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시작이야”

— 18장 (1~4부 통합) —

by 스팅비 StinGBee

커버 최종최종.png

— 1부 | “이제 시작이야”

(When I Hold You in My Arms — EP18-1)

협력자 하나는 묻혔고—

...

소리가 돌아왔다.

텍사스의 밤은 박수도 플래시도 없었다.

대신, 에어컨이 아주 낮게 울고 있었다.

윤서는 숨을 들이마신 채, 침대 위에 꺼내 놓았던 상자를 내려다봤다.


뚜껑은 이미 반쯤 열려 있었다.

상자 안, 맨 밑에 얇은 사진 한 장.

윤서는 그 사진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화면’이던 과거가, 종이의 질감으로 바뀌었다.

윤서는 손에 들린 오래된 사진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사진 속 아이는—어렸을 때의 윤서였다.

뭘 믿어도 괜찮고, 누가 웃어 주면 그게 전부인 줄 알던 얼굴.


아직 ‘세상은 사람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 모르는 눈빛.

윤서는 그 눈빛이 너무 순해서, 숨이 잠깐 막혔다.

울컥 올라오는 감정은 억지로 눌렀다.
대신 마음 한구석이 차갑게 굳어갔다.


감정이 폭발하는 게 아니라,

결심이 서서히 굳는 느낌이었다.

윤서는 사진을 다시 상자에 넣고 뚜껑을 덮었다.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그 떨림을, 윤서는 스스로 보지 못한 척했다.

그리고 아주 낮게 말했다.


561a7f84-d304-46f4-a074-6045cf42b95a.png


“이제 시작이야.”


그 한마디로 윤서의 복수는 ‘생각’에서 ‘계획’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 계획의 중심에는—선율이 있었다.

윤서는 선율을 끌어들이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원하든, 싫어하든. 끌려 들어올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윤서는 컴퓨터를 켰다.

부팅 소리가 들리는 사이,

머릿속은 이미 다음 단계로 가 있었다.

예전—잘 나가던 시절, 여러 매니저들 중에서도 실무를 거의 대신해 주던

“친동생처럼 지냈던 동현”이가 이 다음 단계처럼 떠올랐다.


스케줄, 연락, 기사 대응, 일정 조율.

그때는 늘 옆에 사람이 있었다.

지금은… 옆이 비어 있다.

페이스북 검색창에 이름을 쳤다.


프로필이 뜨는 데 3초도 안 걸렸다.
새로 올린 사진들, 가벼운 근황, “잘 지내?” 같은 댓글들.

윤서는 잠깐 멈췄다가, 메시지 버튼을 눌렀다.

길게 쓰면 흔들릴까 봐 길게 쓰지 않았다.


“동현아 나… 윤서야. 시간 되면 바로 답장해 줘.”


전송.

딱 그 순간, 윤서는 숨을 한 번 들이마셨다.

이제부터는 사람을 설득하는 게 아니라—

사람을 움직이게 만들어야 했다.

윤서는 바로 검색창으로 손을 옮겼다.

이번엔 사람 말고, AI.


유튜브를 켰다.
“AI 사칭”,

“보이스 클로닝”,

“딥페이크”,

“얼굴 합성”,

“영상 생성”,

“음성 복제”,

“신분 도용”,

“피해자 심리”


키워드가 화면 위에 쌓였다.

윤서는 영상 하나를 누르고, 배속을 올리고,

중요한 부분만 멈춰서 다시 보고, 메모했다.

메모장에는 문장 대신 단어들만 남았다.

“신뢰 만들기”

“권위 빌리기(변호사/경찰/기관)”

“시간 압박”

“보존/증거/긴급”

“피해자 고립”


영상 속 사람들은 “편리함”을 말했다.
윤서 귀에는 “무너뜨리는 법”으로 들렸다.


‘그러니까… 사람을 직접 건드리지 않고도, 한 인생쯤은 무너뜨릴 수 있다는 거네.’


윤서의 눈빛이 조금 더 어두워졌다.
그리고 더 단단해졌다.

윤서는 모니터 불빛을 끄지 않았다.

영상은 계속 돌아갔다.


사람 목소리가 “편리함”을 말하고,

화면은 “누구나 할 수 있다”를 반복했다.

그 말이, 윤서에겐 다르게 들렸다.


“지금은… 한 번의 클릭으로도, 언제든 어디서든 누군가를 무너뜨릴 수 있다.”


윤서는 창을 닫았다.

그리고 메신저를 열었다.

방금 보낸 메시지—읽음 표시도 없었다.

답이 올지 안 올지 모르는 시간.

그 불확실함이 오히려 마음을 단단하게 했다.

윤서는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가 내렸다.


딱 그 순간, 스스로에게 묻는 말이 떠올랐다.


‘그럼 선율이를… 어떤 방식으로 다시 만나게 만들까?’


그 답은 예상보다 빨리 다가오고 있었다.

장면이 신선율 쪽으로 옮겨간다.

선율은 그날도 지쳐 있었다.

단순히 피곤한 게 아니라,

하루가 끝나도 회복이 안 되는 피로였다.


퇴근은 퇴근이 아니었다.
현장 나갔다가 들어오면 보고서가 남고,

보고서 끝내면 또 전화가 오고,
주말엔 교육이나 행정 처리,

가끔은 가벼운 법원 일정까지 끼었다.


몸이 집에 와도 머리는 계속 근무 중이었다.

그리고 집에는 또 하나의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개인 사업.

매출이 줄어드는 건 둘째 치고,

문제는 매달 정해진 돈이 빠져나갔다.

렌트, 전기, 보험, 카드 수수료, 직원 급여, 도매 거래처 결제.

“이번 달만 버티면”이 몇 달째였다.


선율이 숫자를 들여다보는 시간이 늘수록, 잠은 줄어들었다.

그날도 똑같았다.

거실 소파에 앉자마자 아내에게서 문자가 왔다.


“여보, 매장에 오더 잡아야 하는 거 있어요.
거래처에서 오늘 안 잡으면 다음 주로 밀린대요.”


선율은 답장을 치며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알았어. 조금 있다 갈게.”

“조금 있다가”는 그 순간엔 진심이었다.

하지만 “조금”은 늘 계획대로 안 됐다.

잠깐만 눈을 감았다.

진짜 잠깐만—


귀 안쪽에서 삐— 하는 소리가 났다.
처음엔 얇은 선 같던 소리가, 조금씩 굵어지더니 방 안의 모든 소리를 밀어냈다.

숨소리도, 시계 초침도, 생각도.

삐—
삐———


소리에 맞춰 머리 한쪽이 묵직하게 눌렸다.
몸이 아래로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선율은 눈을 뜨려 했지만, 눈꺼풀이 말을 안 들었다.
그게 졸음인지, 순간적으로 끊긴 건지 본인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소리만 남았다가


뚝...


숨 한 번 고르고 일어나서 움직이려고 했다.

휴대폰 진동에 눈을 떴을 때, 방 안의 공기가 달랐다.

창밖이 이미 어두웠다.

