. 질문은 나중에 하도록 알았나?”
선율이 대답했다.
“네.”
그날 오후, 경찰서 로비는 평소처럼 사람 냄새가 났다.
서류 냄새, 금속 손잡이의 차가운 냄새, 소독약 냄새.
윤서는 회색 코트를 입고 들어왔다.
마스크를 썼는데도, 시선이 따라붙었다.
윤서는 그 시선을 읽었다.
소문. 의심.
그리고—증거도 없이 결론부터 내려놓은 사람들.
안내를 받아 복도를 지나 면담실 앞에 섰다.
문이 열리고, 선율이 그녀를 맞았다.
“최윤서 씨.”
윤서가 차갑게 말했다.
“오늘이 마지막이었으면 좋겠어요.”
“저는 범죄자가 아니에요.”
선율은 감정을 섞지 않았다.
“그럼 오늘 정리하도록 합시다.”
“대신 질문에 정확히 답해 주세요.”
문이 닫혔다.
면담실 공기는 건조했다.
물컵이 있어도 목은 마른 채였다.
선율은 얇은 파일을 테이블 위에 펼쳐 윤서 쪽으로 밀었다.
출입국 기록 요약표. 날짜. 국가. 입출국 시간.
선율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정했다.
“최윤서 씨. 캄보디아에 다녀온 기록이 여러 번 있습니다.”
“첫 진술에서 왜 ‘캄보디아에 갔다’고 말하지 않았죠?”
윤서가 눈을 들었다.
그 눈빛이 잠깐 반짝였다가 꺼졌다.
“네?… 제가… 숨긴 게 아니에요.”
“그걸 왜 말해야 하는지… 그때는 몰랐어요.”
선율은 한 박자도 주지 않았다.
“몰랐다는 말로 끝낼 수 없습니다.”
“당신의 말 한 줄 때문에 수사 방향이 바뀝니다.”
“당신이 처음부터 캄보디아를 말했었으면,
우리는 유출 경로를 촬영팀·외주·현장
접근자 쪽으로 초동부터 좁혔어요.”
“그걸 못 좁히니까—엉뚱한 계정,
엉뚱한 라인으로 시간과 인력이 빠졌습니다.”
선율은 파일을 한 장 더 넘기며 덧붙였다.
“지금부터는 다 진술로 기록됩니다.”
“정정할 게 있으면, 지금 하셔야 됩니다.”
윤서의 턱이 굳었다.
그녀는 태블릿 화면을 잡아당기듯 가까이했다.
사진 속 윤서. 캄보디아. 그때의 빛.
그리고—원본보다 더 진짜 같은 피부결.
윤서의 숨이 잠깐 끊겼다.
“아... 이거…”
“제가 아는 사진이 아니에요.”
“제가 가진 원본보다 더… 더 리얼해요.”
선율이 곧바로 눌렀다.
“그러니까 더더욱 솔직하셔야 됩니다.”
“캄보디아, 언제, 왜, 누구랑, 어디서. 정확히 뭘 했는지 말하세요.”
윤서가 고개를 숙였다.
숨이 목에 걸렸다. 잠깐, 목소리가 안 나왔다.
“근데 지금은…”
“지금은 그냥… 사라져요.”
“작품 끊기고, 연락 끊기고, 기사 한 번 잘못 나면—협찬부터 먼저 끊겨요.”
“모아 놓은 돈도… 바닥이 보여요. 정말이에요.”
윤서의 눈물이 떨어졌다.
테이블 위에 작은 점이 생겼다.
윤서가 입술을 깨물었다.
말을 꺼내는 게 부끄러운 게 아니라—살아남기 위해 설명하는 게 더 비참해서였다.
“지금은… 계속 사라졌어요.”
윤서는 웃으려 했는데, 웃음이 아니라 마른 숨이 새었다.
손바닥이 테이블 아래에서 바들바들 떨렸다.
“매일 아침에 눈 뜨면 연락이 없고, 달력은 비어 있고…”
“휴대폰이 울리면—일이 아니라, 정리하자는 전화뿐이에요.”
윤서의 눈이 빨개졌다.
“지금은 내가 벌이지도 않은 일 때문에… 고소장까지 받아요.”
“기사요? 기사는커녕…”
“협찬은 끊긴 지 오래예요. 오래됐다고요.”
“사람들은 확인도 안 하고, 그냥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에요.”
윤서는 한숨을 들이마시다, 끝내 울음이 새어 나왔다.
“어제까지 ‘실장님, 선배님’ 했던 사람들과 애들은 연락 끊긴 지 오래고,
제가 먼저 전화를 걸어도… 다들 제 번호를 모른 척해요.”
“바쁜 척, 회의 중인 척… 아니면 그냥 안 받아요.”
윤서가 선율을 똑바로 봤다.
눈물 때문에 시야가 흔들렸는데도, 그녀의 말은 커지면서도 또렷했다.
“그래서 예요…”
“그래서 제가… 캄보디아에 간 거예요”
윤서의 울음이 커졌다.
그녀는 한 번에 쏟아내듯 말했다.
“형사님은 그때 당시에 뭘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한때 나—나름 잘 나가던 여배우였어요.”
그 말이 허세처럼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스스로를 붙잡기 위한 마지막 명찰 같았다.
“매일 바쁜 스케줄에…”
“공항이 집 같고, 차 안에서 밥 먹고, 잠은 대기실에서 자고…”
“사람들이 내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내가 진짜로 뭔가 된 사람 같았어요.”
윤서가 고개를 숙였다.
숨이 목에 걸렸다.
“그런데 지금은 평범하게 살려고 했어요. 진짜예요”
“다시는 미련 없이, 그 바닥에 안 돌아가겠다고… 스스로랑 약속했어요.”
“근데… 옛날 화려했던 최윤서를… 지울 수가 없었어요.”
윤서가 울며 웃었다.
“캄보디아에서… 아직도 누군가는 저를 기억하더라고요.”
“한국 사람이 아니더라도, 단 한 사람만이라도…”
“한 사람이라도 더—날 알아봐 주길 바랬어요.”
윤서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울음이 점점 더 커졌다.
“그래서 간 거였어요…!”
“그게 전부예요!”
선율은 바로 끊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이 위로가 되지도 않았다.
그는 아주 낮게, 현실로 돌려놓는 질문을 던졌다.
“그 촬영. 계약은 누가 보냈습니까?”
“현지 에이전시 이름.”
“연락한 사람 이름.”
“원본 파일은 어디로 갔죠?”
윤서가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해요… 다 기억해요.”
“제가… 제가 다 드릴게요.”
“제발… 제발 저를 범인으로만 만들지 말아 주세요.”
선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딱 한마디만 던졌다.
“그럼… 범인은 따로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는 곧바로 확인했다.
