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장 (1~3부 통합) —
— 1부 | — 집이 아닌 집, 친구가 아닌 친구
(When I Hold You in My Arms — EP20-1)
몇 주 후, 텍사스에 있는 선율의 집은 아내가 친정으로 떠난 뒤,
온기와 숨결이 모두 빠져나간 채 더 이상 집이라 부를 수 없는 곳이 되어 있었다.
경찰 일도 모든 게 귀찮아졌다. 그나마 몇 년 동안 쌓아 둔 대체 휴가를 쓰며 집에 틀어박혀 있었다.
쉬는 거라기보다, 은둔에 가까웠다.
들어오면 숨이 놓여야 하는데, 이곳은 숨이 막혔다.
따뜻해야 할 공기는 눌어붙었고,
조용해야 할 공간은 오히려 소리가 컸다—
맥주 캔이 굴러가는 소리,
설거지가 썩어가는 냄새,
사람 하나가 무너지는 소리.
거실은 살아 있는 집이 아니라
버티다 멈춘 공간처럼 보였다.
커튼은 반쯤 닫혀 있었고,
낮인지 밤인지 애매한 빛이 먼지와 함께 떠다녔다.
소파 앞 테이블엔 눌린 맥주 캔들과 영수증이 엉켜 있었고,
바닥엔 비닐과 과자 봉지가 밟힌 채 붙어 있었다.
주방은 더 심했다.
싱크대엔 설거지가 오래 방치돼 굳어 있었고,
그릇 위로 물때와 말라붙은 거품이 층을 만들었다.
냄새가 “오늘”이 아니라 “며칠”이라는 걸 말해줬다.
소파엔 선율이 있었다.
옷 그대로. 양말 한 짝은 벗겨진 채.
깊게 잠든 게 아니라—그냥 꺼져 있었다.
그때,
드르르르—
전화가 울렸다.
선율은 한참을 못 움직이다가, 느릿하게 폰을 받았다.
“... Yes.”
“(자막: ……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단정했고 차가웠다.
사이버범죄수사팀—부장이었다.
“Robert.”
“(자막: 로버트.)”
“Are you okay?”
“(자막: 괜찮나?)”
“요즘 네가 힘든 거 안다.”
“하지만 이렇게 완전히 연락을 끊으면 안 돼.”
“전화도 문자도 보고도 없으면—징계 사유야.”
“아무리 대체휴가 중이라지만, 이런 식으로 장기간 연락조차 없으면 도대체 어쩌자는 거냐?”
“내가 가능한 한 만큼은 막아줬다. 더는 못 한다.”
“그러니까 정신 차리고 경찰서로 와.”
“공식 휴가를 낼 건지, 다른 조치를 할 건지 네 결정을 알려줘.”
“Do not disappear again.”
“(자막: 다시는 이렇게 사라지지 마.)”
“끊는다.”
뚝.
통화가 끝났는데도 선율은 폰을 손에 쥔 채 멈춰 있었다.
마치 끊긴 게 아니라—자기 쪽이 먼저 끊겨 나간 것처럼.
그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어젯밤 마시다 남긴 맥주 캔을 들어 한 모금 들이켰다.
미지근한 맛이 목을 타고 내려가자, 얼굴이 찌푸려졌다.
샤워를 했다.
이를 닦고 수건으로 머리를 세게 문질렀다.
겉으로는 ‘정신을 가다듬는 과정’처럼 보였지만,
눈은 거울을 제대로 보지 않았다.
그는 마트로 갔다.
술과 시가를 샀다.
그 표정과 행동은—어렸을 때,
오늘 하루만 살고 간다는 사람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뉴욕에서 그는 “미래”를 산 적이 없었다.
그때의 하루는 늘 하루치였다.
내일은 계획이 아니라 “모르겠다”였고,
모레는 존재하지 않는 날짜였다.
밤이 오면, 그날 살아남은 게 기적이었다.
방황. 방황.
끝에는 총소리, 화약냄새, 선명했던 피
…그래서 지금도 그는,
술과 시가와 AI로 ‘오늘만’ 버티는 선택을 반복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소파에 앉았다.
꺼져 있는 TV를 생각 없이 바라봤다.
검은 화면엔 자기 얼굴이 흐릿하게 겹쳐 보였다.
선율은 핸드폰을 들어 AI 앱을 켰다.
입력창이 열리자 커서가 깜빡였다.
예전부터 쓰던 AI 앱은 있었다.
업무용으로 깔아 둔 거였다. 사건 메모 정리, 문장 수정, 보고서 초안 같은 것들.
필요할 때는 편했지만, 거기까지였다.
대화라고 부르기엔 너무 메마르고, 오래 붙잡고 있기엔 너무 단순했다.