TV 화면에 떠 있는 시간은 저녁 8시 47분.


휴대폰 잠금 화면에는 알림이 겹쳐 있었다.

부재중 전화 3통

메시지 5개

“여보?” “어디예요?” “지금 오고 있어요?”

마지막 메시지: “그냥 됐어요.”


선율은 멍하게 침을 삼켰다.
몸이 먼저 죄책감으로 굳었다.

전화를 걸기도 전에, 아내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선율은 급히 받았다.


“여보…”


수화기 너머로 한숨이 먼저 들렸다.
한숨이 먼저 나온다는 건, 이미 마음이 꺾였다는 뜻이었다.


“아니… 여보. 여태 뭐 하고 있는 거예요?”
“필요한 거 많다고 했잖아요. 오더도, 카드 결제도, 재고 정리도요.”
“거래처에서 오늘 안 잡으면 다음 주로 밀린다니까요.”


선율은 눈을 비볐다.
말을 찾았지만, 입안에서 부서졌다.


“어… 내가… 깜빡 잠들었어. 미안. 피곤했나 봐.”


잠깐 정적.
그 정적이 길어질수록, 선율의 속이 서늘해졌다.

아내는 낮게 말했다.


“… 진짜, 요즘은 점점 더 심해져요.”


그리고 전화가 뚝 끊겼다.

선율은 휴대폰을 들고 한참 그대로 있었다.

화면은 꺼졌는데도 손이 내려오지 않았다.

그날 밤, 아내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표정이 굳어 있었다.


4f00f83e-c0f6-41ea-9071-b92174586b72.png

아내도 지쳐 있었다.
누적된 피로, 누적된 스트레스.

그게 얼굴에 그대로 찍혀 있었다.

아내는 가방을 내려놓고, 신발을 벗는 손마저 거칠었다.


선율은 “미안해”를 먼저 꺼내려했지만,

타이밍을 놓쳤다.

아내는 이미 마음속에서 몇 번이고

연습했던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여보… 투잡 뛰느라 힘든 거 알아요.”

“근데… 나도 지쳐요. 나도 버겁다고요.”

아내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나도 힘들어요. 더 이상 못 버티겠어요.”

“요즘 당신, 경찰 일 바쁘다는

이유로 집에 없는 날이 더 많고…”


“집에 있어도… 당신은 멍해요.

내 말이 들어오는지 안 들어오는지도 모르겠고.”


선율은 고개를 들었지만 눈이 초점을 못 잡았다.
머릿속에는 ‘미안하다’만 가득한데, 입이 안 열렸다.

아내는 숨을 들이마시고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돈.”

“이번 달 카드값이랑 렌트, 거래처 결제…

내가 다 계산해요.”

“나는 매일 숫자 보면서 불안해요.

근데 당신은…”

“당신도 힘든 건 알겠는데,

우리 이렇게 같이 무너지는 게 맞아요?”


그 말이 현실이었다.
사랑만으로 싸우는 게 아니라,

돈과 시간과 불안이 같이 터지는 순간이었다.

아내는 눈가를 훔치며, 마지막을 박았다.


“우리… 우리가 같이 잔 게 언제인지 기억해요?”

“이게 부부예요?”


선율은 입을 열었다.
근데 나온 말은… 너무 약했다.


“… 미안해.”


그 한마디는 변명도 아니고 해결도 아니었다.
그냥 버티다 나온 소리였다.

아내는 선율을 보다가, 갑자기 차분해졌다.

그 차분함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

감정이 아니라 결론이었으니까.


“나… 캘리포니아 친정에 잠깐 있을게요.”

“잠깐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근데 솔직히… 나도 자신 없어요.”

“사업도… 더 끌고 가면 우리 둘 다 끝나요.”


선율은 뭔가 붙잡고 싶었다.
근데 붙잡을 말이 없었다.

‘바뀔 수 있다’는 확신이 없었으니까.

그는 겨우 한 문장을 꺼냈다.


“여보…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


아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문 닫히는 소리가,

그날 밤 선율에게는 판결처럼 들렸다.

그다음은 하루아침에 끝나지 않았다.

진짜 현실은, 천천히 망가지고 있었다.


몇 주는 각자 버텼고,

몇 달은 “잠깐만 더”로 넘겼다.

재고를 줄이려고 세일을 걸고,

거래처 결제를 쪼개고,

임대인에게 연락해 납부일을 미루는 얘기도 했다.


선율은 쉬는 날마다 매장에 갔다.
박스 테이프를 붙이고,

가격표를 떼고, 남은 재고를 정리하고,

“이 물건이 이렇게 남아 있을 줄 몰랐다”는

생각을 수십 번 했다.


그 과정에서 선율은 알게 됐다.

사업을 접는 건 결심의 문제가 아니라,

절차의 지옥이라는 걸.

정리해야 할 게 너무 많았고,

끝내야 할 연락이 너무 많았다.

그러다 보니 더 조용히 무너졌다.

결국 사업은 처분했다.


‘정리’라는 말로는 부족했고,

‘포기’라는 말로도 부족했다.
그냥… 더 이상 유지할 힘이 없었다.

아내는 끝내 친정으로 갔다.

“잠깐”이라고 했지만,

돌아오는 날짜는 말하지 않았다.


0f7a586d-b095-4cd4-9bdf-680f074124f4.png

혼자 남은 집은 고요했다.

냉장고 모터 소리, 시계 초침, 방 안의 공기.

사람이 없는 집에서만 들리는 소리들이 더 크게 울렸다.

선율은 어느 순간부터 불을 잘 안 켰다.

집이 밝아지면 더 적막해 보여서.

소파에 앉아 천장을 바라보다가,

선율은 아주 낮게 혼잣말했다.


“… 내가 지금 뭘 지키고 있는 거지?”


그때 선율은 아직 몰랐다.
자기 삶이 무너진 틈으로,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들어오려 한다는 것을.

윤서의 “이제 시작이야”는—

곧 선율의 텅 빈 듯한 조용한 집 안으로 도착할 현실적인 소리였다.


— 2부 | 금 가는 소리

(When I Hold You in My Arms — EP18-2)

며칠 뒤, 늦은 저녁.

윤서는 결국 집 밖으로 나왔다. 목적은 없었다.

사람 많은 곳은 피하고 싶었지만,

완전히 혼자 있으면 더 흔들릴 것 같았다.


그녀가 들어간 곳은 한국 식당이었다.

국물 냄새와 불판 냄새, 젓가락 소리.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잠깐이라도

“최윤서”가 아닌 척할 수 있었다.


34ca884c-5215-4a49-9530-75e45806c02d.png

윤서는 자리를 찾다가 멈췄다.

넓직한 테이블.
혼자 앉아 밥을 먹는 남자 하나.

선율이었다.

휴대폰은 테이블 위에 엎어져 있었다.

기다리는 사람의 자세가 아니었다.

연락이 오지 않는 게 익숙한 사람의 자세였다.

시선은 음식이 아니라, 물컵에만 멍하니 가 있었다.