“윤서 씨는 이번 일과는 전혀 무관하다고—그렇게 진술하시는 겁니까?”
선율은 숨을 한 번 고르고 말했다.
“그럼 그 ‘따로 있는 범인’이 있다면… 오늘부터 제가 찾을 것입니다.”
그리고 선율은 시선을 고정한 채, 낮고 또렷하게 덧붙였다.
“지금 하신 진술은 전부 녹음되고 있습니다. 명심하십시오.”
마지막으로 경고를 박았다.
“다만, 지금 하신 진술이 조금이라도 거짓으로 확인되면—
그때는 정식 절차로 전환합니다. 체포영장 신청까지 갈 수 있습니다.”
윤서는 울음을 삼키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숨이 떨렸다.
선율은 기록을 다시 두드렸다.
“그리고 최윤서 씨, 당신 진술이 사실이라면,
당신이 캄보디아에 갔던 건 죄가 아닙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수사는 틀어지고, 범인은 그 틈에서 도망칩니다.”
면담이 끝난 뒤, 선율은 복도 끝의 작은 사무공간으로 돌아왔다.
문을 반쯤 닫고, 팀 공용 채널로 보고를 올렸다.
말이 길어지면 불필요한 감정이 섞인다.
그래서 선율은 현장 언어로 정리했다.
대상자는 피해자일 가능성이 높고, 여행 기록은 사실로 확인됨.
원본 자료 유출이 의심되며—외주 업체 또는 현장 접근자 라인 가능성.
선율은 증거보존요청 템플릿을 열었다. 사건번호를 박았다.
먼저 잡아야 하는 건 범인이 아니라, 사라지기 쉬운 기록이었다.
잠깐—상대방이 읽는 시간만큼의 정적이 흘렀다.
곧바로 답이 왔다.
“좋아. 보존부터 확실히 잠그고, 외부 라인부터 전부 그려놔.”
선율은 화면을 끄지 않은 채, 메모를 한 줄 더 적었다.
— 가짜는 사람을 속이는 게 아니라, 절차를 속인다.
— 그리고 절차가 한 번 틀어지면—누군가는 증명해야 살아남는 사람이 된다.
선율은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오늘 오후는 길어질 거처럼 느꼈다.
하지만 적어도 방향은 잡혔다.
이제부터는,
누가 했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잡아야 했다.
그게 범인을 잡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 2부 | 너 때문이야
(When I Hold You in My Arms — EP17-2)
조서가 끝났을 때는 늦은 오후였다.
조사실 특유의 공기가 남아 있었다.
차갑게 정리된 문장들,
그 문장들 사이를 떠다니는 망설임,
그리고 마지막까지 손끝에 남는 미세한 떨림.
선율은 서류를 정리해 클립으로 고정했다.
녹취 상태를 확인하고,
시간표기를 한 번 더 체크했다.
모든 게 ‘절차대로’ 끝났는데,
이상하게 끝난 느낌이 들지 않았다.
“최윤서 씨. 오늘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윤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은 짧았고,
눈동자는 어딘가로 계속 도망치고 있었다.
그건 거짓말을 하는 사람의 눈이 아니라,
너무 오래 버틴 사람이 가진 눈이었다.
선율은 윤서를 경찰서 밖까지 배웅했다.
문을 여는 순간 공기가 달라졌다.
비가 오기 직전의 습기, 달라붙는 냄새,
멀리서부터 밀려오는 소리.
그리고 몇 초 뒤—
쏴아아—.
하늘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빗방울이 계단 난간을 때리고,
주차장 아스팔트는 순식간에 검게 변했다.
사람들이 급하게 뛰어가는 소리, 차 문이 닫히는 소리,
와이퍼가 켜지는 소리가 한꺼번에 겹쳤다.
윤서는 잠깐 멈춰 서더니 휴대폰을 꺼냈다.
손가락이 택시 앱을 찾는 사이,
선율의 머릿속에 아까 조사실에서 윤서가 던진 말이 스쳤다.
“형사님은 그때 당시에 뭘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그 말은 공격이라기보다 선을 긋는 말 같았다.
‘당신은 내 시간을 모른다’는 식의 차갑고도 정확한 선.
그 선 사이로,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기억이 끼어들었다.
윤서가 톱스타였던 시절.
그때 선율이 가 야후 채팅,
싸이월드 같은 화면에 밤을 빼앗기던 시절.
그때의 인터넷은 지금처럼 똑똑하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은 이미 충분히 빠져 있었다.
선율은 윤서의 얼굴을 봤다.
눈가에 남은 흔적이 비처럼 번질 것 같았다.
이상하게 마음이 흔들렸다.
절차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는 경고가 머릿속에서 울렸는데도,
입이 먼저 움직였다.
“최윤서 씨.”
윤서가 고개를 들었다.
선율은 한 번 숨을 삼켰다.
“제가… 댁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윤서는 잠깐 선율을 바라봤다.
경계, 피로, 그리고 아주 미세한 안도.
그 모든 게 동시에 지나갔다.
“그렇게 해 주시면… 감사합니다.”
비는 더 굵어졌다.
선율은 망설일 틈도 없이 빗속으로 뛰어갔다.
어깨와 목덜미로 빗물이 떨어졌고,
구두 바닥이 젖은 아스팔트에서 미끄러질 뻔했다.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와이퍼를 올리자 유리 위 물이 갈라졌다.
스윽— 착, 스윽— 착
선율은 차를 윤서 앞까지 붙였다.
내려서 문을 열어 주자 윤서는 주저하지 않고 탔다.
믿어서인지, 아니면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어서인지—
그 선택이 너무 빠르고 조용해서 오히려 낯설었다.
차 문이 닫히고, 밖의 빗소리가 한 겹 얇아졌다.
대신 와이퍼 소리가 더 선명해졌다.
고속도로 진입.
몇 분 가지 않아 차들이 서서히 속도를 잃기 시작했다.
비 오는 날의 교통은 늘 같은 표정을 했다.
빨간 브레이크등이 길게 늘어지고,
도로 위 모든 차가 ‘조심’이라는 단어를 뒤늦게 떠올린다.
선율이 앞을 보며 낮게 말했다.
“앞쪽에서 사고가 난 것 같습니다. 오래 걸릴 수도 있겠습니다.”
윤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빗물이 유리 위를 타고 내려가는데,
윤서의 시선도 그 물을 따라 같이 내려가는 것처럼 보였다.
차 안에는 정적이 계속 쌓였다. 너무 오래 쌓이면,
그 정적이 사람을 더 불편하게 만든다.
선율은 원래 차에서 노래를 틀어놓는 편이었다.
혼자 있을 때는 더 그랬다. 오늘은 누군가가 옆에 있었다.
