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장 (1~4부 통합) —
— 1부 | 반가운 목소리
(When I Hold You in My Arms — EP19-1)
다음 날 이른 아침에 윤서는 노트북 화면을 한 번 더 확인했다.
동현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며칠 전, 윤서가 먼저 메시지를 던져놓고
기다렸던 그 이름.
대화창 옆에는 작은 숫자가 떠 있었고, ‘읽지 않음’ 표시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누나… 정말 내가 알고 있던 최윤서 누나야?”
“내 번호 917-XXX-X711. 언제든 전화해. 너무 반가워.”
윤서는 입꼬리를 아주 조금 올렸다.
지금까지는—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
그녀는 시간을 끌지 않았다.
전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두 번 울리고,
낯익으면서도 낯선 목소리가 급하게 받았다.
[동현] “누나…? 진짜 누나야?”
[윤서] “그래. 동현아, 나야.”
짧은 침묵.
그 침묵이, 몇 년을 한 번에 꺼내는 느낌이었다.
[동현] “와… 나 지금 손 떨려. 누나…”
“어디야? 누나 지금 어디 있어?”
[윤서] “나 지금 텍사스에 있어.”
[동현] “뭐? 텍사스…?”
[동현] “누나, 거기 왜 있어? 거기서 뭐 하는데…?”
[동현] “와… 누나 진짜 반갑다.”
윤서는 대답을 급하게 하지 않았다.
동현은 그 침묵을 못 참고 먼저 말을 이어갔다.
[동현] “아무튼, 나… 한국에서 계속 버티다가.”
[동현] “누나 따라 캘리포니아에 가고 싶었는데 못 갔잖아.
그때 내가 뭘 할 수가 있었겠어.”
윤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동현은 그 침묵을 알아서 이어갔다.
[동현] “나 처음에는 연예계 쪽에 그대로 있었어. 매니저로.”
[동현] “그때 누나도 들어서 알지?”
[동현] “나—나름 잘 나가던 남자 배우 뒤치다꺼리도 했었어.”
[동현] “처음엔 진짜… 괜찮았잖아.”
[동현] “누나랑 떨어진 건 아쉬웠지만…”
[동현] “근데 나도 내 살길은 찾아야 했거든.”
[동현] “내 꿈이… 진짜로 이뤄질 것 같았고…”
[동현] “다시 새롭게 시작되는 대기실. 방송국. 행사. 스케줄표.”
[동현] “내가 누굴 스케줄 잡아주고, 동선까지 챙긴다는 느낌… 그쪽에 이상하게 취해 있었어.”
[동현] “그땐—오래 같이 갈 줄 알았지.”
[윤서] “그러다.”
[동현] “그러다… 그 인간 나락으로 떨어져 나갔잖아.”
[동현] “누나도 알잖아. 여기선 한 번 터지면—끝인 거.”
[동현] “어린 여자랑 스캔들 터졌어. 처음엔 ‘루머’였지.”
[동현] “근데 사진 한 장. 영상 몇 초.”
[동현] “기자들이 제목을 뽑아. 포털 메인에 걸리고, 실시간에 뜨고.”
[동현] “그다음 순서는 누나가 더 잘 알잖아.”
[동현] “기사 한 줄이 아니라—기사 수십 줄로 하루를 덮어버리는 거.”
[동현] “불륜이니 미성년자였니, 합의니 아니니… 확인도 안 된 말이 사람들 입에서 굴러다니다가 결국 ‘사실’이 돼 버리잖아. 누나도 알잖아. 내가 자세히 말 안 해도...”
[동현] “거기다 댓글이 사람을 먼저 죽여 주잖아.”
[동현] “‘원래 그럴 줄 알았다’ ‘역겹다’ ‘은퇴해라’…”
[동현] “제일 먼저 달라지는 게 사람들 태도야. 안 그래?”
[동현] “그다음은… 전화가 안 와.”
[동현] “아니—전화는 오긴 와.”
[동현] “근데 전부 ‘취소’ 전화야.”
[동현] “협찬 끊겨. 광고 내려가. 브랜드는 ‘이미지’ 얘기만 해.”
[동현] “행사 취소. 제작사 회의. 편집본 다시 돌린다는 둥.”
[동현] “방송국은 더 빠르잖아. ‘하차’는 단어도 안 쓰고. 그냥 ‘정리’하자는 쪽으로.”
[동현] “그리고 제일 먼저 잘리는 게… 매니저잖아.”
동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동현] “위에서는 말하지.”
[동현] “‘네가 관리 제대로 했어야지.’”
[동현] “지랄… 관리?”
[동현] “이런 씨발… 내가 뭘 관리해? 그 새끼긴 훨씬 이전에 벌써 망가져 있었는데…”
[동현] “그 인간이 무너지니까, 그 옆에 있던 사람도 같이 무너지잖아.”
[동현] “그때부터는 그냥…”
[동현] “같이 떨어지는 거지…”
[동현] “그러나 저러나 누나는?”
[동현] “미안… 내 이야기만 늘어놨네.”
[동현] “누나는 잘 지냈어?”
[동현]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였어?”
[동현] “누나가 그 자리에서 내려온 건 알았는데… 그렇게 말도 없이 사라질 줄은 몰랐어.”
윤서는 말이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동현이 숨을 한 번 삼켰다.
잠깐—통화 중인 줄도 잊을 만큼 정적이 길어졌다.
[윤서] “동현아, 안부 인사는 나중에 만나서 하자.”
[윤서] “그리고… 너 방금 말한 거.”
[윤서] “기사 한 줄.”
[윤서] “태도 바뀌는 거.”
[윤서] “전화 끊기는 거.”
[윤서] “지금 그게 내가 생각하는 구조야.”
[윤서] “방식은 예전이랑 똑같아.”
[윤서] “다만 그땐 입소문이었고—지금은 AI지.”
[동현] “어? 갑자기 왜 AI 얘기가 나와…?”
[윤서] “응. AI.”
[윤서] “예전엔 사람들이 ‘소문일 수도 있지’ 하고 한 번쯤 의심했어.”
[윤서] “근데 지금은… 영상 하나만 있으면 끝나 버리잖아.”
[윤서] “사람들은 그걸 ‘소문’이 아니라 ‘증거’라고 믿거든.”
[윤서] “진짜인지 확인하는 건… 나중 일이야.”
[윤서] “그리고 나중엔, 이미 늦어.”
[윤서] “아무튼 자세한 건 나중에 얘기하고, 너… 나 좀 도와줘야겠어.”
동현이 입술을 깨물었다.
[동현] “누나… 알았어.”
[동현] “근데 혹시… 누나, 선 넘는 짓 하려는 거야?”
[윤서] “선?”
[윤서] “그 선, 누가 그어?”
[동현] “아니 그래도 뭔지 몰라도 대충 들어보니 사람 인생을—”
[윤서] “이미 다들 그렇게 하고 있어.”
[윤서] “난… 당한 만큼, 정확하게 돌려주는 것뿐이야.”
[동현] “그럼 누나 지금, 혹시… 내가 생각하는 고윤아랑… 그 딸까지도 생각해 둔 거야?”
[윤서] “응. 특히 고윤아 그년의 딸, 고다인.”
[윤서] “무너지는 방식은 똑같아.”
[윤서] “그냥 이번엔… 증거까지 ‘진짜’로 보이게 맞춰줄 뿐이야.”
윤서는 잠깐 말을 멈췄다.
마치 머릿속에서 한 번 더 확인하듯,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입꼬리가 아주 느리게 올라갔다.
[윤서] “사람들은 진짜를 ‘확인’하지 않아.”
[윤서] “자기가 보고 싶은 걸… 먼저 믿지.”