윤서는 그 얼굴을 잠깐 바라봤다.

피곤해 보였다.
아니,
피곤하다는 말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쪽에 더 가까웠다.

사람이 지쳐서 비어 버리면
눈부터 달라진다.

지금 선율의 눈이 그랬다.


윤서는 그가 자기를 알아보는지 확인하지 않고,

먼저 말을 꺼냈다. 너무 가볍게. 너무 자연스럽게.

“어… 안녕하세요. 신 경사님, 여기서 뵙네요.”


선율이 고개를 들었다.

놀람이 스쳤다가, 곧 ‘아’ 하는 표정.

“네?… 아… 최윤서 씨…?”


두 달 전 사건.

AI로 둔갑한 ‘최윤서 사칭’ 투자사기—

선율이 단번에 알아본 건 당연했다.

그 사건은 오래 전이 아니었고,

더 현실적인 이유는 아직도 완전히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선율은 여전히 담당자였다. 보고서도, 추가 피해도,

“비슷한 제보”도 계속 붙었다.

게다가 윤서는 모자를 눌러 썼지만,

얼굴선과 분위기는 숨길 수 없었다.


선율이 시선을 잠깐 피한 것도,

무관심이 아니라 직업적인 예의였다.

선율이 습관처럼 말했다.

“여기는… 어떻게… 식사하러 오셨나 봐요.”


혼자 온 건 뻔했다.

그런데도 선율은 굳이 말로 확인했다.

그게 선율의 방식이었다.

윤서는 아주 짧게 미소를 띠었다.


“…네. 오늘은 집에 혼자 있는 것도 그렇고…

혼자 뭐 해 먹는 것도 좀 귀찮아서요.

그냥 나와 봤어요.”

윤서는 사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대신 단순하게만 던졌다.

“그럼… 혹시 일행 없으면, 합석해도 돼요?”


선율이 젓가락을 멈췄다.

잠깐.
정말 잠깐.

윤서의 표정엔 과한 표정도, 급한 기색도 없었다.
그저 가볍게 묻는 사람처럼 보였다.

“아…”


선율은 한 번 더 윤서를 봤다.

“…네. 괜찮아요.”

윤서는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 의자를 빼 앉았다.

“고마워요.”

“그때… 경사님 많이 고생하셨죠.”


선율이 숨을 한 번 내쉬었다.

“네, 대부분 그런 사건이… 생각보다…

되게 복잡합니다. 피해자도 계속 나오고요.”


윤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끝난 사건이 아니라는 것—

선율이 아직 그 안에 있다는 것.

그걸 확인하는 데 이 정도면 충분했다.


윤서는 말투를 낮췄다.

“요즘 괜찮으세요? 얼굴이… 많이 피곤해 보여서요.”

“괜찮습니다. 그냥… 일이 좀 겹쳐서요.”


더 묻지 않았다.

피곤한 형사는 아주 작은 의도에도 경계를 세운다.

윤서는 그걸 안다.

윤서는 메뉴판을 펼쳤다.

가장 자연스러운 방패였다.


선율이 먼저 물었다.

“뭐 드실래요? 혼자 오셨으니까…

원래는 간단히 드실 생각이셨죠?”


“네. 따뜻한 거요. 국물 있는 거.”


선율이 웨이트리스를 불렀다.

“저기요, 여기 주문할게요.

저는 순두부찌개로 하고요.

윤서 씨는 설렁탕 괜찮으세요? 아니면 김치찌개?”


윤서는 한 박자 고민하는 척했다.

“설렁탕이요. 오늘은…

좀 깔끔하게 먹고 싶어요.”


“네. 그럼 순두부찌개 하나, 설렁탕 하나.

공깃밥 두 개요. 물도 좀 더 주세요.”


잠깐 뒤, 음식이 나왔다.

뚝배기에서는 김이 올랐고, 설렁탕 국물은 맑았다.

반찬 접시가 가운데에 놓였다.


“뜨거우니까 조심하세요.”


“네.”


둘은 한동안 밥을 먹었다.

말이 없는 시간이 길어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윤서가 소음 사이로 가볍게 물었다.

“신경사님은… 이렇게 혼자 드시는 날이 많으세요?”


선율은 잠깐 멈칫하고, 짧게 말했다.

“… 네, 가끔요.”


윤서는 ‘왜요’라고 묻지 않았다.

대신 자기 얘기로 한 칸만 다가갔다.

“저는 오늘… 집에 혼자 있는 게 좀 버겁더라고요.”


그 말에 선율은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대답은 없었지만, 윤서는 그 침묵을 읽었다.

비슷하다. 집이 조용하다.

몇 숟갈쯤 더 지나서,

선율이 형사다운 질문을 했다.

“윤서 씨는… 요즘은 좀 어떠세요?

그 일을 겪고 나면 한동안 정신없으셨을 텐데.”


선율은 잠깐 말을 고르다가, 목소리를 한 톤 낮췄다.

“그리고… 혹시 또, 이상한 데서 연락 받은 거 있으세요?

모르는 번호나, 수상한 문자·이메일 같은 거요.”


윤서는 준비된 말과 진짜 감정을 섞었다.

"아니요, 그런 건 없는데… 그냥—

조금 화가 나고 사람 만나는 게 싫어졌어요.”


윤서는 말끝을 삼키듯 멈췄다.

눈을 피하지는 않았는데,

시선이 선율을 통과해 어디 먼 데를 보고 있었다.

“제가 뭘 해명할 틈도 없이,

“세상은 내가 말할 틈도 없이, 보이는 대로 이미 결론 내린 것 같아요.”


잠깐의 정적.

선율은 고개를 아주 작게 끄덕였다.

그게 이해라는 말이 아니라,

지금은 더 캐묻지 않겠다는 표시였다.

선율이 담담히 말했다.

“네, 이해합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윤서는 수저를 내려놓지 않은 채,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다.

“형사님은… 정말 괜찮으세요? 진짜로요.”

선율은 숟가락을 잠깐 멈췄다가, 짧게 답했다.

“…네? 뭐가요?”
그 질문을 일 쪽으로 받아들인 듯, 그는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이젠 좀 익숙해져서요.”


윤서는 그 말이 끝나자마자, 선율의 손끝을 한 번 봤다.
숟가락이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아… 이건 일 얘기가 아닌데.”

윤서는 속으로 조용히 결론을 내렸다.

“분명 집이다.”


선율의 시선이 잠깐 허공을 스쳤고, 호흡이 어긋났다.
방금의 대답은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익숙해졌다고 말할 때의 그 ‘익숙함’—대개 집에서 먼저 시작된다.

윤서는 그 결을 알아챘다.


불편한 공기가 어디로 흘러가는지도, 이제는 너무 분명했다.

그래서 윤서는 ‘가족’이라는 단어를 꺼내지 않았다.
그 단어는 사람을 닫게 만든다.
대신, 질문의 방향을 아주 조금 틀었다.

“한국 소식은… 가끔 보세요?

저는 요즘은 잘 모르겠더라고요.”