선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괜찮으시면… 노래 틀어도 되겠습니까?”
윤서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선율은 차에 연결된 유튜브로 플레이리스트에 담아 둔 노래를 켰다.
요즘 유행하는 한국 노래, 외국 노래,
지나간 노래들이 섞여서.
노래가 바뀌어도 윤서의 표정은 크게 움직이지 않았다.
차는 더 막혔다. 도로 위에서 차들이 거의 멈춰 서다시피 했다.
비가 내려서인지, 사고 때문인지, 아니면 그 둘이 합쳐진 탓인지—
어쨌든 오늘의 시간은 고속도로 한가운데에서 녹아내리고 있었다.
한참 후 윤서가 마치 별뜻 없는 말처럼 꺼냈다.
“경찰은… 왜 하게 되셨어요?”
선율이 잠깐 룸미러로 윤서를 확인했다.
윤서는 여전히 창밖을 보고 있었다.
선율이 아니라 비를 향해 묻는 것 같았다.
“위험하진 않으세요?… 참 어려운 일을 하시네요.”
그리고 윤서는 덧붙였다.
“그래도… 한국어로 얘기할 수 있는 경찰이 있다는 게… 다행이네요.”
그 한 문장이 선율의 목 뒤를 아주 조금 굳게 만들었다.
이 사건에서 ‘언어’는 다리이자 함정이었다.
누군가를 살리고, 누군가를 속이고,
누군가를 조종하는 데에도 언어가 쓰인다.
선율은 짧게 숨을 내쉬고 말했다.
“아… 그냥 어쩌다 보니까요.
미국 살면서 이런저런 일 겪고…
해보니까 이쪽이 맞는 것 같아서요.”
윤서는 더 묻지 않았다. 고개만 아주 조금 끄덕였다.
노래는 계속 흘렀다.
그리고 그때였다.
선율이 스무 살 무렵 자주 듣던 노래가 재생됐다.
제목이 떠오르는 순간,
선율의 손가락이 반사적으로 볼륨을 줄이려 볼륨 버튼을 찾았다.
그런데 늦었다.
후렴이 이미 시작됐다.
멜로디가 차 안을 채웠고,
선율은 자신도 모르게 아주 낮게 흥얼거렸다.
✨♪… 너를 품에 안으면~… ♪✨
✨♪ You're my lady lady lady... ♪✨
✨♪ 하지만 내 맘도~ ♪✨
그 목소리는 거의 숨이었다. 그런데 윤서는 들었다.
윤서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창밖만 보던 눈이 선율을 봤다.
그 눈빛에는 ‘누구나 들어봤던 아는 노래였다’
그러나 이상의 것이 있었다.
잊어버린 순간이 갑자기 현재로 밀려오는 표정.
자신이 가장 빛나던 때의 무대 조명과
그 조명 뒤에서 무너지는 느낌이 동시에 떠오르는 표정.
윤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시 창밖을 봤다.
하지만 그 짧은 시선 하나로, 차 안의 정적은 모양이 바뀌었다.
‘아무 말도 없음’이 아니라, ‘말이 생길 수도 있음’이 되었다.
윤서의 집 앞.
선율은 비상등을 켜고 차를 세웠다.
빗줄기는 여전히 굵었고,
현관 앞 조명은 비를 더 선명하게 만들었다.
윤서는 문 손잡이에 손을 얹고 잠깐 멈칫했다.
“오늘… 감사합니다.”
선율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오히려 협조해 주셔서 제가 감사드립니다.”
잠깐 망설인 뒤, 선율이 더 낮은 톤으로 덧붙였다.
“그리고… 아까 조사실에서 제가 목소리가 높아진 부분,
사과드립니다. 제가 더 조심했어야 했습니다.”
윤서는 표정이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눈이 한 번 천천히 깜빡였다.
‘괜찮다’인지 ‘모르겠다’인지 선율은 구분하지 못했다.
선율은 다시 업무적인 선을 정확히 그었다.
“수사는 계속 진행될 겁니다.
현시점에서 최윤서 씨를 피의자로 단정할 만한 근거는 없어 보입니다.
다만 추가 확인이 필요하면 연락드릴 수 있습니다.
당분간은 연락이 잘 닿게만 해주시고, 주소나 연락처가 바뀌거나
장기간 출타하실 일이 있으면 미리 알려주세요.
그때 다시 협조 부탁드립니다.”
윤서는 조용히 말했다.
“네. 수고 많으셨습니다. 조심히 가세요.”
선율은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좋은 저녁 보내십시오.
그리고…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기거나
질문이 있으시면 언제든 연락 주십시오.
저나 경찰서로.”
윤서는 문을 열고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문이 닫히고 난 뒤에도 선율은 잠깐 그 자리에 있었다.
와이퍼 소리가 계속 났다.
스윽— 착, 스윽— 착
그 소리가 오늘 하루의 끝을 대신해 주는 것 같았다.
윤서는 신발도 제대로 벗지 못한 채 소파에 몸을 던졌다.
등받이가 등을 받아주는데—그 순간에야 숨이 터져 나왔다.
가벼운 한숨.
그다음은… 웃음도 울음도 아닌, 애매한 숨소리.
“괜찮아.”
윤서가 자기한테 말하듯 중얼거렸다.
“이제 끝났어.”
근데 끝났다는 말이, 이상하게 확신이 아니라 주문처럼 들렸다.
윤서는 벌떡 일어났다. 방으로 향했다.
옷장 앞에 섰다가, 한 번 더 위를 올려다봤다.
옷장 위.
정리된 상자 하나.
먼지가 없었다.
윤서는 이걸 ‘잊어둔’ 적이 없었다.
그저—숨겨둔 것처럼 살았을 뿐.
상자를 꺼내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뚜껑을 여는 순간, 종이 특유의 냄새가 확 올라왔다.
프린터 잉크와 오래된 잡지 코팅지 냄새.
안에는 사진과 스크랩들이 차곡차곡 들어 있었다.
한 장 한 장 넘길수록 윤서의 손끝이 빨라졌다.
그때.
맨 아래, 더 얇은 종이뭉치.
A4 프린트. 모서리가 살짝 구겨져 있고,
위쪽엔 스테이플러 자국이 남아 있었다.
마치 누가 급하게 뽑아서 급하게 모아 둔 것처럼.
윤서는 그중 한 장을 꺼냈다.
[프린트 뉴스컷]
“고윤아, 연말 시상식 3관왕… 여우주연상·인기상·베스트커플상 ‘싹쓸이’”
— “작품성과 화제성 동시에… ‘흥행+평단’ 모두 잡았다”
— “관객 투표 기반 인기상까지… ‘대세’ 재확인”
— “무대 뒤 눈물… 관계자 ‘체력적으로 한계였을 것’”
[프린트 뉴스컷]
“고윤아, 전격 결혼 발표… ‘비공개 진행’”
— “한창 전성기인 상황에서 ‘깜짝 발표’”
— “상대는 재계 ○○그룹 회장 아들”
— “향후 활동은 조율”
윤서는 제목만 보고도 이미 내용을 외웠다.