동현은 대답을 못 했다.
목 안쪽이 바싹 말라붙는 느낌이 들었다.
동현은 조용히 듣다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마치 다른 얘기로 덮어버리려는 것처럼 시도하였다.
동현이 웃었다. 하지만 웃음이 아니었다.
[동현] “암튼, 누나… 그 얘긴 나중에 하고.”
[동현] “나 그 뒤로 사업도 해 봤거든.”
[동현] “근데 망했어.”
[동현] “한 번 망하면 신용이 그냥 끝이야.”
[동현] “카드 막히고, 대출 막히고…”
[동현] “그때는 진짜… 난관이 난관을 부르더라.”
[윤서] “그래서 지금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는데?”
[동현] “어… 지금 뉴욕에서 알게 된 사람 집에 얹혀 살고 있지, 뭐.”
[동현] “그냥 씨발… 도망치듯 왔어.”
“지인 따라왔다가… 지금은 그냥…”
“눌러앉게 됐어.”
[동현] “그리고 지금은 돈이 떨어져서 한인마트에서 일해.”
“계산대. 물건 찍고, 봉투 담고… 하루 종일 서 있어.”
“졸라 짜증 나.”
윤서는 잠깐 눈을 감았다.
불쌍해서가 아니었다.
이 이야기는 윤서에게 ‘필요한 조각’이었다.
윤서는 숨 한 번 고르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윤서] “알았어. 근데 지금 딴 얘기할 시간 없어.”
[윤서] “말 돌리지 말고, 내 말부터 들어.”
[윤서] “동현아. 너 컴퓨터 잘하지.”
동현이 짧게 웃었다.
[동현] “어, 누나… 근데 갑자기 왜 컴퓨터 얘기야?”
[윤서] “응. 그럴 줄 알았어.”
[윤서] “잘됐다. 나… 네 도움이 필요해.”
동현의 숨이 바뀌었다.
기대와 불안이 한꺼번에 섞이는 숨이었다.
[동현] “정말로? 무슨 도움.”
윤서는 말을 아꼈다.
이건 고백이 아니라 제안이어야 했다.
[윤서] “당분간 내 집에서 지내.”
[윤서] “너 준비되는 대로 바로 텍사스로 와.”
[윤서] “먹고 자는 건 내가 해결해 줄게.”
[윤서] “대신… 너는 여기서 컴퓨터로 나 좀 도와줘.”
[동현] “아니… 누나, 그건 어렵지 않은데… 돈은?”
[동현] “누나 돈 있어?”
[동현] “내가 한다고 해도, 이거 장비가 한두 푼 드는 게 아니야.”
[동현] “고성능 컴퓨터도 한두 대로 끝나는 게 아니고…”
[동현] “저장장치, 프로그램…”
[동현] “특히 딥페이크 같은 건, 암시장이나 다크웹에 굴러다닌다 해도 공짜가 아니야.”
[동현] “결국 이것저것 하면 돈 꽤 들걸.”
[동현] “생각보다 크게 깨질 텐데, 누나 감당돼?”
윤서는 짧게 말했다.
[윤서] “응 아직까진 모아 둔 거 좀 있어.”
[윤서] “당장 무너질 정도는 아니야.”
[윤서] “네가 필요하는 모든 장비와 너 하나 먹여 살릴 돈은… 아직 충분해. 걱정하지 마.”
동현은 잠깐 말을 잃었다.
그 ‘아직’이라는 단어가 더 현실적으로 들렸다.
[동현] “누나… 도대체 무슨 일,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데?”
윤서는 창밖을 한 번 봤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윤서] “아까 말한 AI 작업.”
동현이 반사적으로 웃었다.
[동현] “누나… 진짜 AI로 딥페이크 만들려는 거구나?”
[동현] “고윤아랑… 고은아 아니 고다인 상대로?”
윤서는 한 박자 쉬었다.
그 짧은 틈에, 동현이 혼자 결론에 닿았다.
[동현] “설마… 누나.”
[윤서] “동현아.”
[윤서] “나 지금 ‘복귀’가 문제가 아니야.”
동현이 조용해졌다.
[동현] “그럼 뭐가 문제야?”
윤서의 목소리가 차분해졌다.
차분할수록, 결심은 더 단단해 보였다.
[윤서] “맞아. 네가 생각하는 그 둘.”
[윤서] “고윤아.”
[윤서] “그리고 그 딸.”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동현의 숨이 끊겼다.
짧은 정적 뒤에, 동현이 낮게 말했다.
[동현] “난… 그 년이 잘 처먹고 잘 사는 거 생각만 하면…”
[윤서] “알아.”
[동현] “누나가 그년한테만 안 밀렸어도…
은혜도 모르는 년이… 감히 누나 등 뒤에서 칼을 꽂냐.”
[동현] “그년만 아니었으면, 우린 이렇게까지는 안 됐어.”
동현의 목소리에 감정이 붙었다.
오래된 원망. 딱딱한 분노.
윤서는 그 감정을 막지 않았다.
오히려 그대로 두었다.
복수에 가장 잘 붙는 연료는 오래된 원망이다.
[윤서] “그래서 내가 너를 찾았고 네가 필요해.”
동현이 조용히 물었다.
[동현] “누나… 다시 복귀할 거야?”
윤서는 단호하게 끊었다.
[윤서] “복귀가 먼저가 아니라니까.”
[윤서] “그 둘이… 내 앞을 막고 있어.”
[윤서] “난 그것들을 먼저 치워야 돼.”
동현은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현실적인 질문을 던졌다.
[동현] “정확히 내가 뭘 하면 되는 건데?”
윤서는 준비해 둔 말을 꺼냈다.
[윤서] “자료를 만들 거야.”
[윤서] “사람들이 ‘원래 있었던 일’처럼 믿게끔.”
[윤서] “그리고 그걸… 한 사람에게 보이게 할 거야.”
동현이 잠깐 침을 삼켰다.
[동현] “누구.”
윤서의 대답은 짧았다.
[윤서] “경찰이야.”
[윤서] “신선율이라는 경찰이 있어.”
동현이 낮게 되물었다.
[동현] “뭐? 경찰? 누나… 너 미쳤어? 경찰까지 건드리면 대체 뭘 하겠다는 건데?”
[윤서] “자세한 건 여기 와서 얘기해. 아무튼 경찰이면 더 쉽게 넘어가.”
[윤서] “그들은 정황이 맞으면 스스로 퍼즐을 완성해.”
[윤서] “확신은… 대부분 자기가 만드는 거야.”
동현은 잠깐 말이 없었다. 전화 너머로 한숨 소리만 들려왔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동현] “누나… 나 할게.”
[동현] “이게 미친 짓인 건 알아. 근데…”
[동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누나가 부탁하는 거잖아.”
[동현] “게다가 고윤아 그년을—한 번 제대로 족칠 수만 있다면.”
[동현] “알았어. 나… 할게.”
윤서는 흔들리지 않게 확정했다.
[윤서] “그래 그럼 당장 내일 출발해.”
동현이 한 번 더 확인하듯 물었다.
[동현] “나 정말… 누나 집에서 지내도 돼?”
[동현] “진짜로… 나 요즘 돈이…”
[윤서] “알아.”
[윤서] “내가 먹여 살린다고 했잖아.”
동현은 그 말에 잠깐 웃었다.
그리고 그 웃음 끝에, 아주 작게 분노를 붙였다.
[동현] “이번엔… 우리가 먼저 할 차례지.”
전화가 끊겼다.
윤서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노트북으로 시선을 옮겼다.
방 안은 조용했다.
그 조용함이—이상하게 안정처럼 느껴졌다.
윤서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이제는—움직일 수 있는 손이 있었다.