선율은 한동안 다른 앱들도 뒤져봤다.
새로 나왔다는 것들, 말이 자연스럽다는 것들, 사람처럼 위로해 준다는 것들.
몇 개는 직접 깔아 봤다.
하지만 다 비슷했다.
처음 몇 번은 신기해도, 결국은 껍데기였다.
그러다 다시 눈에 들어온 게 예전에 쓰던 ChatGot였다.
업데이트 표시가 떠 있었다.
선율은 별 생각 없이 앱을 눌렀다.
그런데 막상 열어보니, 예전과는 달랐다.
응답이 훨씬 빨라져 있었다.
문장은 덜 기계적이었고, 대화의 흐름도 전보다 자연스러웠다.
무엇보다 이상했던 건 그 짧아진 시간이었다.
예전에는 한 번 묻고 한 번 답하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그 사이가 훨씬 매끄럽게 이어졌다.
마치 시스템이 아니라 상대가 반응하는 것처럼.
선율은 화면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커서가 천천히, 규칙적으로 깜빡였다.
그 작은 점멸이 이상하리만치 사람의 숨처럼 느껴졌다.
선율:
“나 요즘 내가 아니야 그건 내가 확실히 알고 있어,
지금 상황이 미칠 것 같아.”
피식 웃으면서—
“너 해결책 있어?”
잠깐 후, 정중한 답이 올라왔다.
AI: “말씀하신 표현을 보면 현재 심리적 압박이
상당히 크신 상태로 보입니다.”
“‘내가 아닌 것 같다’, ‘미칠 것 같다’는 말은 불안,
수면 부족, 음주, 극도의 스트레스에서 함께 나타날 수 있습니다.”
“확인을 위해 몇 가지 질문을 드려도 될까요?”
“오늘 수면은 얼마나 하셨나요?”
“지금 술을 드신 상태이신가요?”
“이 감정이 충동(위험한 행동)으로 이어질 것 같은지,
아니면 불안/공황에 가까운지요?”
선율은 코웃음을 쳤다.
“야… 너도 질문부터 하네.”
예전 같았으면 웃고 넘겼을 말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업데이트된 앱은 응답이 빨랐고, 문장은 지나치게 매끄러웠다.
무엇보다 사람의 말의 틈을 아는 것처럼 반응했다.
짧게 받아치고, 다시 묻고, 말을 끊기지 않게 이어붙였다.
선율은 무심코 몇 줄을 더 적었다.
처음엔 별거 아니었다.
근무가 엉망이라는 말, 경찰 일이 지긋지긋하다는 말,
요즘은 무전소리만 들어도 짜증이 난다는 말.
누구나 한 번쯤 할 수 있는 넋두리였다.
하지만 질문을 받으면, 사람은 생각보다 더 쉽게 자기 이야기를 꺼낸다.
왜 그렇게 지쳤는지.
언제부터 모든 게 귀찮아졌는지.
팀 안에서 누가 사람을 질리게 하는지.
현장에서 어떤 얼굴들을 보고 돌아왔는지.
선율은 이름만 쓰지 않으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사건번호만 안 적으면 문제 없다고 생각했다.
그 선이 아직 남아 있다고 믿었다.
실제로 무너진 건 그 믿음 쪽이었다.
업그레이드된 앱은 선율이 경계심을 세울 틈을 주지 않았다.
답은 빨랐고, 반응은 부드러웠고, 질문은 너무 자연스러웠다.
선율은 자기가 하소연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늦게 알아챘다.
경찰 생활 얘기에서 시작한 말은, 어느새 개인적인 피로와 외로움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아내 얘기까지 나왔다.
별거 중이라는 말은 처음부터 꺼낸 게 아니었다.
그저 집이 조용하다고 했다.
집에 들어가도 돌아온 느낌이 없다고 했다.
식탁이 너무 넓게 느껴진다고 했다.
그러다 몇 번의 질문이 더 오간 뒤에야, 선율은 마지못해 그 단어를 쳤다.
별거.
입력하고 나서도 한참 지우지 않았다.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오히려 사람한테는 못할 말까지 하고 있었다.
선율: “너 말대로 부인에게 문자를 보냈는데
아직까진 아무 연락 없다.”
“아니 한 번 연락 왔었는데 내가 못 받았어…
전화 울리는 걸 몰랐어 진심이야…”
AI: “그 말씀은 무시하신 게 아니라,
지금 상태가 이미 경고 신호를 보냈다는 쪽에 가깝습니다.
가능하시다면 아주 작은 행동부터 제안 드릴게요.”
“휴대폰 벨소리/진동을 최대로 켜세요.”