그런데도 눈이 ‘향후 활동은 조율’ 문장에서 멈췄다.
조율.
사람을 말할 때 쓰는 단어 같지 않았다.
다음 장.
[프린트 뉴스컷]
“고윤아, 득녀… ‘하늘이 내려준 선물’”
— “산모와 아이 모두 건강”
— “당분간 육아에 집중”
— “가족의 뜻에 따라 근황 공개는…”
윤서는 마지막 문장을 소리 없이 다시 읽었다.
“가족의 뜻”
윤서는 그 말이 싫었다.
그 단어는 축하 기사 속에서 너무 자연스럽게 박혀 있었고,
그래서 더 소름이 돋았다.
누군가의 삶이 ‘뜻’ 하나로 정리되는 느낌.
그리고 그 아래.
기사 끝에 붙어 있는 캡처 이미지—댓글 모음.
“딸이면 더 좋지. 완벽한 그림이네.”
“이제 활동 끝이네. 재벌 가면 조용히 살아야지.”
“애 얼굴 공개는 언제?”
“진짜 ‘가문’ 들어갔다…”
윤서가 숨을 들이마셨다.
숨이 목에서 걸렸다.
그때, 상자 속에서 사진 한 장이 미끄러져 나왔다.
윤서의 손이 멈췄다.
‘그날…’ 모든 게 어긋나기 시작했던 날.
윤서의 눈이 빨개졌다.
눈물이 ‘슬퍼서’가 아니라, 억울해서 차오르는 방식이었다.
윤서는 프린트된 뉴스컷을 다시 집었다.
“득녀” 기사 아래, 딱 한 문장만 형광펜으로 칠해져 있었다.
당분간 육아에 집중.
윤서는 그 형광펜 칠 위를 손톱으로 몇 번 긁었다.
사각— 사각—
마치 글자가 지워지기라도 하길 바라는 것처럼.
“치…”
윤서가 숨을 짧게 뱉었다.
“뭐?”
“…당분간?”
낮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당분간이… 끝이 나긴 해?”
잠깐의 침묵.
윤서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
“끝은… 내가 만들어주면 되지.”
손이 떨렸다.
하지만 윤서는 멈추지 않았다.
상자 바닥에서 또 다른 종이가 나왔다.
이번엔 기사 스크랩이 아니라—캡처를 프린트한 화면이었다.
아기 사진.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돼 있었다.
그런데 그 모자이크가 오히려 더 잔인했다.
사람을 지우는 게 아니라, 대상처럼 만들어 놓는 느낌이었다.
모자이크 아래에 붙은 설명문.
“출산 후 첫 공식 근황”
“딸 고은정과 함께한 일상 공개”
윤서는 그 이름을 한 번 더 눈으로 짚었다.
고은정.
잠깐의 침묵.
“딸이…”
숨이 끊어지듯 흘러나왔다.
시선이 모자이크 위에 고정됐다.
아주 미세하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래. 이거야…”
낮게 중얼거렸다.
“이제 약점이 생겼네.”
윤서는 종이를 구겨 쥐었다.
쥐는 힘이 점점 세졌다. 손끝이 하얗게 질렸다.
그리고 그 모든 종이 위에서, 윤서는 마지막으로 한 장을 꺼냈다.
그건 기사도 사진도 아니었다.
짧은 메모.
가늘고 정갈한 글씨로 적혀 있었다.
“윤아는 늘 ‘미래’를 말했어.”
“근데 그 미래는…”
“나한테는 없었어.”
윤서가 메모를 읽는 동안, 눈물은 결국 떨어졌다.
딱 한 방울.
그 한 방울이 종이 위에 퍼지며 잉크를 먹었다.
윤서는 그 자국을 한참 바라봤다.
그리고 아주 낮게, 거의 이로 갈아내는 목소리로 말했다.
“… 다… 다…”
말이 끊겼다가 다시 이어졌다.
“… 너 때문이야.”
‘너’가 누구인지, 윤서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그게 사람인지, 가족인지, 시스템인지, 혹은… 그날의 선택인지.
그냥—확실한 건 하나였다.
윤서는 이걸 끝낼 생각이 없었다.
그때, 윤서의 머릿속에서—
오래 멈춰 있던 장면이 다시 재생됐다.
박수.
플래시.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함성.
마치 세상이 다른 화면으로 넘어가자는 신호처럼 서서히 들려왔다.
— 3부 | 시상식
(When I Hold You in My Arms — EP17-3)
레드카펫 끝에 검은 밴이 멈춰 섰다.
문이 열리자 플래시가 먼저 터졌다.
빛이 사람보다 빨랐다.
윤아의 얼굴이 드러나기 전에 이미 수백 개의 렌즈가
그녀의 존재를 확정해 버렸다.
고윤아! 고윤아! 고윤아!
남녀 관중들의 환호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한 사람의 이름이 군중 속에서 한 덩어리로 뭉쳐져 울렸다.
외침은 응원처럼 들리지만,
동시에 사냥개들이 먹잇감을 발견했을 때 나는 소리 같기도 했다.
플래시가 터지기 시작하자, 펜스 뒤에서 먼저 웅성거림이 올라왔다.
“온다 온다 온다”
“야, 맞아? 맞지?”
“와 고윤아다”
순간 한쪽에서 목이 터졌다.
“언니!!! 여기요!!!”
그 소리를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겹쳤다.
“언니 한 번만 봐주세요!”
“언니 손 한 번만!!”
“언니!!!”
“한 번만!”
“언니, 사랑해요!”
“가리지 마 가리지 마!”
“야, 카메라 위로 들어!”
“와 미쳤다 실물…”
“잠깐잠깐 나 안 찍혀!”
(기자들)
“윤아 씨 이쪽이요!”
“여기요 여기!”
고윤아가 고개를 들자, 비명 비슷한 소리가 동시에 터졌다.
“꺄아아— 언니!!!”
“방금 봤어? 나 봤어!”
“웃었다 웃었어!”
“찍혔어?? 찍혔어??”
“나 흔들렸다 망했어 다시 와줘요!!”
플래시가 연속으로 번쩍였다.
소리는 더 이상 문장이 아니고 파편처럼 튀었다.
현장 스태프의 무전이 귀를 스쳤다.
“포토월 30초 전. 윤아 팀, 동선 그대로.”
“왼쪽 라인 경호 한 명 더.”
“플래시 구역 정리. 펜스 밀림 주의.”