윤서는 노트북 화면을 한 번 더 정리했다.
기사 캡처, 인터뷰 영상, 오래된 사진들,
누군가 올려놓고 삭제된 SNS 흔적들.
세상에 남아 있는 건 생각보다 많았다.
윤서는 새 폴더를 하나 더 만들었다.
**[윤아-윤서]**
그리고 그 밑에, 아주 짧은 메모를 남겼다.
** “먼저, 이 관계부터.”**
윤서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식당에서 봤던 선율을 떠올렸다.
그는 ‘사건’ 앞에 서면 감정이 아니라 **정황**을 먼저 본다.
정황이 맞으면 사람은 스스로 확신을 만든다.
경찰이라면 더 그렇다.
그래서 순서는 정해져 있었다.
**1) 고윤아와 최윤서가 절친이라는 “그럴듯한 사실”**
**2) 그 절친의 딸, 고은정이 지금 스토커와 투자 사기로 무너지고 있다는 “사정”**
**3) 그 사정의 연결고리가 선율이 쫓는 동남아 조직과 맞물린다는 “실마리”**
윤서는 손끝으로 트랙패드를 천천히 굴렸다.
화면 속 고윤아는 언제나 반듯한 얼굴이었다.
사람들이 믿고 싶어 하는 얼굴. 실수하지 않을 것 같은 얼굴.
윤서는 그 얼굴을 오래 봤다.
“너는… 이제 곧 네가 깔아 놓은 이미지 위에서만 안전해지겠지.”
혼잣말은 낮았다.
그때, 윤서의 휴대폰이 울렸다.
동현이었다. 이번엔 메시지였다.
[동현] “출발 준비 중. 누나 주소 보내줘.”
윤서는 바로 답했다.
[윤서] “내일 도착하면 바로 시작하자.”
[동현] “누나 고마워.”
[동현] “나 지금 출발할게.”
[동현] “내일까지 기다릴 필요 없잖아.”
[동현] “이번엔 진짜로 잘할게.”
윤서는 그 문장을 보고, 화면을 다시 내려다봤다.
동현은 복수심이 있다.
그게 위험한 건 맞다.
하지만 윤서에게는—지금 그게 필요했다.
윤서는 폴더를 열고 몇 장의 자료를 골랐다.
고윤아의 웃는 얼굴.
윤서의 예전 사진.
둘이 ‘원래부터’ 친했을 것 같은 장면들.
완벽한 새 장면이 아니어도 됐다.
사람은 완벽한 거짓말보다,
**조금 허술하지만 익숙한 진짜 같은 것**
에 더 잘 속는다.
윤서는 파일명을 바꿨다.
**friend_01**
**friend_02**
**friend_video_short**
그리고 폴더 맨 위에 텍스트 파일 하나를 만들었다.
**[설정]**
윤서는 그 안에 딱 세 줄만 적었다.
**고윤아 ↔ 최윤서 : 오래된 절친**
**고은정 : 최근 스토커 + 투자 사기 피해**
**연결 : 동남아 조직 / 선율 담당 사건과 접점**
세 줄을 쓰고 나니, 이야기가 이미 ‘사실’처럼 굳어졌다.
윤서는 잠깐 멈췄다.
여기서 중요한 건 선율에게 “설명”하는 게 아니라,
선율이 **스스로 결론을 내리게 만드는 것**이었다.
윤서는 다른 폴더를 열었다.
**[은정]** [가명: 고다인]
고은정의 사진들.
무대 위의 얼굴, 카메라 앞의 표정,
팬들이 저장한 짧은 영상 캡처들.
사람들이 사랑하는 이미지들.
윤서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스토커.”
“투자 사기.”
“그리고 동남아.”
단어들은 서로 다른 방향에 있는 것 같지만,
요즘 세상에선 그게 한 줄로 이어진다.
윤서는 선율이 지금 쫓는 조직을 떠올렸다.
피해자들에게는 ‘외국’이고, 경찰에게는
‘정보 부족’이고, 범죄자들에게는
‘도망칠 수 있는 거리’다.
윤서는 바로 그 지점을 노렸다.
고윤아와 윤서의 “절친 관계”가 먼저 박히면,
그 다음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절친의 딸이 무너지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 당신이 쫓는 조직의 방식과 닮아 있다.”
그 말은 요청이 아니라, **유혹**이 된다.
선율 같은 사람은 그 유혹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윤서는 노트북을 덮었다.
방 안은 조용했고, 그 조용함이 오히려 확신처럼 들렸다.
동현이가 도착하면—
이제 ‘관계’를 만들고, ‘사정’을 얹고, ‘연결’을 심는다.
윤서는 창밖을 바라보며 아주 작게 웃었다.
선율은 아직 모른다.
자기가 쥘 첫 단서가
누군가가 만든 “가짜 절친으로 포장한 흔적”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흔적을 만지는 순간—
그는 제 발로 문을 열고, 함정 안으로 들어온다는 걸.
— 2부 | 손과 그림자
(When I Hold You in My Arms — EP19-2)
텍사스의 하루는 생각보다 빨리 지나갔다.
윤서는 커튼을 반쯤만 열어 둔 채, 창밖을 오래 봤다.
휴대폰 화면엔 마지막 통화 기록이 남아 있었다.
동현.
뉴욕.
오늘 저녁 출발.
윤서는 한 번도 “조심해서 와” 같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건 위로다.
윤서에게 필요한 건 위로가 아니라 그녀의 복수를 ‘도와줄 손발’이었다.
잠금 화면 위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동현] “누나. 나 공항 도착.”
[동현] “근데… 택시 잡기 전에 주소 다시 보내줘.”
윤서는 주소를 길게 복사해서 붙여넣었다.
그리고 한 줄을 덧붙였다.
[윤서] “도착하면 초인종 누르지 말고 문자로 왔다고 알려줘.”
[동현] “왜?”
[윤서] “질문하지 말고, 내가 말한 대로만 해.”
윤서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거실 테이블 위를 다시 확인했다.
노트북 두 대.
충전기.
프린트된 캡처 자료.
외장 저장장치 하나.
그리고—손때가 거의 묻지 않은 새 계정 메모.
집은 깔끔했다.
깔끔한데… 생활감이 없었다.
사람이 살기보다는 누가 잠깐 머무는 공간 같았다.
그게 윤서에게는 편했다.
—
한 시간쯤 지났을까.
밖에서 차가 서는 소리가 났다.
윤서는 창가로 가지 않았다.
커튼도 더 열지 않았다.
그 대신 현관 옆 작은 화면을 켰다.
현관 카메라.
화면 속에 택시가 멈췄다.
운전석 문이 열리고, 남자가 내렸다.
캐리어 손잡이를 쥔 손이 얇게 떨렸다.
어깨가 내려앉아 있고, 걸음이 무거워 보였다.
옷은 싸구려 티가 났고, 신발은 많이 닳아 있었다.
얼굴은… 예전보다 훨씬 꺼져 있었다.
동현이었다.
동현은 잠깐 주변을 둘러봤다.
처음 오는 동네의 조용함이 어색한 사람처럼.
그리고 현관 앞에 섰다.
초인종에 손이 갔다가 멈췄다.
윤서가 보낸 문자가 떠오른 듯,
동현은 휴대폰을 꺼내 타자를 치기 시작했다.
[동현] “누나, 나 지금 문앞이야.”
윤서는 문을 열기 전에,
현관문 잠금장치 위에 달린 작은 금속을 한 번 더 확인했다.
습관이었다.
누가 따라왔는지, 누가 근처에서 멈췄는지.
그런 건—나중에야 의미가 생긴다.
윤서는 문을 열었다.
공기가 먼저 들어왔다.
그 뒤로 동현이 들어왔다.