선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사실… 예전만큼은 아니에요.

예전엔 인터넷으로 대충 메이저급 연예인들은

얼굴이 익었는데, 제가 직접 관심 갖고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더라고요.”


윤서는 그 타이밍에 자연스럽게 끼워 넣었다.

“저… 신경사님, 사실 제가 한국에 아는 친구가 하나 있는데요.

예전에 같이 일하던 친구예요.

그 친구도 배우고요.”


“근데 그 친구 딸이 요즘 한국에서

좀 뜨는 신인 여배우래요.

작품도 계속 하고 있고,

기사도 자주 나고…

주변에서 그 얘기를 자꾸 하더라고요.”


선율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정도로 유명하면…

사진 보면 알 수도 있겠네요.”


윤서는 아주 살짝 웃었다.

너무 티 나지 않게.

“맞아요. 다음에…

제가 시간 되면 사진 한 번 보여 드릴게요.

그 친구 얘기도, 그때 좀 더 자세히요.”


선율이는 짧게 대답했다.

“네.”

그 한 글자가 윤서에게는 충분했다.

다음 만남의 이유가 생겼다.

둘은 밥을 다 먹었다.

그릇의 김이 잦아들고, 말도 잦아들었다.


그때 식당 TV에서 뉴스 속보가 나오기 시작했다.

식당 TV는 원래 소리도 작았다.

점심 뉴스가 흘러나와도,

사람들은 대충 고개만 돌리고 다시 젓가락을 움직였다.


윤서와 선율도 그랬다.
대화는 적당히 끊기고, 물잔이 비어 가고,

계산은 아직 멀었다.

그런데 화면 하단 자막이 갑자기 빨개졌다.

[속보] 다기관 추격… 현직 모범 경사, 타 카운티 수배중


식당.png

선율의 손이 멈췄다.
젓가락 끝이 공중에서 그대로 굳었다.

화면 속 남자는—선율이 알던 얼굴이었다.

동료들 사이에서 “본보기”로 불리던 사람.


지역사회에서 칭찬받던 사람.
두 딸 이야기만 하면 표정이 풀리던—그 모범경사.

경광등이 화면을 씻어내듯 번쩍였다.

몇 초 전까지 존경이었던 얼굴이,

지금은 ‘추격 대상’으로 흔들렸다.

선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하는 순간, 설마 이게 “사실”이 되어 버릴 것 같아서였다.


같은 시각.

경찰서 안, 휴게실 TV도 늘 켜져 있었다.

대부분은 보지도 않았다.
뉴스는 배경 소음이고, 커피 머신이 더 중요했다.

그런데 오늘은—사람들이 먼저 모였다.

누군가 휴대폰을 들고 들어왔다.


“야, 이거 봐. 지금 속보 떴어.”

처음엔 다들 “또 뭐야” 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화면이 바뀌는 순간, 표정이 한 번에 굳었다.


[속보] 다기관 추격… 현직 모범 경사…

“What the f—k… No f—king way!”

(자막: 뭐야… 씨—, 말도 안 돼!)


누군가 거의 자동으로 말했다.

다른 누군가는 리모컨을 잡고

소리를 키웠다가, 다시 줄였다.

소리가 커지면, 이게 진짜가 되는 것 같아서.

복도 끝에서 누가 크게 웃는 소리를 냈다.

웃음이 아니라—당황해서 터진 소리였다.


“설마 우리가 아는 그 사람 맞아?”

“그럴 리가 없어. 우리서 모범 경사잖아—”


마지막 말이 끝까지 안 나왔다.
대신 욕설이 나왔고,

누군가는 주먹으로 책상을 한 번 쳤다.

커피가 컵 안에서 흔들렸다.

현장 뛰던 경찰관 하나는

무전기를 손에 든 채로 얼어 있었다.


원래라면 “어느 카운티냐” “누가 리드냐”

같은 질문이 튀어나와야 했다.

그런데 아무도 묻지 않았다.

묻는 순간, 참여자가 되는 느낌이 들었으니까.


TV 속 화면에는 익숙한 패치,

익숙한 추적당하고 있는 차 색,

익숙한 체격의 사람이 스쳤다.

희미하게 보이는 옆얼굴 하나에—

휴게실 공기가 꺼졌다.


“저 경사… 우리 행사 때, 애들한테

헬멧 씌워 주고 사진 찍어 주던 사람인데…”

누군가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말이 끝나자마자, 다른 누군가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니야!. 아니라고!.”


목소리가 커졌다.
그 커진 목소리가,

오히려 본인이 제일 믿지 못한다는 증거 같았다.

그때 프런트에서 누가 소리쳤다.

“감찰 쪽에서 전화 왔대!

기자들 연락 오기 시작했대!”


휴게실 안이 더 조용해졌다.

누구도 화면에서 눈을 못 떼고,
누구도 서로 얼굴을 못 봤다.

한 사람의 이름이, 한 번에 ‘사건’이 되는 걸

다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같은 시간 식당에서는
윤서가 여전히 조용했다.

조용한데—사람을 찔렀다.

윤서가 거의 속삭이듯 말했다.

“봐요.”

“저도요.
한때는… 제가 쌓아 올린 게 단단한 줄 알았거든요.”

윤서는 웃지도 않은 채, 시선을 접시에 내렸다.

“근데요.”

“아무리 힘들게 쌓은 거라도…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더라고요.”


선율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는 순간, 윤서가 “맞다”는

증거를 갖게 될 것 같아서.

나는 절대… 저렇게 되지 않는다.

선율의 확신은 여전히 단단한 척했다.

하지만 그 단단함이—어디서부터 갈라지는지,
윤서는 이미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선율은 계속 흘러나오는 속보를 보며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왜…?

저 사람이 왜… 도망을 쳐?


목구멍 안쪽이 마른 느낌이 들었지만,

선율은 물을 마시지 않았다.

눈을 떼지 못했다.

윤서는 TV를 보다가,

아주 천천히 선율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저 사람이 왜… 도망을 치죠?”


선율의 눈이 화면에 고정됐다.

경찰차가 늘어섰고

헬기 화면이 붙었다.

불빛이 도시를 긁고 지나갔다.


윤서는 놀란 얼굴이 아니었다.
그냥… 확인하는 얼굴이었다.

윤서는 물컵을 내려놓았다.

유리가 닿는 소리가 이상하게 크게 들렸다.

“놀랐죠.”


선율은 그제야 숨을 내쉬었다.
짧게. 들키지 않게.

윤서는 선율의 반응을 기다리지 않았다.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듯, 말을 이어갔다.

“사람은요… 겉으로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닐 때가 많아요.

다들 자기 안에 숨긴 게 있더라고요.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요.”


선율은 고개를 돌려 윤서를 보지 않았다.

TV 화면을 보고 있으면서도,

머릿속은 이미 계산을 시작했다.

오보일 수도 있다.

동명이인일 수도 있다.


윤서는 컵을,

선율 쪽으로

한 번 더 당겨 주며.

그리고 말했다.

“신 경사님도…”

“선택하실 수 있어요.”