기자들이 목이 쉬도록 외쳤다.
“윤아 씨! 여기 한 번만요!”
“윤아 씨, 정면 한 컷만 부탁드립니다!”
“오른쪽도 한 번만 봐주세요!”
“잠깐만요— 손 한 번만요, 손!”
“드레스 어디 거예요? 브랜드만 짧게요!”
“립 제품 뭐예요? 브랜드만요!”
플래시가 연속으로 터졌다.
누군가 “조금만 비켜요!”라고 소리쳤고,
또 다른 목소리가 그 위를 덮었다.
“윤아 씨! 마지막 한 컷만요!”
윤아는 멈추지도, 급해지지도 않았다.
사람들의 기대를 정확히 맞춰주는 속도.
카메라가 좋아하는 박자. 포토월 앞에서 어깨를 반 박자 돌리고,
손은 너무 크게 흔들지 않는다. 표정은 늘 그 비율로 고정돼 있었다.
밝음은 70. 피곤함은 0.
옆에서 매니저가 아주 낮게 말했다.
“누나, 질문 길게 받지 마세요.
오늘 시상식이라 기사가 바로 떠요. 한 줄만 삐끗해도 내일 촬영까지 밀릴 수 있어요.”
윤아는 미소를 유지한 채, 가장 안전한 문장을 꺼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후보에 오른 것만으로도 영광이에요.”
그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다만 절반만 진실한 문장이었다.
윤아는 늘 그렇게 말했다.
덜 다치고, 덜 터지고, 덜 남는 말.
로비로 들어서자 공기가 달라졌다.
레드카펫의 바람 대신 실내의 냉기가 들어왔다.
조명은 더 정교했고, 사람들의 시선은 더 날카로웠다.
여기선 팬보다 업계 사람들이 더 많이 웃는다. 웃는 이유가 다르다.
포토라인 한쪽에서 인터뷰를 받는 여배우가 보였다.
최윤서.
세월로 따지면
사람들은 그녀를 “중년”이라고 불렀지만,
아직 중년이라 부르기엔 이른 얼굴이었다.
최윤서 앞에서 그 단어는 힘을 잃었다.
왕년엔 드라마, 영화, 광고—
그녀의 이름 하나면 캐스팅이 정리됐다.
제작사는 그녀의 이름으로 투자표를 끊었고,
브랜드는 그녀의 얼굴로 시장을 잡았다.
“끝판왕”이라는 말이 붙어도 아무도 반박하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진행자가 웃으며 말했다.
“최윤서 씨, 오랜만입니다. 오늘도 정말… 변함이 없으세요.”
최윤서는 웃었다. 예쁘게.
그런데 그 웃음은 친절이라기보다 허락처럼 보였다.
그녀는 인터뷰를 받으면서도,
틈만 나면 윤아 쪽으로 시선을 흘렸다.
티 나지 않게. 하지만 한 번도 놓치지 않겠다는 것처럼.
윤아는 그 시선을 느꼈다.
그리고 모른 척했다.
모르는 척이 가장 안전했기 때문이다.
시상식장 안, 좌석 배치부터 ‘그림’이었다.
초대권 색깔이 달랐고, 팔찌가 달랐고,
스태프들은 사람을 “자리”로 분류했다.
앞줄은 스폰서, 중앙은 후보,
통로 쪽은 카메라가 좋아하는 얼굴들.
여기선 웃음도 동선도 전부 방송용이다.
객석 위로 거대한 카메라 크레인이 천천히 움직였다.
렌즈가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의 얼굴이 동시에 “준비된 얼굴”로 바뀌었다.
몇몇은 손끝으로 넥타이를 고쳐 잡고,
몇몇은 귀 뒤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그 작은 동작들이—이 시대의 레드카펫이었다.
무대 뒤 스크린에는 스폰서 로고가 번갈아 떴다.
통신사 광고, 폴더폰 광고, 디지털카메라 광고.
“문자”와 “인터넷”이라는 단어가 아직 새롭던 시절,
사람들은 카메라 앞에서 더 조심스럽게 웃었다.
사진 한 장이 포털 첫 화면으로 떠오를 수 있다는 걸,
이제 막 배운 시대였다.
화려한 개막 무대가 시작됐다.
대형 LED가 열리고, 오케스트라 소리 위로 MC의 멘트가 얹혔다.
그 사이—앞줄 한 배우의 얼굴에 오래된 세월이 앉아 있었다.
주름이 아니라 역할이 남아 있는 얼굴.
젊을 땐 눈물 한 방울로 장면을 끝내던 사람이,
이제는 숨 한 번으로 장면의 결을 바꾸는 사람.
그 배우는 개막 멘트에 맞춰 웃고 있었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카메라가 비출 때마다 입꼬리는 올라갔고,
카메라가 지나가면 입꼬리는 정확히 원위치로 돌아갔다.
그 사이에 남는 건 딱 하나였다.
‘이번이 아니면, 내 이름은 그냥 지나간다.’
옆자리의 중견 배우는 손끝으로 정장을 한 번 쓸었다.
손에 땀이 차면 카메라가 티를 낸다.
그는 박수를 치면서도 속으로 셈했다.
올해 내 작품, 올해 내 평, 올해 내 운.
그리고 뒤쪽엔 신인 배우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자기 얼굴을 카메라가
길게 잡아주지 않는다는 걸 안다.
메인 샷은 앞줄 후보, 톱배우,
스폰서 테이블이 먼저다.
그래도 신인들은 자세를 안 풀었다.
등받이에 기대지도 않고,
다리 꼬는 타이밍도 참았다.
손은 무릎 위에 두고,
박수는 너무 크게 치지 않게—너무 작게 치지도 않게.
카메라가 객석을 훑다가 자기 줄을 스치면,
그때 딱 걸리는 얼굴이 중요하니까.
한 컷만 잡혀도 다음 날 인터넷 기사 사진이 바뀌고,
포털 첫 화면 썸네일에 얼굴이 떠서, “누구냐”가 생긴다.
신인들은 상을 기대하는 게 아니라,
그 한 컷을 기대하며 웃고 있었다.
무대 위 조명이 바뀌고, 사회자가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올해, 관객과 평단을 동시에 사로잡은 연기…
그리고 우리가 모두 인정할 수밖에 없는 존재감.
여우주연상—후보를 소개합니다!”
후보 클립이 스크린에 흘렀다.
누군가의 울음, 누군가의 웃음, 누군가의 침묵.
작품들이 지나가고,
마지막에 윤아의 얼굴이 화면을 채우는 순간—
객석 여기저기서 아주 작은 탄성이 새어 나왔다.
놀람이라기보다, ‘그럴 줄 알았다’는 탄성.
윤아는 웃었다.