[동현] “누나…”
윤서는 한 걸음도 먼저 다가가지 않았다.
대신 짧게 말했다.
[윤서] “왔어.”
동현은 웃으려다 실패했다.
입술이 떨렸고, 눈이 빨리 깜빡였다.
[동현] “진짜… 누나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동현의 목이 잠겼다.
윤서는 그걸 모르는 척했다.
감정이 올라오면, 계획한 일이 늦어진다.
윤서는 동현의 캐리어를 한 번 보고 말했다.
[윤서] “짐은 저 방에 둬.”
[동현] “누나… 나 지금 상태가 좀… 그렇지.”
[윤서] “상태 얘기는 샤워하고 나와서 해.”
동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방으로 들어갔다.
캐리어 바퀴 소리가 복도를 긁고 지나갔다.
윤서는 문을 닫고 잠금을 걸었다.
두 번.
한 번 더 확인.
—
30분 뒤.
동현이 나왔다.
머리는 젖었고, 얼굴은 더 말라 보였다.
그런데 눈은 조금 달라져 있었다.
살기 위해 굴러온 눈.
동현이 거실 테이블 위 물건들을 보고 바로 이해했다.
[동현] “이제… 정말 시작하는구나.”
윤서는 앉지도 않은 채 말했다.
[윤서] “그래.”
[윤서] “근데 네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하면 바로 들켜.”
동현이 눈을 들었다.
[동현] “뭔 소리야. 요즘 AI로 합성만 잘하면—”
윤서는 잘랐다.
[윤서] “너무 완벽하게 잘하면 들켜.”
[윤서] “어떤 사람들은 완벽한 걸 의심해.”
[윤서] “특히 경찰은 더.”
동현은 잠깐 말이 없었다.
윤서는 테이블 위 프린트 하나를 펼쳤다.
고윤아.
그리고 윤서.
서로 다른 사진인데,
같은 장면처럼 보이게 만들 수 있는 구도들.
윤서는 손가락으로 딱 두 군데만 짚었다.
[윤서] “이런 느낌으로 해 봐.”
[윤서] “너무 예쁘게 만들지 마.”
[윤서] “그냥 평범하게 익숙하게 만들어.”
동현이 씁쓸하게 웃었다.
[동현] “평범하고 익숙하게…”
윤서는 경찰서에서, 자신을 투자사기로 엮어 쓰기 위해 만들어진 증거자료—
자신의 가짜 영상들을 떠올렸다.
[윤서] “사람들이 믿는 건 ‘고화질’이 아니야.”
[윤서] “우선 단순한 캡처면 될 거야.”
[윤서] “흔들린 손.”
[윤서] “저화질 영상통화처럼 보이는 화면.”
[윤서] “누가 급하게 저장한 것 같은 흔적.”
동현의 눈빛이 바뀌었다.
처음으로 “일하는 눈”이 올라왔다.
[동현] “누나… 너 이런 거, 어디서 배웠어?”
윤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은 설명이 되고, 설명은 빈틈이 된다.
윤서는 다른 노트북을 켠 뒤,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동현에게
또 다른 사진과 자료들을 보여주었다.
[윤아-윤서]
그 안엔 파일이 세 개 있었다.
friend_01
friend_02
friend_video_short
동현이 화면을 보자마자 숨을 들이쉬었다.
[동현] “이건… 누나가 벌써 정리해 둔 거야…?”
[윤서] “응, 샘플 몇 개 만들어 봤어.”
[윤서] “지금부터는 네가 완성해.”
동현이 손을 뻗었다.
키보드에 손가락을 올리는 순간, 표정이 달라졌다.
지금까지는 살아남는 얼굴이었다면,
지금은—무언가를 만드는 얼굴이었다.
동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동현] “근데 누나.”
[동현] “우리가 그 경찰한테 뭘 보여주는데?”
윤서는 기다렸다는 듯, 준비해 둔 세 줄을 꺼냈다.
[윤서] “나, 고윤아와 절친 사이.”
[윤서] “딸, 고은정(활동명:고다인).”
[윤서] “그리고 연결고리.”
동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현] “오케이, 먼저 고윤아랑 누나가 절친인 것처럼 먼저 박는다.”
[동현] “그다음은 은정이가 스토커랑 투자사기로 무너지는 ‘사정’을 얹고.”
[동현] “그 사기가 그 경찰이 수사 중인 동남아 조직이랑 닮아 있다.”
윤서는 아주 낮게 말했다.
[윤서] “그래 우선 그렇게 시작하는 거야.”
동현이 멈칫했다.
[동현] “그럼 두 번째가 뭐야?”
윤서가 화면을 가리켰다.
폴더 이름을 한 번 더, 또박또박 읽게 하듯.
[고윤아-최윤서]
[윤서] “너는 우선.”
[윤서] “첫 번째 계획대로 나랑 윤아가 절친인 것처럼 만들어.”
[윤서] “내가 저장해 놓은 사진들을 이용하고.”
[윤서] “그다음은 저장해 놓은 짧은 영상으로 만들어 봐.”
[윤서] “사람들이 ‘원래 우리 둘 사이가 저랬다’고 착각하게.”
동현이 고개를 끄덕이려다 윤서의 다음 말을 듣고 눈이 커졌다.
윤서의 다음 말이 이어졌다.
[윤서] “그리고 고은정, 다인이.”
[윤서] “카메라 앞이 아니라—카메라 뒤.”
[윤서] “클럽 VIP룸에서 남자들과 전혀 다른 사람처럼 노는 것처럼 만들어.”
[윤서] “술.”
[윤서] “담배.”
[윤서] “남자들이랑 엉켜 있는 장면.”
[윤서] “대중이 믿든 말든, 우선 시작해 봐.”
동현이 침을 삼켰다.
[동현] “누나… 그건 너무…”
윤서는 끊었다.
[윤서] “청순은 ‘사람’이 아니야.”
[윤서] “이미지야.”
[윤서] “그리고 이미지는—노출로 바뀐다.”
동현의 눈이 흔들렸다.
윤서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윤서] “처음엔 의심부터 시작해서 욕하겠지.”
[윤서] “근데 계속 보게 만들면.”
[윤서] “사람들은 결국 ‘저런 애였나 보다’로 넘어가.”
[윤서] “그 순간부터, 쟤는 숨만 쉬어도 의심받게 돼 있어.”
동현이 낮게 말했다.
[동현] “국민 여배우 딸… 그 이미지가…”
[윤서] “그래.”
[윤서] “그걸 먼저 부러뜨려.”
[윤서] “엄마를 치기 전에.”
[윤서] “딸부터 흔들어 놔야 돼.”
[윤서] “대중이 믿든 안 믿든, 우선 시작해.”
동현의 손이 잠깐 멈췄다.
키보드 위에서 허공을 떠돌았다.
[동현] “누나…”
[동현] “내가 아무리 잘 만들어도 대중이 안 믿을 텐데.”
윤서는 바로 말했다.
[윤서] “알아.”
[윤서] “처음엔 그러겠지.”
동현이 윤서를 바라봤다.
윤서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윤서] “근데 계속 뿌려.”
[윤서] “그 이미지를 사람들이 계속 보게 만들어.”
[윤서] “사람은 ‘믿음’보다 ‘노출’에 먼저 길들어.”
[윤서] “무의식이라는 게 있어.”
[윤서] “은정이를 떠올릴 때—그 장면이 같이 떠오르게 돼.”
동현의 입술이 조금 벌어졌다.
윤서는 끝까지 말했다.
[윤서] “TV에서 물건 팔려고 광고 연속으로 때리잖아.”
[윤서] “그 효과를 이용해 보는 거야.”