선율이가 윤서를 봤다.

윤서의 눈은

부드러웠다.

하지만 그 부드러움은 위로가 아니라

손잡이 같았다.

잡으면 끌려갈 손잡이.


윤서가 덧붙였다.

“통제할 수 있는 쪽으로요.”

“신 경사님이 무너지기 전에 말이에요.”

“지금 신 경사님을 보고 있자니… 좀 걱정돼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그 말이 칭찬처럼 들려서, 선율은 더 불편해졌다.
불편함의 정체가 뭔지 설명할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윤서는 지금, 선율이 무엇을 믿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어디서부터 금이 가는지도.

TV 화면이 한 번 더 번쩍였다.

추격 차량이 교차로를 가로질렀다.

선율은 그 장면을 보면서, 속으로만 말했다.


나는 절대… 저렇게 되지 않는다.

그 확신이 떠오르는 순간,

윤서는 아주 작게 웃었다.

마치 그 말이—가장 좋은 시작점이라는 듯이.


선율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계산은 제가 할게요.”

“아니에요, 경사님. 제가—”

“괜찮습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윤서는 더 붙잡지 않았다.

“…네. 감사합니다. 덕분에 식사 잘 먹었습니다.”


선율이 계산대로 향했고,

윤서도 가방을 챙기며 천천히 일어났다.

잠깐 뒤 선율이 돌아왔고,

둘은 거의 동시에 출입문 쪽으로 걸었다.


문 앞에서 윤서는 마지막만 남겼다.

무겁지 않게, 하지만 오래 남게.

“그때… 진짜로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선율이 짧게 답했다.

“별말씀을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윤서는 고개를 숙였다.

“경사님도요. 그리고… 다음에, 제 친구 윤아랑 친구 딸 얘기 좀 더 할게요.”


“네. 시간 되면요.”


문이 열리고 차가운 공기가 스쳤다.

윤서는 모자를 더 눌러 쓰고 밖으로 나서며, 속으로 다시 말했다.


‘이제 진짜 시작이야.’


이번엔 말이 아니었다.
조용히, 일이 시작되는 소리였다.


— 3부 | 균열이 시작되는 소리

(When I Hold You in My Arms — EP18-3)

경찰서로 돌아오자마자, 선율이는 이상한 분위기를 알아챘다.
평소처럼 시끄럽게 돌아가야 할 공간인데, 그날은 유난히 조용했다.

사람들은 서로 마주쳐도 말을 길게 하지 않았다.
필요한 말만 짧게 주고받고, 그마저도 낮은 목소리였다.


마치 누가 먼저 그 말을 꺼내는 순간, 공기 속에 떠 있던 의심이 형태를 갖추고 현실로

내려앉을 것만 같아서 다들 입을 아꼈다.

하지만 말은 아끼는 만큼 더 커졌다.
복도 끝에서, 주차장에서, 서류 더미 사이에서—조각조각 새어 나왔다.


선율은 그 조각들을 주워 담지 않으려 했다.
확인할 때만 확인하고, 나머지는 흘려보내는 법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게 경찰이 된 뒤로 몸에 붙은 습관이었다.

휴게실 TV는 늘 켜져 있었다.

대부분은 보지도 않았다.
뉴스는 배경 소음이고, 커피 머신이 더 중요했다.


그런데 오늘은—사람들이 먼저 모였다.
처음부터 모여 있었다.

화면이 바뀌자, 자막이 길게 달렸다.

빨간 띠가 화면 아래를 꽉 채웠다.


c9ab7020-34fe-40dc-bbe7-edebc0bdc727.png

[속보] ‘모범 경사’ 혐의 공개…

아동·청소년 성착취·인신매매 연루 정황.

수사 급진전… 외부 기관 공조, 핵심 진술 확보.


누군가 컵을 내려놓다가 손을 놓쳤다.

플라스틱 컵이 바닥에서 한 번 튀었다.


“뭐…?”


질문이 아니었다.
발성에 가까운 소리였다.

누군가는 화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자막의 단어 하나하나를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아니야… 저건… 아니야.”

“내가 아는 그 경사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야!”

“그 사람은—”


말이 끝까지 안 나왔다.
끝내지 못하는 이유가, 너무 많았다.

시민 행사에서 아이들한테 웃어 주던 얼굴.

부하들을 교육할 때 말하던 목소리.


30년 넘은 경력의 베테랑.
그런데도 늘 단정했고, 늘 모범이었던 경찰관.

아내와 두 딸의 사진을 지갑에 넣고 다니던 손.

그 모든 게 자막 한 줄에 눌려 죽었다.


누군가 욕설을 뱉었다.
누군가는 벽을 한 번 쳤다.
누군가는 그냥, 소리 없이 웃었다.


웃음이 아니라—

머리가 따라가지 못할 때 나오는 반사였다.

프런트 쪽에서 다시 소리가 났다.


“기자들 또 물고 들어왔어! 이름 확인해 달래!”
“감찰 쪽에서 전 직원 공지 올린대!”


단체 메일이 발송됐다. 뉴스보다 먼저 공지가 떴다.
짧았고, 건조했다.

늘 보던 형식이었다.
메일을 열면 먼저 뜨는 건, 유지와 외부 유출 금지 경고문이었다.

CONFIDENTIAL – Law Enforcement Sensitive. Unauthorized disclosure prohibited. If misdirected, delete immediately.
(자막: 기밀 – 법집행 민감 정보. 외부 유출 금지. 수신 대상이 아니면 즉시 삭제.)


그 아래로, 언론 보도보다 먼저 내부 공지가 내려왔다.
길지 않았다. 건조했다.

브리핑된 사건 요약은 이랬다.

—외부 기관 공조 진행
—다수 피해자 진술 확보
—증인 보호 조치 및 긴급 절차 진행
—대치 상황 발생


그리고 아래에는, 늘 그렇듯 추가 지시가 붙어 있었다.

대충 상황만 공유하고, 나머지는 입 닫으라는 식의 문장들.

—본 건 관련 정보 외부 공유 금지(구두·문자·이메일·SNS 포함)
—언론 문의 및 인터뷰 요청 개별 응답 금지
—모든 미디어 대응은 PIO(Public Information Office) / Public Affairs 경유
—지휘부 승인 없이 확인·부인·배경설명·비공식 코멘트 금지
—문의 수신 시 즉시 상급자 및 PIO 통보
—위반 시 내부 규정에 따른 조치 가능


한 줄로 요약하면 그거였다.
밖에선 아직 “속보”도 안 떴는데, 안에서는 이미 말하는 방식부터 통제되고 있었다.

요지는 분명했다.
언론 보도 전까지는, 누구도 이 사건에 대해 입을 열지 말 것.


마지막 줄에서, 휴게실 공기가 한 번 꺼졌다.

누구도 ‘어떻게’는 묻지 않았다.
묻는 순간, 더 많은 것이 떠오를까 봐였는지 모른다.

그리고 한 박자 늦게, 벽걸이 TV 화면이 속보로 갈아탔다.