‘내 얼굴을 내가 보는’ 이상한 느낌.
너무 완벽해서 가끔 자기 같지 않은 얼굴.
“수상자는—”
정적이 한 번 길게 늘어졌다.
무대 뒤쪽에서 스태프 무전이 겹쳐 들렸다.
“수상자 카드 확인. 트로피 담당 대기. 동선 준비.”
숨이 한꺼번에 멎었다.
“고윤아 씨입니다!”
순간 객석 전체가 터졌다.
박수, 환호, 의자 움직이는 소리,
누군가의 “와!” 하는 비명.
윤아는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는 속도마저 연습된 것처럼.
옆자리 동료 배우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축하해요! 진짜 대박이에요…”
윤아가 웃으며 말했다.
“감사해요… 너무 믿기지 않네요.”
그 말이 입에서 나오는 동안, 윤아는 한 가지를 봤다.
'최윤서.'
박수도 치지 않았다.
입꼬리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그리고—무표정으로 객석 사이를 빠져나갔다.
계획이라도 한 것처럼.
윤아가 무대 위로 올라가는 그 순간에 맞춰서.
윤아의 발이 한 계단 올라갈 때마다 객석의 환호는 더 커졌다.
하지만 윤아의 머릿속엔 이상하게 그 장면만 남았다.
박수 없는 사람.
웃지 않는 사람.
사라지는 사람.
윤아는 마이크를 잡았다.
“안녕하세요… 고윤아입니다.”
박수와 환호가 터졌다.
윤아는 가장 안전한 표정을 꺼내고, 가장 안전한 목소리를 냈다.
“이 상이… 너무 무겁게 느껴져요.
제게 과분한 사랑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윤아는 웃었다. 완벽하게.
그러나 그 웃음의 아주 깊은 아래에—작은 균열이 생겼다.
무대 아래 어딘가로 사라진 최윤서의 뒷모습이,
자꾸 떠올랐기 때문이다.
시상식장 밖. 백스테이지 대기실.
윤서는 문을 닫고, 문고리를 두 번 잠갔다.
찰칵. 찰칵.
유리컵에 물을 따랐다. 손은 안 떨렸다.
속은 무너졌는데, 몸은 너무 익숙했다.
TV에선 고윤아가 트로피를 들고 웃고 있었다.
사람들이 믿고 싶은 얼굴.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최윤서의 목구멍 어딘가가 긁혔다.
화가 나서가 아니라—밀려난다는 감각 때문에.
폴더폰이 울렸다. 진동이 짧고 무겁게 울렸다.
광고 에이전시 쪽 번호였다. 상대는 최대한 공손했고, 그래서 더 잔인했다.
“실장님… 글로벌 캠페인 건 말입니다.”
윤서가 물었다.
“결정 났어?”
상대가 답했다.
“…네. 본사에서 방향을 바꿨습니다.”
윤서가 다시 물었다.
“… 누구로.”
잠깐의 침묵.
상대가 말했다.
“고윤아 쪽으로 최종 확정됐습니다.”
최윤서는 ‘왜’를 묻지 않았다. 왜는 지는 사람이 묻는 말이라서.
대신 하나 더 확인했다.
“그럼 드라마 쪽은.”
상대가 답했다.
“… 그쪽도요. 제작사에서 ‘새로운 얼굴’을 원한다고….”
새로운 얼굴.
그 말은 칭찬이 아니라, 퇴장 안내처럼 들렸다.
통화를 끊고도 폰을 내려놓지 못했다. 손에 붙은 것처럼.
그리고 문득—정말 하찮은 게 목구멍을 더 세게 긁었다.
이름.
윤아.
윤서.
하필, 같은 ‘윤’.
최윤서는 TV 화면을 노려보다가, 입술 사이로 짧게 뱉었다.
“재수 없게….”
이름까지 겹쳐서 밀어낸다는 느낌.
세상이 일부러 자기 이름의 한 글자까지
빼앗아가서 새 얼굴에 붙여준 것 같은.
그녀는 유리컵을 들었다.
그리고—손에서 미끄러졌다.
쨍—!
유리 조각이 바닥에서 플래시처럼 반짝였다.
윤서는 거울을 봤다. 얼굴은 그대로였는데, 얼굴이 낯설었다.
변한 건 얼굴이 아니라, 세상이 얼굴을 쓰는 방식이었다.
툭. 툭.
윤서는 손가락 마디로 거울을 두 번 두드렸다.
세 번째엔 힘이 들어갔다.
칙—.
거울에 금이 갔다.
최윤서는 그 금을 보며 아주 조용히 말했다.
“그럼 내가 먼저… 내려가 주면 되겠네.”
그 말이 끝나자, 폴더폰이 또 울렸다. 이번엔 기자였다.
기자가 말했다.
“실장님, 인터넷에 글 올라왔어요. 아까…
박수 안 치고 나가신 장면….”
최윤서는 대답 대신 전화를 끊었다.
TV 화면에 자막이 흘렀다.
‘박수 안 친 선배 논란…’
최윤서의 입술이 아주 얇게 말렸다.
사람들은 박수 소리로 사람을 죽였다.
그날 이후로 최윤서는 점점 멀어졌다.
공식 멘트는 늘 같은 문장으로 복사돼 돌아다녔다.
“건강상의 이유로 당분간 활동을 중단합니다.”
그리고 일주일 뒤, 최윤서 차 안에서 폴더폰이 울렸다.
최윤서는 화면을 보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실장님.”
윤서는 곧장 말했다.
“윤아 쪽, 뭐 잡히는 거 있어?”
기자가 바로 받았다.
“오늘도 완벽하게 잠가 놨어요. 동선, 멘트, 스태프 라인까지요.”
윤서가 짧게 말했다.
“그래서 내가 너를 쓰는 거야.”
기자가 숨을 삼켰다.
“원하시는 건… 꼬리죠.”
윤서가 말했다.
“말 말고. 한 번에 엮을 그림.”
“저년이 나 만나기 전, 뭘 하고 살았는지 전부 캐. 어디서 누구랑 놀았는지도.”
“분명 내가 놓친 구멍이 있어.”
잠깐, 공기가 더 차가워졌다.
“증거.”
기자가 낮게 웃었다.
“그런데 실장님 그림이 있어야 움직이죠.”
윤서가 조건을 던졌다.
“돈은 얼마든 줄게. 특종도 줄게.”
기자가 바로 답했다.
“그럼 일주일 안에 하나 물겠습니다.
윤아가 실수 안 하면—실수처럼 보이는 ‘상황’부터 찾죠.”
윤서의 목소리가 더 차가워졌다.
“선은 넘지 마.”
기자가 말했다.
“안 넘습니다. 아시잖아요. 저는 선 위에서만 놀아요.”