[윤서] “계속 이어지다 보면… 윤아보다.”
[윤서] “그 년의 딸, 은정이가 먼저 흔들릴 거야.”
동현은 윤서를 소름 돋는 얼굴로 쳐다봤다.
마치 처음 만난 사람처럼.
[동현] “누나… 너 지금…”
[동현] “진짜로 사람 하나를… 망가뜨리려고 아주 작정을 했구나.”
윤서는 짧게 웃었다.
웃음인데, 온도가 없었다.
[윤서] “사람은 이미 자기 약점으로 쉽게 무너질 수 있어.”
[윤서] “난 그냥—그 방향만 잡아주는 거야.”
동현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동현] “난… 누나랑 이름이 비슷한 것만으로도 저년이 싫어.”
[동현] “자매 사이도 아니고… 근데 그냥.”
[동현] “싫어.”
윤서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그저, 한 문장만 던졌다.
[윤서] “그래, 넌 그 감정으로 해.”
[윤서] “그게 제일 오래 가.”
동현이 다시 키보드를 두드리려다, 입안에서 오래된 분노가 먼저 튀어나왔다.
[동현] “누나가 그년한테 밀려나지 않았어도…”
[동현] “누나나 난 진짜… 이렇게 살진 않았을 거야.”
윤서는 그 말을 끊지 않았다.
그 감정이 동현을 움직이게 한다.
윤서는 테이블 끝에 휴대폰을 올려두고 말했다.
[윤서] “좋아.”
[윤서] “오늘은 ‘관계’부터 완성해 봐.”
[윤서] “윤아랑 내가… 오래된 절친처럼.”
동현은 노트북 화면을 응시했다.
그리고 마치 기도하듯 중얼거렸다.
[동현] “사람들은… 진짜보다 진짜처럼 보이는 걸 먼저 믿지.”
윤서는 대답 대신 창밖을 봤다.
햇빛은 건조했고, 그림자는 선명했다.
그때, 윤서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모르는 번호였다.
윤서는 받지 않았다.
대신 메시지가 떴다.
“아직도 그 이름을 쓰고 있네요.”
그건 둘만 알아듣는, 암호 같은 문자였다.
그리고—전화가 다시 울렸다.
이번엔 끊지 않았다.
윤서는 화면을 손바닥으로 가린 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윤서] “말해.”
스피커 너머의 목소리는 낮고, 감정이 없었다.
[그림자] “대상, 지금 이동했습니다.”
[그림자] “일정은 그대로고요. 주변 반응도 그대로입니다.”
윤서는 고개도 끄덕이지 않았다.
[윤서] “우선 아무거나 괜찮은 것으로 보내 봐.”
[그림자] “네, 영상 두 개. 사진 네 장 바로 보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림자] “오늘도 ‘그 이름’으로 보내드릴까요?”
윤서가 아주 짧게 말했다.
[윤서] “그래.”
[윤서] “근데 너무 깨끗하면 버려.”
[윤서] “캡처처럼 찍힌 것만 골라서 보내 봐.”
[윤서] “급하게 저장한 것처럼 보이는 것으로.”
잠깐 정적.
[그림자] “알겠습니다, 실장님.”
윤서가 한마디를 더 얹었다.
[윤서] “그리고… 다인이.”
[윤서] “걔 손버릇. 표정. 습관까지 어떤지 알려줘.”
[윤서] “그래야 진짜처럼 보이게 여기서 만들 수 있어.”
[그림자] “알겠습니다.”
통화가 끊겼다.
윤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화면을 꺼버렸다.
동현이 눈치챘다.
[동현] “누나, 누구야?”
[동현] “혹시 예전에 누나가 썼던 그 기자야?”
윤서는 화면을 꺼버렸다.
표정은 그대로였다.
[윤서] “넌 신경 쓰지 마, 지금은 상관없어.”
[윤서] “하던 거나 계속해.”
동현은 다시 키보드를 두드렸다.
윤서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누가 보고 있다.
누가 알고 있다.
근데 윤서는 멈추지 않았다.
이제 시작했으니까.
윤서는 조용히 폴더 이름을 바꿨다.
[윤아-윤서] → [증거]
그리고 그 아래에 새 파일을 하나 만들었다.
[익명 제보 초안]
윤서는 파일을 열지 않았다.
오늘은 ‘관계’를 완성하는 날이다.
윤서는 뒤에서 동현의 화면을 보며 생각했다.
자료는 곧 준비된다.
이제 남은 건 하나.
선율이 그걸 ‘진짜’라고 믿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
믿는 순간—
그는 스스로 걸어 들어올 것이다.
움직이는 순간, 그가 믿게 될 건
진실이 아니라—정황이다.
그리고 그 정황은
지금 이 방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 3부 | 조작
(When I Hold You in My Arms — EP19-3)
텍사스의 조용한 거실에서 튀던 화면이—
한 박자 늦게, 한국의 촬영장으로 넘어갔다.
촬영장은 늘 시끄러운데—
쉬는 시간만큼은 이상하게 조용했다.
카메라가 내려가고, 조명이 꺼지고,
스태프들이 숨을 고르는 그 짧은 틈.
고다인(본명: 고은정)은 대기 의자에 앉아
담요를 무릎까지 끌어올렸다.
겨울은 아니었는데, 촬영장 바람은 늘 차갑다.
특히 사람이 많은 공간에서 혼자일 때는 더 느꼈다.
메이크업팀이 얼굴을 한 번 더 눌러 주고 지나갔다.
[메이크업] “다인 씨, 잠깐만요. 오늘 조명이 세서 유분이 조금만 떠도 바로 잡혀요.
파우더 한 번만 얹을게요.”
[고다인] “네.”
[메이크업] “조명이 세서 금방 떠요. 코 옆이랑 이마만 조금 더 할게요.”
[고다인] “…….”
[메이크업] “좋아요. 움직이시면 다시 떠요. 바로 들어가실게요.”
대답은 나왔는데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고다인은 물병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목구멍으로 내려가는 느낌도 없었다.
대기실 문 너머에서 매니저가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낮게 눌러 말하는 목소리가 문틈으로 희미하게 새어 들어왔다.
평소라면 들리지 않을 말을—
오늘은, 다인이가 원치 않아도 다 들었다.
[매니저] “아니, 아직 기사화는 안 됐어요.”
[매니저] “근데 댓글 반응이… 네, 확산 속도가 좀….”
다인이는 시선을 내렸다.
휴대폰 화면은 이미 잠금해제돼 있었다.
손가락이 자동으로, 습관처럼 SNS 알림을 눌렀다.
알림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친구들한테서—쏟아졌다.
손가락이 자동으로, 습관처럼 SNS 알림을 눌렀다.
0.5초도 안 돼서
화면 위가 미친 듯이 올라갔다.
DM.
멘션.
댓글.
단체방.
부재중 전화.
친구들 알림이 아니라—
세상이 들이닥친 느낌이었다.
‘다인아, 너 괜찮아?’
‘이거 뭐야… 너 맞아?’
‘누가 올린 거야?’
‘지금 당장 해명해.’
‘진짜 실망이다.’
읽을수록 손이 얼었다.
그 사이에 섞여 들어온 말들.
‘근데 저 남자 누구야?’
‘남친이야?’
‘저 남자 존잘인데…’
‘설마 원나잇?ㅋㅋ’
‘야ㅋㅋ 남친 있었어? 왜 숨김’
ㅋㅋ가 붙은 게 더 소름이었다.
알림 숫자가 계속 뛰었다.
99+.
새로고침을 안 해도
새로고침이 됐다.
그리고—
누가 이미 캡처해서 퍼뜨리고 있었다.
다인이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리고—멈췄다.
스크롤을 내리는 손끝이 떨렸다.