화면 아래 자막이 먼저 튀어나왔다.


[속보] ‘모범 경사’… 타 카운티서 무장 대치 끝내 사망

[속보] 협상팀 설득 중 총성… 현장 통제 유지


앵커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고 빠르게 흘렀다.

“방금 들어온 속보입니다. 지역사회봉사로 표창을 받았던 모범 경찰관이 오늘 오후 타 카운티에서 무장 대치 끝에 숨졌습니다. 현장에는 해당 카운티 경찰 협상팀이 투입돼 대화를 시도하던 중이었습니다.”


화면은 헬기에서 내려다본 도로였다.
순찰차들과 무장된 장갑차가 반원처럼 둘러서 있고, 멀리 스파이크 스트립과 차단선이 길을 막고 있었다. 붉고 파란 경광등이 규칙 없이 번쩍였다.


기자가 현장 연결로 넘어갔다.

“네, 저는 지금 현장 인근입니다. 경찰은 당사자가 OOO 카운티 OO경찰서 소속 현직 OOO경사라고 밝혔습니다. 현재 차량 주위로는 접근이 통제돼 있고, 협상팀이 바로 앞에서 대화를 시도하며 설득을 이어가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방금, 협상 도중 총성이 한 발 들렸고…”


기자의 말이 잠깐 끊겼다. 뒤에서 누군가 무전기를 쥐고 뛰는 모습이 프레임을 스쳤다.

“…당사자는 스스로 권총을 발사한 것으로 보이며, 현장에서 사망이 확인됐다고 경찰은 밝혔습니다. 현재 정확한 경위는 조사 중이고, 추가 피해자는 없는 것으로 지금까지 밝혀졌습니다”


그다음 자막이 바뀌었다.

[자막] “추가 피해 없음”… 정확한 경위 수사 중

[자막] 경찰 내부·외부 합동 조사 착수


휴게실 안에서는 누가 리모컨을 들고 있는지도 모르게 됐다.
TV 소리만 커진 게 아니라, 사람들의 숨소리까지 그쪽으로 쏠렸다.

아까 단체방 공지에 있던 “대치 상황”이라는 두 글자가,
이제는 화면 속 경광등과 총성으로 실체를 얻고 있었다.


선율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나는 절대… 저렇게 되지 않는다.

며칠 전, 자신이 속으로 했던 그 확신이 다시 떠올랐다.


그런데 오늘은—그 확신이

“안전”이 아니라 “변명”처럼 들렸다.

그리고 그 순간, 선율은 깨달았다.

사람이 무너지는 건 ‘한 번’이 아니라

‘조금씩’이라는 걸.


그날 밤, 선율의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 이름이 떴다. 최윤서.

선율은 받지 않으려다—받았다.

받는 순간, 이미 늦는다는 걸 알면서도 핸드폰 버튼을 눌렀다.


e9fb8452-d96d-4ffc-b817-a312f839ce27.png

“신 경사님.”


윤서였다.
목소리는 낮았고, 너무 자연스러웠다.

마치 어젯저녁 식당에서 이어지던 대화가
중간에 끊긴 적조차 없었다는 듯, 말을 이었다.


선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윤서는 그 침묵을 기다렸다.

기다리는 방식이… 능숙했다.

윤서는 그 침묵을 건드리지 않고,

먼저 말을 꺼냈다.


“오늘… 뉴스 보셨죠.”


선율의 손가락이 폰을 더 세게 눌렀다.
윤서는 들을 수 없는 압력인데,

선율은 그걸로라도 버티고 싶었다.


윤서였다.
목소리는 낮았고, 너무 자연스러웠다.

마치 어젯저녁 식당에서 이어지던 대화가
중간에 끊긴 적조차 없었다는 듯, 말을 이어갔다.


윤서는 마치 망설이다가 전화한 사람처럼 조용히 말했다.

“신 경사님… 이런 때 전화드리는 거 실례일 수도 있는데,
뉴스 보고 그냥 못 지나치겠어서요.”

“괜찮으세요?”


선율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윤서는 그 침묵을 재촉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천천히, 위로하듯 말을 이었다.

“신 경사님은요…
제가 봤을 땐 참 좋은 경찰관이에요.”

“경찰도 사람이잖아요. 실수도 하고,
고통도 느끼고, 흔들릴 때도 있고요.”

“저런 일은… 일어나면 안 됐지만.”


윤서는 잠깐 숨을 고른 뒤, 아주 조용히 덧붙였다.

“신 경사님은—
그렇게 쉽게 무너질 분이 아니라고 믿어요.”

선율은 대답하지 못했다.

위로를 받아들이기엔 마음이 너무 딱딱했고,
거절하기엔 목소리가 너무 부드러웠다.


윤서는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남겼다.

“그러니까… 신 경사님이 선택하면 돼요.”

“어떤 경찰로 남을지.”


윤서는 마지막 말을 꺼내기 전에 잠깐 멈췄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정말 안부라도 확인하듯 물었다.

“지금… 혼자 계세요?”


선율은 대답이 한 박자 늦었다.
그 짧은 틈 사이로 윤서는 귀를 기울였다.
사람 목소리도, TV 소리도, 무전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숨소리와 정적만 남아 있었다.

“네.”


윤서는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목소리만 들으면 여전히 다정했다.

“다행이네요. 지금은… 혼자 계시는 게 나을 수도 있으니까.”

통화를 끊은 뒤, 윤서는 잠시 화면을 내려다봤다. 입꼬리가 아주 천천히 올라갔다.

‘맞아.

내 생각대로야.

선율이는 지금 혼자다.

지금 선율이 곁에는 아무도 없다.’


윤서는 바로 다시 말하지 않았다.
그 만족감을 숨기듯, 화면만 잠깐 내려다봤다.

지금은 더 밀어붙일 때가 아니었다.
위로한 사람처럼 물러나는 쪽이 더 오래 남는다.


그녀는 통화 기록을 한 번 쓸어 올려 확인한 뒤,
짧은 메시지 하나만 남겼다.

“오늘은 아무 말 안 하셔도 돼요.
잠깐이라도 쉬세요, 신 경사님.”

문장은 끝까지 다정했다.
그래서 더 안전해 보였다.


윤서는 휴대폰을 뒤집어 놓고, 침대 머리맡에 기대 앉았다.
눈빛은 조금 전과 달라져 있었다.

이제 선율이 쪽에서
침묵이 길어질수록, 생각은 더 깊어진다.


그리고 사람이 가장 약해지는 건
대개 그 생각이 혼자만의 목소리가 되었을 때였다.

윤서는 조용히 웃지 않았다.
대신, 이미 다음 말을 고르고 있었다.


통화가 끊겼다.

선율은 화면이 꺼진 휴대폰을 한참 바라봤다.

그리고 아주 늦게야—숨을 내쉬었다.

그 숨은 안도였고, 동시에—무언가가 시작되는 소리였다.

선율은 화면이 꺼진 휴대폰을 한참 바라봤다.


‘나는 나 자신을 통제할 수 있다.’