윤서가 다시 한번 마지막으로 못을 박았다.
“내가 저년을 무명 전 때부터 키워냈어.
그러니까 끌어내릴 연결고리도 어딘가에 있어.
넌 그걸 반드시 찾아내.”
기자가 짧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실장님.”
윤서가 끊었다.
차 안에 잠깐 정적이 내려앉았다.
윤서는 창밖을 보지 않았다.
대신 룸미러에 비친 자기 눈을 오래 봤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내가 만들면 되지.”
— 4부 | 미끼
(When I Hold You in My Arms — EP17-4)
일주일 전 행사가 끝났을 때,
차량 문이 닫히는 순간 윤아의 웃음은 즉시 꺼졌다.
차 안은 방음이 좋아서 바깥 환호가 물속처럼 멀었다.
매니저가 폴더폰을 접었다 폈다 하며 말을 골랐다.
“누나… 인터넷에 또 올라왔어요.”
윤아가 시선을 주자,
매니저는 다음 카페 화면을 인쇄해 온 종이를 건넸다.
종이엔 제목과 닉네임이 크게 찍혀 있었다.
[백스테이지노트]
“방금 표정, 아주 잘 버텼어요.”
윤아는 트로피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금속 표면을 한 번 쓸었다. 차가웠다.
매니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나… 난 저 윤서 선배 계속 신경이 쓰여요?”
윤아는 창밖을 보며 말했다.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신경 쓸 필요 없어.”
매니저가 윤아를 보며 말했다.
“그럼 누나가 직접 손 쓰는 건—”
윤아가 말을 끊었다. 목소리는 낮았고, 단정했다.
“굳이 내가 손댈 필요 없어.”
잠깐의 침묵.
“정리는 세월이 해. 난 문만 잠그면 되는 거야.”
매니저는 대답을 못 했다.
다음 날 새벽.
윤아는 알람 전에 눈을 떴다.
문자(SMS) 알림이 쌓여 있었다.
기사 스크랩, 촬영장 집합 시간, 스폰서 미팅 변경.
그리고 마지막으로—매니저가 보내온 한 줄.
“누나, PC방에서 확인했는데… 그 카페 글 또 올라왔어요.”
윤아는 스케줄 가방을 끌고,
현관을 나가기 전 집 컴퓨터 앞에 잠깐 앉았다.
부팅 소리가 길었다. 모뎀 소리가 방 안을 긁고 지나갔다.
연결이 뜨자마자, 다음 카페 창이 열렸다.
[백스테이지노트]
“오늘 첫 이동… 생각보다 빠르겠네요.”
윤아 스케줄은 공개가 아니다. 공개되는 순간 사고가 난다.
그런데 저건 “맞추는” 게 아니라 아는 말투였다.
광고 촬영장.
화이트 세트, 바람 머신, 조명.
“청순”이라는 단어가 공간 전체에 붙어 있었다.
감독이 모니터를 보며 말했다.
“윤아 씨, 눈빛은 첫사랑이에요.
보고 싶은데 티 내면 안 되는 첫사랑 쪽으로 가요.”
컷!
윤아가 물을 한 모금 마시는 사이,
스태프들이 방금 컷을 두고 던진 말들이 공기 속에 남아 있었다.
그때 매니저가 쪽지처럼 종이를 하나 내밀었다.
출력물이었다. 카페 글 캡처.
[백스테이지노트]
“첫사랑 눈빛, 잘하네요.”
윤아는 숨이 얕아졌다.
그리고 아주 낮게 말했다.
“이 자식… 지금 여기 있어.”
매니저가 윤아의 얼굴을 한 번 보고,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짧았다.
“누구요.”
윤아는 시선만 아주 작게 꺾었다.
그걸로 충분했다.
매니저가 바로 경호팀장 쪽으로 붙었다.
목소리는 낮고 빠르게 떨어졌다.
“지금. 출입 라인을 다시 잠가요. 외부인이 섞였을 가능성이 있어요.”
경호팀장이 무전기를 올렸다.
“출입 리스트 재확인.”
“스태프 패스 전원 체크.”
“외부인 통제. 동선 쪽부터 막아.”
근데 윤아는 그 소리가 오히려 더 신경이 쓰였다.
통제를 강화할수록, 누군가 이미 ‘안’에 있다는
느낌이 더 선명해졌다고 느꼈다.
그리고 라디오 스튜디오.
ON AIR 사인이 켜졌다. 진행자는 대본을 들고 웃었다.
“지금 스튜디오에 특별한 분이 나와 계십니다.
제23회 청아영화대상 여우주연상 수상자, 배우 고윤아 씨입니다.
윤아 씨, 인사 부탁드릴게요.”
윤아는 방송용 미소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고윤아입니다.”
진행자가 대본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어제 제23회 청아영화대상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으셨죠.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윤아는 고개를 숙이며 미소를 유지했다.
“감사합니다.”
진행자가 톤을 조금 낮췄다. 질문이 ‘진짜’로 넘어오는 순간이었다.
“수상 소감이 화제였어요.
‘흔들리지 않게’—그 말, 어떤 마음이었어요?”
윤아는 숨을 한 번 들이마셨다.
그리고 웃었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밖에서는 그냥 센스로 들릴 정도로.
“오늘 큐시트에… 제 대답도 써 있는 거 아니죠?”
진행자가 빵 웃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오늘은 진짜로 궁금해서요.”
스튜디오가 함께 웃었고, 분위기는 가볍게 풀렸다.
윤아는 그 웃음 사이로, 한 번 더 숨을 고르고 말했다.
“그때는… 흔들리면 안 되는 날이었거든요.”
광고 음악이 깔리고 마이크가 꺼진 순간—매니저가 조용히 속삭였다.
“누나. 카페에 글 올라왔어. 지금.”
윤아는 물었다.
“뭐라고.”
매니저가 아주 짧게 말했다.
“방금 멘트… 대본이 아니었는데,라고.”
윤아는 웃지 않았다.
대신 아주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매니저가 낮게 물었다.
“…그럼요?”
윤아는 창밖을 한 번 보고, 말끝을 짧게 잘랐다.
“응. 이제 라인 봐.”
차 안. 윤아는 창밖을 보며 말했다.
무심한 톤이었는데, 그게 더 단단했다.
“겉으로는 조용히 가. 안에서는 확실하게 잡는 거야.”
윤아가 매니저를 보며 말했다.
“너, 합성사진으로 몇 장 뽑아 봐.”
매니저가 입술을 깨물었다.
“누나, 요즘 합성사진… 걸리면 바로 기사 터져요.”
“그러니까 밖으로는 안전하게 해.”
윤아는 단호했다.
“대놓고 내 얼굴 넣는 건 하지 마. 실루엣까지만 넣는 것으로 하고.”