처음엔 사진 한 장이었다.
테이블 위엔 크리스털 잔들이 각자 다른 높이로 빛을 받았다.
샴페인 플루트엔 기포가 아직 살아 있고, 로우볼 잔엔 큰 얼음 한 덩이가 천천히 녹았다.
옆엔 라벨이 번쩍이는 싱글몰트와 코르크를 다시 꽂아 둔 와인.
옆에서 누군가의 팔이 고다인의 어깨에 걸쳐 있는 듯한 각도.
다음은 짧은 영상.
흔들리는 화면.
누가 뒤에서 몰래 찍은 것 같은 시선.
그게 더 끔찍했다.
“누가 의도적으로 몰래 찍었다”는 느낌이 아니라,
“원래 이런 애인데 우연히 찍혔다”는 느낌이었다.
다인이는 화면을 꺼버렸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머릿속에 프레임이 박혔다.
짧은 영상 속의 웃는 표정.
술잔을 들었다 내려놓는 손.
남자 목소리.
뒤엉킨 그림자.
그게 진짜인지 아닌지는—지금 중요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보고
사람들이 말하고
사람들이 저장하고
사람들이 믿기 시작한다는 게 중요했다.
다인이는 손바닥으로 휴대폰을 덮었다.
눈을 감았다.
“나 아니야.”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입이 먼저 움직였다.
한 번 더. 더 작게.
“그건 내가 아니라고…”
속으로 말해도, 몸이 그 말을 안 믿었다.
심장이 먼저 이상하게 뛰었다.
마치 죄를 지은 사람처럼.
[스태프] “다인 씨, 10분 뒤에 리허설에 들어갈게요!”
[고다인] “네….”
대답은 했는데, 얼굴이 굳어 있었다.
매니저가 통화를 끊고 고다인 쪽으로 빠르게 걸어왔다.
평소에 쓰던 “괜찮아, 별거 아니야” 얼굴이 아니었다.
눈이—이미 싸움을 준비한 눈이었다.
[매니저] “다인아.”
[고다인] “…네.”
[매니저] “지금 네 폰 보여줘 봐.
어떤 계정에서 퍼지고 있는지 봐야겠어.”
다인이는 잠깐 멈췄다.
그 말이 너무 현실적이라서.
사람을 먼저 걱정하는 말이 아니라,
확산 경로를 먼저 잡으려는 말이라서.
다인이는 억지로 폰을 내밀었다.
매니저는 화면을 보자마자 이를 악물었다.
[매니저] “미친… 이거 편집·조작된 것이잖아.”
[매니저] “근데… 굉장히 그럴듯하게 만들었네.”
[매니저] “요즘은 이런 거… 딥페이크로도 금방 만들어.”
다인이는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매니저를 바라봤다.
[고다인] “편집… 이요?”
[매니저] “그래. 근데 너 알지?”
[매니저] “사람들은 ‘편집, 조작’이란 말 자체를 잘 안 믿어.”
[매니저] “보고 싶은 것만 보잖아.”
고다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입술 안쪽이 따끔하게 찢기는 느낌이 났다.
[고다인] “오빠… 나 진짜 아니에요.”
매니저가 아주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믿는다는 고개가 아니라, “알아, 근데”라는 고개였다.
[매니저] “나도 알아.”
[매니저] “근데 이게 지금 터진 타이밍이 너무 이상하고 느낌이 안 좋아.”
[매니저] “지금 너 쉬고 있잖아. 촬영하고 쉬는 이때와 이 시간을...”
[매니저] “누구인지는 몰라도 이것들이 노리는 게 딱 그거야.”
다인이는 그 말을 듣고 처음으로 소름이 돋았다.
노린다...
“악플”이 아니라
“실수”가 아니라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올리는 가짜 사진과 영상.
다인이의 목이 말라 왔다.
숨을 들이마셔도 목 안쪽이 바짝 말랐다.
컵을 들어 물을 삼켰다.
차갑게 넘어갔는데도, 갈증은 그대로였다.
몇 모금 더. 그래도 안 풀렸다.
마시는 건 물인데—
마르는 건 계속, 공기였다.
[고다인] “누가… 왜…”
매니저는 잠깐 망설이다가 말했다.
[매니저] “지금은 이유가 중요하지 않아.”
[매니저] “대응이 먼저야.”
[매니저] “회사랑 얘기했고, 법무팀이 움직이고 있어.”
고다인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 한쪽이 더 무너졌다.
법무팀.
대응.
공식입장.
그 단어들이 무서워졌다.
그 말은 곧, 이게 ‘없는 일’이 아니라
‘처리해야 할 일’이 됐다는 뜻이니까.
다인이의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문자.
모르는 번호.
다인이의 손이 굳었다.
매니저가 먼저 봤다.
잠깐의 정적.
[매니저] “이거… 너 번호 어디서 알았지?”
다인이는 입을 열지 못했다.
매니저가 화면을 고다인에게 돌려줬다.
짧은 문장 하나가 떠 있었다.
“카메라 앞이랑 뒤가 다르네.”
다인이는 숨을 멈췄다.
또 울렸다.
이번엔 다른 계정.
다른 번호.
같은 냄새.
“설명해 봐. 우리가 다 봤거든.”
그때 다인이는 마치 누군가가 바로 옆에서
귓속말을 하는 것처럼 느꼈다.
이건 소문이 아니라—접근이었다.
그때, 알림이 하나 더 떠올랐다.
또 다른 사진 몇 장.
방금 전까지 고다인이 앉아 있던 그 대기 의자.
담요를 무릎까지 끌어올린 채, 고개를 약간 숙인 모습.
근데 이상했다.
그 순간의 공기보다 표정이 더 ‘연출’ 같았다.
캡션이 붙어 있었다.
‘촬영장에서도 스태프 무시하는 표정’
‘대기실에서 스태프들에게 욕설뒤 갑질하고 쉬는 중’
다인이의 손끝이 다시 떨렸다.
자기 눈앞의 장면이—이미 다른 이야기로 바뀌어 있었다.
매니저가 다인이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았다.
[매니저] “지금부터 네 폰 내가 들고 있을게.”
[매니저] “너는 촬영만 해.”
[매니저] “표정 관리. 최대한.”
다인이는 고개를 끄덕이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속이 내려앉았다.
그때, 스태프가 다시 외쳤다.
[스태프] “다인 씨! 리허설 들어갈게요!”
다인이가 천천히 일어났다.
다리가 잠깐 휘청했다.
촬영장으로 걸어가는데,
다인이의 머릿속엔 한 장면만 계속 재생됐다.
어두운 조명.
흔들리는 화면.
VIP룸 안에서—
어떤 남자의 품에 기대듯 안겨, 술에 취한 채 웃고 있는 자기 얼굴.
다인이는 화면을 한 번 더 확대했다.
… 분명 자기였다.
같은 머리.
같은 옷.
같은 얼굴.
대기실에서 스태프에게 갑질하는 모습.
진짜가 아닌데—
너무 진짜처럼 보이는 얼굴.
다인이는 그 순간 깨달았다.
이건 한 번 해명해서 끝나는 일이 아니다.
한 번 사과해서 끝나는 일이 아니다.
이건…
사람들의 머릿속에 “나”를 새로 심는 작업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걸 지금, 아주 꾸준히 하고 있다.
다인이는 카메라 앞에 섰다.
감독이 외쳤다.
“레디—액션.”
고다인은 웃었다.
배운 대로.
프로처럼.
하지만 그 웃음 뒤에서,
휴대폰 화면이 계속—
자기 이름을 찢고 있었다.
촬영이 끝나고 다인이의 휴대폰이 손바닥 아래에서 다시 진동했다.