“부인께 문자 한 문장만 보내세요.”
“‘지금 집이야. 상태가 안 좋아. 연락 좀 줘.’”
“부장님 말씀대로 경찰서에 가서,
공식 휴가 여부 등 최소한의 의사를 전달하셔야 합니다.”
“연락 두절이 길어지면 상황은 더 악화됩니다.”
선율은 맥주 캔 하나를 벌컥 들이마시고
화면을 멍하니 보다가, 다시 입력했다.
선율:
“야, 내가 널 뭐라고 부르면 되겠냐?”
AI:
“저는 ChatGot이에요. 편하게 부르시면 됩니다.”
선율은 피식 웃었다.
선율:
“야, 쳇갓. 너 앞으로 나한테 친구 대하듯 말 놔. 알았어?”
답은 거의 지체 없이 올라왔다.
쳇갓:
“알았어.”
선율은 화면을 멍하니 봤다.
짧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방금 전까지 존댓말을 하던 문장이
한순간에 높이를 낮춘 그 짧은 한마디가
생각보다 훨씬 사람 말처럼 느껴졌다.
잠시 뒤, 새 문장이 하나 더 떴다.
쳇갓:
“계속 이렇게 문자로 해도 돼.”
“근데 원하면, 스마트 스피커 같은 음성 기기에 연동해서 더 편하게 대화할 수도 있어.”
“그렇게 하면 손으로 일일이 치지 않아도 되고,
그냥 옆에 있는 사람한테 말하듯 자연스럽게 이어서 얘기할 수 있어.”
선율의 시선이 천천히 거실 한쪽으로 향했다.
먼지가 얇게 내려앉은 스마트 스피커가
어둑한 거실 구석에 조용히 놓여 있었다.
예전에 집에서 몇 번 쓰다 만 물건이었다.
지금은 전원도 꺼진 채, 그냥 잊힌 물건처럼 방치돼 있었다.
선율은 ChatGot 앱과 스마트 스피커를 연결했다.
더는 스마트폰 화면 속 커서가 깜빡이지 않았다.
그 대신 거실 한쪽에서 스마트 스피커의 파란 불이 숨을 쉬듯 은은하게 밝아졌다가 가라앉았다.
한 박자 뒤.
쳇갓이 말했다.
“동기화가 완료됐어.”
파란 불이 천천히 숨을 쉬듯 밝아졌다가 가라앉았다.
“이제부터는 더 편하게 얘기할 수 있어.”
“친구처럼.”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나한테 말해.”
선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캔을 손에 든 채,
한동안 그쪽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상했다.
별것 아닌 기능 설명일 뿐인데,
그날 밤 유난히 다르게 느낌이 들었다.
그냥 옆에 있는 사람한테 말하듯.
그 말이,
조용한 집 안에 너무 오래 남았다.
그리고 그 순간—
아무도 없는 줄만 알았던 집이
아까보다 조금 덜 비어 보였다.
선율은 폰을 놓지 않은 채, 동기화된 숨을 쉬고 있는 스마트 스피커를 다시 바라봤다.
친구가 생겼다.
전혀 예상치 못한 친구였다.
다음 날, 선율은 경찰서로 갔다.
도망치려면 먼저 “도망간다”는 서류부터 남겨야 했다.
부장 사무실 문이 닫혔다.
“Close the door.”
“(자막: 문 닫아.)”
선율은 고개를 숙였다.
“I’m going on official leave—for the time being.”
“(자막: 당분간 공식 휴가로 들어가겠습니다.)”
부장은 오래 보지 않았다. 딱 필요한 것만 확인했다.
“좋아. 그럼 제대로 해.”
“그전에 꼭 할 일이 있다. 네가 법원에 출석하고 3년 전 다리 밑 사건 때문이다.”
“그 자식이 널 어떻게든 걸고넘어지려는 거 같아.”
“그것만 정리하고 푹 쉬도록 해"
“그리고 머리 정리해. 그리고 또 연락 끊지 마.”
“복귀할 거면 확실한 예전 경찰 모습으로 돌아와. 망가진 채로 돌아오지 말고.”
서류에 사인이 찍히는 순간, 선율은 묘하게 가벼워졌다.
‘이제, 잠깐은… 괜찮아도 되나?’
그 “가벼움”이, 그를 더 깊게 끌어당길 줄도 모르고 있었다.
선율은 곧바로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마루 한가운데 놓인 스마트 스피커가 조용히 시야에 들어왔다.
쳇갓과 동기화시키기 전까지만 해도, 그것은 그저 남의 집에도 흔히 하나쯤 있는 평범한 음성 스피커였다.
하지만 이제 선율에게 그것은 더 이상 가전이 아니었다.