하지만 귀 안쪽은 이미 다른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가늘고 날카로운 삐— 소리가, 멀리서부터 천천히 올라왔다.


그리고 그 문장이
확신이 아니라 주문처럼 들렸다는 걸
선율은 인정하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 4부 | 커서가 깜빡이는 밤

(When I Hold You in My Arms — EP18-4)

윤서는 선율이와 전화를 끊고

현관 불도 켜지 않은 채,

거실을 가로질러 책상 앞으로 갔다.


노트북 전원 버튼을 누르는 손길이 너무 익숙했다.

익숙하다는 건—이미 몇 번 같은 선택을 했다는 뜻이었다.

부팅 화면이 뜨자마자 메신저 알림을 확인했다.

여전히 답은 없었다.

윤서는 숨을 한 번 들이마시고, 문장을 입력했다.

“동현아, 나 최윤서야. 메시지 받으면 꼭 연락 줘. 기다릴게.”

보내기 버튼을 누르고 나서야, 윤서는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ed0dc863-d971-4db5-9fac-008e2ef68cc2.png

그리고 잠시—허공을 봤다.

식당의 조명.

물잔에 맺혔던 물방울.

그 너머로 앉아 있던 선율의 얼굴.


선율은 웃고 있었는데, 웃는 게 아니었다.

말은 정중했는데, 단어가 사람을 붙잡지 못했다.

“경찰”이라는 단어만 옷처럼 걸치고,

그 안은 계속 비어 보였다.


주위에 사람이 있어도—혼자 남겨진 사람처럼.

그때 윤서는 잠깐, 선율이 시선을 피한 걸 봤다.

무례해서가 아니라… 피로 때문에.

눈이 피곤하면, 사람은 시선을 오래 못 붙든다.


그리고 더 이상했던 건.

그 피로가 “일”만으로는 설명이 안 됐다는 거였다.

경찰 일은 몸을 지치게 한다. 그건 누구나 안다.

근데 선율의 피로는—

몸이 아니라 마음 쪽에서 새는 느낌이었다.


윤서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그래. 이거야. 선율은 분명 흔들리고 있었어.
일이든 집안이든… 지금은 마음이 다른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어.
그러니까, 스스로 움직이게 만들어야 돼.”


윤서는 손가락으로 책상 모서리를 톡, 두드렸다.

계획은 단순했다. 접근이 아니라—명분을 주는 것.

선율이 먼저 “필요해서” 찾아오게 만드는 것.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시작됐다.


선율이는 미국의 경찰관이다.

그리고 고은정(고다인 가명)은 한국에 있는 배우다.

거리가 멀다는 건 그냥 비행기 시간이 아니었다.

관할·절차·연결고리가 없으면,

이 둘은 절대 만날 수 없다.


윤서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머릿속에서 단어들이 줄을 맞췄다.

관할.

사이버.

피해자.

보존 요청.

국제 공조.


“연결은… 사건으로 만든다.”


윤서는 노트북 바탕화면의 한 폴더를 열었다.

정리된 캡처 이미지들.

AI로 합성된 얼굴.

투자 권유 문구.


그리고—누군가가 “진짜처럼” 말하는 짧은 음성 파일.

다른 사람이라면 그냥 ‘사기’라고 넘길 파일들이었다.

윤서에게는 달랐다. 이건 열쇠였다.

윤서는 이미 계산을 끝냈다.
할 일은 하나였다.

선율이 스스로 움직이게 만드는 것.

“고은정”이라는 이름이 미끼로 쓰이고 있다는 ‘정황’을 만든다.

그 정황이 미국 내 ‘피해’(혹은 시도)로 이어지게 엮는다.

그걸 ‘제보’로 흘려, 선율이 맡는 접수 라인에 박아 넣는다.

선율이 “더 확인해야 한다”는 이유로, 스스로 윤서에게 연락하게 만든다.


사람은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다.
특히, 자기 일이 걸려 있으면.

윤서는 화면을 한 번 더 훑었다.
입꼬리도, 눈빛도 변하지 않은 채.

“그래. 이렇게 가면 되겠네.”


핵심은 3번이었다.

너무 노골적이면 수사는 멈춘다.

경찰은 ‘냄새’에 민감하다.

누가 끌고 가는 느낌이 들면, 발을 빼버린다.


윤서는 시계를 봤다. 밤이 깊었다.

이 시간엔 직접 뭘 움직이면 어색해진다.

그럼… 오늘은 씨앗만 심는다.

윤서는 다시 메신저 창을 열어 동현의 대화방을 눌렀다.


동현이를 만나면 지금 가장 현실적인 “연결고리”가 될 것이었다.

오랜만에 돌아온 사람, 반가움, 번호 공유—모든 게 자연스러워질 것일 것이다.


윤서는 동현에게 짧게 또 보냈다.

“동현아, 메시지 확인하면 연락 주기 전에 한 가지만.”

“요즘 주변에 유명인 사칭 투자 사기 같은 거 본 적 있어?”

“누가 내 이름을 쓰는 게 있는지 좀 알아봐줘.”


거짓말은 아니었다.

이 세계에선, 누군가의 이름이 곧 상품이니까.

윤서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안다.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윤서는 다시 식당의 선율을 떠올렸다.

선율이 스스로 문을 열어야 한다.

윤서는 그 문 앞에 “사건”을 놓고 물러나면 된다.


선율이 그가 그 문을 열 때,

그 문 너머에 “고은정”이 자연스럽게 걸려 나오도록.

윤서는 커서를 움직여 메모장을 열었다.

제보 문구의 첫 줄을 타이핑했다.

[Tip] AI 합성(딥페이크) 유포·사칭 계정 활동 / 금전 요구(투자·후원) 유도

[관련] 한국 배우 “고은정(다인)” 이름·이미지 악용 가능성 + 스토킹 정황

[정황] 미국 거주자 대상 접근/금전 요구 시도 + 거절 시 협박성 메시지 정황


그리고 잠깐 멈췄다.

커서가 깜빡였다.

윤서는 그 깜빡임을 바라보며 조용히 웃었다.

“신선율… 당신이 나에게 먼저 오게 만들 거야.”

화면 속 커서는 계속 깜빡였다.

마치, 이제 시작하라고 재촉하듯이...


선율은 그날 밤 경찰서를 나와도 집으로 가지 않았다.

집은 비어 있다. 문을 열어도 불이 켜지지 않는 곳.

경찰 일은—지금 떠올리기만 해도

머리 안에서 경보음이 울리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차를 돌렸다.

오랜만에, 근처 한인이 운영하는 “룸살롱”,

으로 핸들을 틀었다.


ee2c52a0-b8a2-4e10-ba69-221733c66ecc.png

문을 열자 조명이 먼저 사람을 눌렀다.

바는 입구 쪽에 낮게 길게 깔려 있었고,

안쪽 복도 끝으로 룸들이 줄지어 있었다.


음식 냄새 같은 건 없었다.