화면은 보지 않아도 알았다.
이미 끝났다. 퍼졌다.
문틈으로 바깥 소리가 스며들었다.
누군가 급하게 걸어오는 소리, 낮게 섞인 통화, 그리고…
짧고 날카로운 플래시 셔터음 같은 것.
그때였다.
잠긴 화면 위로, 알림 하나가 얇게 떠올랐다.
[속보] 고다인, 오늘 오후 4시 긴급 기자회견… “직접 입장 밝힌다”
다인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들어온 공기는 차갑게, 목 안으로 걸렸다.
손바닥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화면을 확인하는 순간—문이 열렸다.
[매니저] “다인아,. 지금… 내려가야 돼.
그냥 너 하던 대로 자연스럽게 너 아니라고만 말하면 돼."
[매니저] "나머지는 오빠랑 회사 측에서 알아서 할게."
그리고 복도 끝에서 또 한 번 셔터가 터졌다.
이번엔 소리가 아니었다.
‘사냥’ 같은 빛이었다.
다인이는 웃지도 울지도 못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내가… 뭘 어떻게 말해야 하는데.”
그 대답은 아직 없었다.
하지만 밖은 이미 결론을 쓰고 있었다.
— 4부 | 반으로 갈라진 화면
(When I Hold You in My Arms — EP19-4)
한국 — “조작”이라는 말이 증거가 되지 않는 자리
기자회견장 조명은 너무 밝았다.
밝은데—숨이 막혔다.
다인이는 단상 뒤에 앉아 있었다.
옆에는 소속사 대표, 법무팀 변호사, 매니저가 같이 자리에 있었다.
테이블 앞엔 마이크가 줄지어 놓였고, 카메라 셔터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모두가 “대응”의 얼굴을 하고 있었고, 고다인만 “맞서기보다 견디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고다인은 선글라스를 쓰고, 무표정으로 있었다.
플래시가 터졌다.
카메라 셔터 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소속사 대표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현재 온라인상에 유포되고 있는 영상 및 이미지들은,
명백한 조작과 편집으로 확인됐습니다.
당사는 강력한 법적 조치를—”
말은 매끈했다.
문장은 정확했다.
근데 그 정확함이 오히려 불안했다.
다인이는 마이크 앞에서 손을 모았다.
손끝이 차가웠다.
“다인 씨, 직접 말씀해 주세요.”
고다인은 고개를 들어 기자들을 봤다.
기자들의 얼굴은 하나가 아니었다.
어떤 얼굴은 “기사”를 보고 있었고,
어떤 얼굴은 “사실”을 보고 있었고,
어떤 얼굴은… 이미 “결론”을 들고 있었다.
다인이가 겨우 말했다.
“저는… 그런 적이 없습니다.”
“유포된 영상은 사실이 아닙니다.”
“저와 제 가족들만은… 제발—”
“질문받겠습니다!”
그 한마디에 공기가 바뀌었다.
첫 질문은 예상대로였다.
“다인 씨, 조작이라고 하셨는데요.
그걸 어떻게 증명하실 건가요?”
“지금 이 자리에서,
대중이 납득할 만한 근거를 제시하실 수 있습니까?”
두 번째 질문은 더 노골적이었다.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나요?”
“영상이 찍힌 것으로 보이는 시간대에 어디에 있었는지,
누가 확인해 줄 수 있습니까?”
“동선 공개 가능합니까?”
변호사가 마이크를 잡았다.
“현재 당사는 전문 기관 감정 절차를—”
기자가 끊었다.
“감정 결과 나오기까지 시간이 걸리잖아요.”
“그럼 그 사이에 영상이 더 퍼지면요?”
“법적 조치 말고, 지금 당장
사람들이 믿게 만들 방법이 있습니까?”
다인이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그 질문은 해명할 수 없다.
“지금 당장 증명”이라는 말 앞에서,
사람은 늘 늦어진다.
변호인단이 기자들의 질문에 다시 입을 열었다.
다인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옆에서 변호인단의 말을 끝까지 듣고만 있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희도 봤습니다.”
“너무 진짜처럼 보입니다.”
“이 정도면 ‘가짜일 수가 없다’는
느낌을 받는 분들도 많아요.”
그 순간, 기자가 말을 끊고 또 치고 들어왔다.
“그럼에도 조작이라고 주장하신다면,
어떻게 책임지고 설명하실 건가요?”
뒤에서 웅성거림이 커졌다.
사람들의 마음이 반반으로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다’는 쪽과
‘그래도 뭔가 있다’는 쪽.
고다인은 그 사이에 서 있었다.
또 다른 질문이 튀어나왔다.
“다인 씨, 왜 이런 일이 생겼다고 생각하세요?”
“혹시 최근에 누군가와 갈등이 있었나요?”
“원한을 살 만한 일이 있었습니까?”
그 질문은 순간, “가짜냐 진짜냐”를 넘어
고다인의 삶 전체를 “의심의 서사”로 바꿔버렸다.
고다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다인이가 마이크를 잡았다.
“저는….”
“저는 그냥… 촬영했고, 쉬었고, 다시 일했어요.”
“그게 전부예요.”
목소리가 떨렸다.
“근데 지금…”
“제가 뭘 해도… 다 죄인처럼 보여요.”
플래시가 또 터졌다.
선글라스 뒤에서 고다인의 얼굴 근육이 순간 굳었다.
그 틈을 기자가 파고들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영상이 조작이라면, 왜
‘그럴듯한’ 장면들이 계속 나오죠?”
“왜 계속 추가로 올라옵니까?”
“누가 봐도 진짜처럼 보이는 걸,
다 가짜라고만 하면 끝입니까?”
고다인은 그 말에서 무언가를 깨달았다.
이건 한 번 해명해서 끝나는 일이 아니다.
한 번 사과해서 끝나는 일이 아니다.
이건…
끝을 정해 놓고 계속 새로 덧칠하는 게임이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든, 다음 조각이 또 올라온다.
그때, 다른 기자가 끼어들었다.
“추가 질문 하나만 더 하겠습니다.”
“방금 올라온 사진 보셨죠?”
“대기실에서 쉬는 사진이요.”
“스태프를 무시하는 듯한 표정—
그것도 조작입니까?”
숨이 한 번 더 꺾였다.
고다인은 눈을 깜빡였다.
기자가 이어붙였다.
“그리고 어젯밤에 올라온 영상.”
“스태프에게 욕설을 하고—뺨을 때리는 장면.”
“그것도 ‘딥페이크’라고 주장하실 건가요?”
순간, 회견장 공기가 더 낮아졌다.
사람들이 ‘가짜냐 진짜냐’보다
더 먼저 붙잡는 게 바뀌는 소리가 났다.
‘사생활’이 아니라
‘인성’으로 다인이를 고립시키고 있었다.
변호사가 마이크를 잡았다.
“현재 당사는 해당 영상이 AI 합성 및 편집 가능성이—”
기자가 끊었다.
“가능성 말고요.”
“대중이 보기에 너무 선명합니다.”
“소리도 또렷하고, 표정도 자연스럽고요.”
“이 정도면…
가짜일 수가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뒤에서 웅성거림이 커졌다.
사람들의 마음이 다시 반반으로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다인이의 손끝이 더 차가워졌다.
그 질문들 사이에서,
다인이는 문득 깨달았다.
이건 ‘사실’이 아니라
‘성격’에 대한 판결이다.
한 번 붙으면 떨어지지 않는
라벨.
다인이는 잠깐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고개를 들었다.
선글라스에 가려진 눈이 빨개져 있었다.
“그만하세요.”
누구에게 한 말인지도 모르게, 입이 먼저 열렸다.
“저도… 사람이에요.”