매니저가 다시 확인하듯 물었다.
“실루엣만으로도 요?
누나, 요즘은 원본 파일까지 뜯겨요. 걸리면… 끝인데.”
윤아가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그래서 더 정확하게 만들라는 거야.”
“누나, 합성은 티 나면—”
“그러니까 티 안 나게 하라고.” 윤아가 잘랐다.
윤아는 말투를 낮추고, 지시를 ‘작업 지시’처럼 쪼갰다.
“얼굴은 비워 놓고.
대신 사람들이 ‘고윤아 같다’고 믿을 단서는 남겨 놔.”
매니저가 숨을 삼켰다.
“단서요?”
“그래 단서는 남겨. 손이랑 손목. 액세서리…
가방끈이랑 각도. 이 정도면 알아듣지?”
윤아는 창밖을 보며 덧붙였다.
“역광으로.
간판 불빛이 얼굴 쪽으로 안 오게.
사진을 보는 사람이 ‘확인’하려고 확대하게.”
“배경은 어디로요?”
“사람들이 윤아가 ‘들렀다’고 믿을 만한 분위기.
네온 번진 바닥, 간판 글씨는 반만.
시간대도 애매하게. 밤인지 새벽인지 헷갈리게.”
매니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포토샵으로 새로 만들어서 올리면—”
윤아가 바로 잘랐다.
“새로 만들지 마.”
“그럼요?”
윤아가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겹쳐.”
매니저가 한 박자 늦게 되물었다.
“… 겹치라고요?”
“응. 있는 사진 써.”
윤아가 손가락으로 허공에 프레임을 그리듯 짚었다.
“내 얼굴 없는 비슷한 구도 있잖아. 거기에 단서만 얹어.
다시 말하지만 손목이랑 액세서리, 가방끈… 그런 거.”
윤아는 한 박자 쉬었다. 말투는 차분했는데, 그게 더 단정했다.
“그리고… 파일은 세 개로 나눠.”
매니저가 바로 되물었다.
“세 개요?”
윤아가 손가락으로 공중에 점을 세 번 찍었다.
“겉으로는 비슷하게 보이게. 근데 한 군데씩만 달라.”
“어디를요?”
“티 안 나게.” 윤아가 짧게 끊었다.
“간판 글자 하나. 소품 위치. 그림자 각도… 그런 거.”
매니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했다는 표시였다.
“그다음은요?”
윤아가 이어 말했다.
“각각 다른 라인으로만 흘려.”
매니저가 펜을 들었다.
“어느 라인이요?”
“A는 스태프 쪽. B는 광고 쪽. C는 방송국 출입 쪽.”
매니저가 잠깐 멈췄다.
“왜 그렇게 나눠요?”
윤아가 짧게 말했다.
“새는 데가 어디인지 보려고.”
매니저가 다시 확인하듯 물었다.
“세 장 다 비슷한데… 한 장만 밖으로 돌면?”
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라인이야.”
“예를 들어 C가 밖으로 나오면—”
“방송국.”
윤아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덧붙였다.
“진짜로 믿게 만들 필요 없어. 확인하려고 움직인 쪽만 나오면 돼.”
매니저가 작게 숨을 내쉬었다.
“… 미끼네요.”
윤아가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아 미끼.”
어딘가의 야외처럼 보이는 조명.
간판 불빛. 바닥에 번진 네온.
누가 봐도 “윤아가 잠깐 들른 느낌”인데—결정적으로 얼굴이 없다.
모자, 목도리, 역광.
기사화는 안 되는데, 사람들은 믿는 선.
매니저가 물었다.
“이걸로 물 까요?”
윤아가 고개를 저었다.
“이건 본체가 ‘확인’하게 만드는 떡밥이야.
잡는 건… 속에서.”
윤아는 라인을 쪼갰다.
같은 사진이 아닌, 서로 다른 파일을—
서로 다른 사람에게 흘렸다.
파일명도 다르게 뿌려봐.
press_ya_A.jpg
press_ya_B.jpg
press_ya_C.jpg
겉으론 비슷한데, 문장 한 단어와 소품 위치가 다르다.
누가 새면—어느 라인에서 새는지 바로 나온다.
윤아가 말했다.
“진짜로 믿게 만들 필요 없어.
우선 누가 새는지만 나오면 돼.”
다음 날 밤.
매니저가 PC방에서 카페 글을 출력해 왔다.
종이 가장자리에 커피 얼룩이 묻어 있었다.
[백스테이지노트]
“방금 그거… 사진까지 돌렸네.”
매니저가 캡처를 가리켰다.
“… 누나. 이 캡처는 C 버전이에요.
C에만 있는 소품이 찍혔어.”
윤아는 딱 한마디만 했다.
“흥, 물었네.”
“그럼 이제—”
윤아는 “잡자”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다.
그건 너무 시끄러운 단어라서.
“정리해.”
윤아는 폭로하지 않았다.
터뜨리면 윤아도 튄다. 윤아는 튀지 않는다. 윤아는 지운다.
그날로,
출입 권한이 정리되고
방송국 공유 컴퓨터 접근이 정리되고
현장 명단이 정리되고
“내부 사정”이란 말로 사람이 하나 빠진다
공지 문장은 늘 짧다.
“프로그램 내부 사정으로, 금주부터 인력 구성이 일부 조정됩니다.”
이름은 없다.
이름이 나오면 소리가 난다.
밤 11시 46분.
매니저가 말했다.
“누나. 끝났어. 그 사람… 내일부터 현장 못 들어와. 출입도 끊겼고.”
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리고—집 컴퓨터 화면, 다음 카페 새 글 알림이 한 줄 더 떠 있었다.
[백스테이지노트]
“조용히 처리했네. 역시...”
매니저의 얼굴이 굳었다.
“… 누나, 아직 끝난 거 아니죠?”
윤아는 화면을 오래 보지 않았다. 오래 보면 흔들린다.
윤아는 그냥 창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서울의 불빛이 유리창에 붙어 있었다.
불빛이 많을수록, 도시의 어둠은 더 단단해 보였다.
윤아가 말했다.
“응. 아직은 끝난 게 아니야.”
매니저가 숨을 삼켰다.
“그럼…”
윤아는 아주 담담하게 말했다.
“오늘은 협력자 하나만 빠진 거야.”
“근데—본체는 남아.”
잠깐의 침묵.
윤아가 덧붙였다. 마치 스스로에게 선을 긋듯.
“그래도… 오늘은 이것으로 끝.”
윤아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소리 없이,
웃으면서—
입꼬리만, 아주 조금.
협력자 하나를 묻고—
아주 작은 정리가 끝났다.
“윤서...
이제 남은 건 너 하나야.”
—다음: 18장-1부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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