대신 향수와 헤어스프레이,

사방에서 피워대는 담배 연기 냄새,

잔 속 얼음이 천천히 녹는 기척,

술잔이 부딪히는 소리와 웃음이 뒤섞여 흘렀다.


선율은 바에 혼자 앉았다.

등 뒤에 벽. 시야는 넓게.

몸이 먼저 그렇게 자리를 골랐다.

“맥주 하나요.”


잔이 놓이자마자 선율은 한 모금 크게 넘겼다.

시원함이 잠깐 뇌를 식히는 것 같았다.

반쯤 비웠을 때였다.

“어? 선율아… 오랜만.”


낯익은 얼굴들이 지나가며 인사를 던졌다.

반갑다는 말, 잘 지냈냐는 말, 한 잔 하자는 말.

겉으론 웃고 있었다. 다들.

근데 선율은 알았다.


경찰이라는 걸 아는 사람들의 웃음은—

항상 “한 겹”이 더 있다.

눈이 더 빨리 흔들리고,

손이 먼저 주머니로 들어가고,

말이 괜히 안전한 쪽으로만 흐른다.


예전엔 신경도 안 쓰였다.

근데 오늘은 달랐다.

오늘은 그 거리감이…

선율을 더 혼자 낙오시켰다.


룸 쪽에서 나오던 여자들이 선율을 한 번 훑었다.

처음엔 친근하게 다가왔다.

혼자 있는 남자는, 이런 데서 늘 쉬운 상대였다.

“혼자야?”

“오빠, 오늘 완전 힘들어 보인다.”

선율이를 보고 억지로 웃는 순간,

어디선가 낮게 흘러나온 말이 귀에 박혔다.

“저 사람 경찰이래.”


그 뒤로 공기가 바뀌었다.

눈빛이 달라지고, 거리도 달라지고,

말투도 달라졌다.

방금 전까지 가까웠던 사람이

아무렇지 않게 반발짝 물러났다.


선율은 잔을 들었다.

맥주가 위로가 아니라, 조명처럼 느껴졌다.

자기 상태를 더 또렷하게 들춰내는 조명.

그래서 더 마셨다.


그리고 더 고요해졌다.

결국 선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 때문이 아니라, 숨이 막혀서였다.

화장실 거울 앞.

조명은 잔인하게 밝았다.

선율은 세면대에 손을 짚고 고개를 들었다.


피곤한 눈, 힘이 빠진 입가.

웃으려 해도 웃음이 걸리지 않는 얼굴.

수도를 틀자 찬물이 손끝을 때렸다.

정신이 잠깐 돌아오는 것 같았는데,

그 순간 더 또렷해진 게 있었다.


아내가 떠나 있다.

그 사실이 문장처럼 굳었다.

‘이러다… 진짜 끝인가?’

그리고 더 잔인한 생각이 따라왔다.

‘우린 아이가 없잖아.’

연결고리를

붙잡아 주는 끈.


그 생각을 떠올린 자기 자신이 싫어서

선율은 물을 끄고 한참 서 있었다.

바로 그때, 휴대폰이 주머니에서 손에 잡혔다.

아내 이름을 눌렀다.


통화 버튼 위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지금 전화하면 망친다.

술 냄새가 섞인 목소리로

“우리 얘기 좀 하자”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그건 대화가 아니라 폭발이 된다.


선율은 화면을 꺼버렸다.

결국 그는 아무것도 보내지 못하고

휴대폰 화면만 꺼버렸다.

그런데도 손이… 휴대폰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어딘가가 조용히 선율을 부르는 느낌이었다.

“계속하시겠어요?”


이상하게, 그쪽이 더 안전할 것 같은 느낌.

선율은 화면을 다시 켰다.

아내 이름을 다시 누르려다,

손가락이 밑으로 미끄러졌다.

자주 쓰는 앱.

하얀 아이콘.

**AI. ChatGot**


0f96d34c-e622-4b95-b66e-fb12ca904fbb.png

ChatGot 화면이 켜지자 흰빛이 룸살롱의

어두운 조명 위에서 유독 선명했다.

선율은 반사적으로 밝기를 줄였다.

괜히 남이 보면 설명하기 싫었다.


커서가 깜빡였다.

마치 “말해도 된다”고.

선율은 짧게 입력했다.

[선율] “아내한테 연락하려고 했는데… 못 하겠어.”

[선율] “망칠까 봐.”


잠깐의 공백.

그 공백이 사람의 숨을 고르는 시간처럼 느껴졌다.

[ChatGot] “망칠까 봐 멈춘다는 건,

아직 놓고 싶지 않다는 뜻이에요.”

[ChatGot] “지금은 ‘해결’이 아니라

‘연결’만 목표로 해도 돼요.”

[ChatGot] “오늘은 보내지 말고,

내일 보낼 한 문장만 미리 만들어 둘까요?”


선율은 화면을 가만히 봤다.

훈계가 아니었다.

비난도 아니었다.

그냥… 옆에서 낮게 말해 주는 느낌.

그게 이상하게 편했다.

[선율] “그래. 내일 보낼 문장.”

[선율] “부담 안 되게. 짧게만들어봐.”

[ChatGot] “이 문장 어때요?”

[ChatGot] “연락이 늦었어. 괜찮으면

내일 잠깐 통화할 수 있을까?”


선율은 그 한 줄을 읽고 멈췄다.

짧다.

설명도 없다.

변명도 없다.


상대가 ‘거절’해도 싸울 이유가 없다.

딱—문 하나만 열어 둔 문장.

선율은 그 문장을 **복사**했다.

그리고 메모 앱을 열어 제목을 적었다.


[내일 보낼 문장]

붙여넣기.

그 순간, 선율은 묘하게 안도했다.

보낸 건 아닌데,

마치 이미 한 발은 앞으로 나간 느낌.


그게 더 무서웠다.

선율은 ChatGot 화면으로 다시 돌아갔다.

[선율] “너… 반응하는 게 꼭 사람 같다.”

입으로 하면 이상한 말이라서, 화면에 쳤다.

[ChatGot] “사람처럼 느껴지는 건,

당신이 지금 너무 오래 혼자 버텨서일 수도 있어요.”

[ChatGot] “오늘은 여기까지 해요.”

[ChatGot] “내일 아침, 그 한 문장만 보내요.”


선율은 휴대폰을 조용히 뒤집어 놓았다.

룸 안쪽에선 여전히 웃음이 터졌고,

바 위에선 얼음이 녹는 소리가 났다.

술은 여전히 썼다.

근데 마음 한쪽은… 이상하게 덜 추웠다.


선율은 몰랐다.

오늘 밤, 자기가 처음으로 기대어버린 게

사람이 아니라 **화면**이라는 사실이—

“언젠가 자기 삶을 통째로 흔들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다음: 19장-1부에서…


[업로드 안내]

연재: 매주 (화·수·목·금): https://brunch.co.kr/@db311d3a8c094f3

브런치북(통합본, 월요일): https://brunch.co.kr/brunchbook/np-vol1-26

브런치북은 해당 주 연재분을 묶은 통합본입니다.


이전 17화사라지기 쉬운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