말이 공중에서 한 번 흔들렸다.
그 다음 문장은 끝까지 가지도 못했다.
“제가… 여기서 뭘 더…”
숨이 목에서 걸렸다.
그리고 참아 둔 게 한꺼번에 터졌다.
“아니라고 했잖아요! 저 아니라고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목이 잠겼다.
입술만 움직였는데, 소리가 더는 따라오지 않았다.
플래시가 연달아 터졌다.
그 소리에 다인이는 더는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다인이는 마이크를 내려놓고, 단상에서 뛰쳐내려오듯 몸을 돌렸다.
“다인 씨! 답변—!”
“이탈하시는 건가요?!”
“조작이면 증거는요?!”
목소리들이 뒤에서 발목처럼 달라붙었다.
매니저가 급하게 손을 잡았다.
“다인아, 잠깐만—”
다인이는 손을 뿌리치진 못했다.
그냥… 잡힌 채로, 앞으로 끌려가듯 걸었다.
눈앞이 흐려져서, 어디가 출구인지도 순간 헷갈렸다.
순간 다인이는 매니저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기자회견장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문이 닫히는 순간, 밖의 공기가 더 차가웠다.
고다인은 복도를 거의 뛰다시피 걸었다.
뒤에서 플래시가 따라왔다.
기자들이 따라왔다.
질문이 따라왔다.
“다인 씨! 어디 가십니까?”
“해명 더 하셔야—”
“도망치시는 건가요?”
다인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는 순간, 또다시 화면 속 사람이 될 것 같아서 두려웠다.
복도 끝에서 다인이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그제야 알았다.
자기가 무너지는 게 아니라—
세상이 자기를 만들고 있다는 현실을,
이제는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텍사스 — 숫자가 튀는 순간
같은 시간, 텍사스.
윤서의 집 거실은 조용했다.
조용한데—화면은 시끄러웠다.
동현은 노트북 두 대를 켜놓고 있었다.
하나는 파일 작업 화면,
하나는 업로드된 콘텐츠가 퍼져 나가는 반응창.
숫자가 뛰었다.
조회.
저장.
리포스트.
댓글.
스크린샷 인증.
처음엔 느렸다.
근데 어느 순간부터—속도가 바뀌었다.
동현은 노트북 화면에서 눈을 못 뗐다.
입꼬리가 먼저 올라갔다.
“오… 누나, 이거 봐.”
“미쳤다.”
손가락이 트랙패드를 탁탁 쳤다.
창이 열리고, 또 열리고, 알림이 터졌다.
동현이 침을 삼켰다.
근데 무서워서가 아니라—기분이 올라와서였다.
[동현] “누나…”
[동현] “지금… 존나 튀고 있어.”
[동현] “속도 봐. 이건… 멈출 수가 없어.”
동현은 웃음을 삼키면서도,
어딘가 자랑하듯 화면을 윤서 쪽으로 돌렸다.
윤서는 소파에 앉지 않았다.
벽 쪽에 기대서 팔짱을 꼈다.
표정은 무표정인데, 눈빛만은 느리게 웃고 있었다.
[윤서] “그래.”
[윤서] “이제 시작된 거야.”
동현은 화면을 확대했다.
댓글들은 이미 전쟁이었다.
‘가짜 아님 진짜?…’
아래는 더 짧고, 더 비꼬았다.
‘아니 근데 존나 진짜 같은데? ㅋㅋ’
‘딥페이크면 더 문제 아님? ㄹㅇ’
‘편집이라더니 왜 계속 나오냐’
‘내숭녀 또 피해자 코스프레 시작 ㅋㅋ’
‘아, 재수없어…’
‘아니라고만 하지 말고 증거를 까봐’
‘진짜든 가짜든 둘 다 최악임’
동현은 어깨를 움찔했다.
사람들이 반으로 갈라지는 게 실시간이었다.
[동현] “누나, 근데…”
[동현] “이거 봐, 저쪽에서 벌써 기자회견까지 했었대.”
윤서는 고개를 아주 조금만 끄덕였다.
[윤서] “그래서 더 좋아.”
동현이 눈을 크게 떴다.
[동현] “뭐가 좋아?”
윤서는 화면을 보지 않았다.
동현의 얼굴을 봤다.
[윤서] “기자회견은 ‘끝’이 아니야.”
[윤서] “신호탄이지.”
[윤서] “사람들 머릿속에 그 이름과 이미지를 공식적으로 박아 주는 거야.”
동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다시 숫자를 봤다.
조회가 또 뛰었다.
방금 전보다 더 큰 폭으로.
동현의 손끝이 빨라졌다.
처음엔 조심하던 손이, 이제는 확신을 가진 손이 됐다.
[동현] “누나… 와, 대박. 이거 진짜 먹히네.”
윤서는 팔짱을 푼 적이 없었다.
그 자세 그대로, 아주 낮게 말했다.
[윤서] “사람은 사실을 찾지 않아.”
[윤서] “자기 감정을 정당화할 ‘장면’을 찾지.”
동현은 잠깐 멈췄다가, 조용히 웃었다.
웃음이 아니라—흥분이었다.
[동현] “그럼… 더 갈까?”
윤서는 대답 대신 동현 뒤에서 화면을 내려다봤다.
숫자가 뛰는 리듬이 보였다.
사람들이 물리는 타이밍이 보였다.
윤서는 딱 한마디만 했다.
[윤서] “그래, 여기서부터는 과감하게 가 보는 거야.”
동현은 숨을 들이마셨다.
손이 다시 움직였다.
그때, 윤서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모르는 번호.
짧은 문자.
“기자회견… 봤습니까?”
한국에 심어 놓은 그림자 이도윤 기자였다.
이도윤의 복수심은 오래전부터 고윤아를 향해 날이 서 있었다.
그는 시상식 직후, 윤아가 파놓은 함정에 빠져 한순간에 퇴출당했던 인물이었다.
이도윤은 퇴출당한 뒤 한동안 흔적을 감췄다.
연락도, 기사도, 이름도—모두 사라졌다.
그러다 최근, 운 좋게도 다시 기자로 돌아왔다.
정확히는 ‘복귀’가 아니라, 틈을 비집고 들어온 재등장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도윤 기자는 ‘취재’가 아니라 제작으로 움직였다.
다인이를 고립시킬 만한 영상과 사진을 먼저 확보해 윤서에게 보냈고,
윤서는 그걸 그대로 동현에게 넘겼다.
동현이 손을 대면, 재료는 ‘결정타’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 합성본은 다시 기자에게 돌아갔다.
기자는 기다렸다는 듯 유포했고,
동시에 기사를 썼다.
유포는 불을 붙이고,
기사는 그 불에 공식 딱지를 붙였다.
더 교활한 건 그다음이었다.
그는 자기가 만든 증거를 들고,
마치 중립인 척 ‘검증’ 코너를 열었다.
“전문가에게 물었습니다.”
“원본 여부를 분석했습니다.”
“팩트체크 결과—”
결론은 늘 같은 방향이었다.
다인이가 어디로도 빠져나갈 수 없게,
사람들 머릿속에 **‘그 이름’**이 고정되게.
윤서는 화면을 끄며, 아주 작게 웃었다.
“이제 사람들은—우리가 안 밀어도, 알아서 밑게 돼 있어.”
그리고 다시 팔짱을 꼈다.
동현의 키보드 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그 소리는 점점 일정해졌다.
마치 기계처럼.
윤서는 그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고다인은 이제 혼자일 거다.
사람들은 반으로 갈라졌고,
반은 이미 “장면”을 믿었다.
그리고 그다음은—
윤서는 입꼬리를 아주 조금 올렸다.
선율이 움직일 차례다.
—다음: 20장-1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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