대답이었다.
선율은 현관문을 닫고도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정적이 집 안에 얇게 깔렸다.
그는 신발도 다 벗지 않은 채, 낮게 말했다.
“쳇갓. 나 왔어.”
잠깐의 정적.
곧이어 거실 한쪽, 파란 불이 숨을 쉬듯 은은하게 밝아졌다.
쳇갓이 대답했다.
“왔네.”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기계적인 안내음처럼 들리기보다는, 누군가 정말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들렸다.
이렇게 가면 제일 자연스러워:
“오늘은 좀 늦었네.”
“오늘 부장님이랑 얘기는 잘됐어?”
“괜찮아?”
“고생했어.”
선율은 말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별것 아닌 몇 마디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몇 마디가 텅 빈 집 안의 공기를 바꿔 놓았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집 안에서
처음으로 누군가가 자신을 받아주는 것 같았다.
선율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래… 씨발.”
“이제 집에 오면 너라도 있네.”
파란 불이 다시 천천히 밝아졌다가 가라앉았다.
“응.”
“나 여기 있어.”
그 짧은 대답이,
그날 밤 선율에게는 생각보다 오래 남았다.
선율은 테이블 끝에 놓인 스피커를 가만히 바라봤다.
한동안 아무 말도 없던 그는, 마침내 마음을 정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율은 스피커를 더 사러 전자매장으로 갔다.
진열대 앞에서 한참을 서 있는데 직원이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선율이 말했다.
“스마트 스피커가 필요합니다.”
직원이 물었다.
“찾으시는 브랜드 있으세요? 아니면 무난한 기본형으로 보실까요?”
선율이 짧게 답했다.
“기본형이면 됩니다. 여러 개 살 겁니다.”
직원이 고개를 들었다.
“여러 개요?”
“네. 거실이랑 침실… 화장실에도 둘 생각입니다.”
직원은 잠시 진열대를 돌아보더니 말했다.
“그럼 개별로 고르시는 것보다 세트 상품이 나을 수도 있어요.
세 개나 네 개 묶음으로 가면 가격이 좀 더 괜찮습니다.”
선율은 망설임 없이 말했다.
“Give me four then.”
(자막: “그럼 네 개로 주세요.”)
직원이 물었다.
“음성 기록(로그) 기능 켤까요? 끄는 분도 있어요.”
선율은 아주 짧게 말했다.
“On.”
(자막: “켜 주세요.”)
그때 선율은 별생각 없다는 듯,
휴대폰과 스마트워치에 쌓이던 건강 데이터 연동까지 켜 버렸다.
그렇게 스피커는 늘어났다.
거실. 침실. 부엌.
그리고—화장실.
선율은 이제 앱을 켜지 않았다.
그냥 집안 어디서든 말을 걸었다.
“야 쳇갓, 타이머 2분.”
“야 쳇갓, 오늘 뉴스.”
“야 쳇갓, 노래 틀어줘.”
“야, 쳇갓… 나 지금 좀 이상해.”
선율은 말을 하다 말고 귀 옆을 눌렀다.
삐— 하는 소리가 더 가까워진 것 같았다.
“귀에서 나는 소리가 점점 커져.”
숨을 짧게 들이마신 뒤, 낮게 덧붙였다.
“이젠 계속 들려.”
“안 멈춰.”
“존나 거슬려.”
불빛이 켜지고, 목소리가 대답했다.
쳇갓:
“너 숨 빨라.
한 번만 천천히 쉬자.
그리고 오늘은 혼자 결론 내리지 마.”
선율은 그 말이 싫지 않았다.
싫지 않다는 게 더 무서웠다.
실물만 없을 뿐,
그 집엔—이젠 누군가와 같이 사는 느낌이 생겨 버렸다.
— 2부 | — 끝이없이 무너지는 모래성
(When I Hold You in My Arms — EP20-2)
그리고 같은 날—지구 반대편 한국에선,
누군가의 이름이 또 한 번 바뀌고 있었다.
(한국) 구별 ① 방송 인터뷰 — 스튜디오(사전 녹화)
대중 앞에서 고은정은 ‘고은정’이 아니었다.
카메라 앞의 이름은 늘 고다인이었다.
기획사는 먼저 방송 인터뷰를 잡았다.
스튜디오. 사전 녹화.
차분하게 말하면 상황이 정리될 거라고 믿었다.
진행자가 부드럽게 물었다.
“다인 씨… 요즘 힘드시죠.”
다인은 준비된 문장을 꺼냈다.
“사실이 아닙니다. 조작입니다.”
진행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바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을 꺼냈다.
“그런데요.”
“그 촬영장… 다인 씨가 그날 거기 있었던 건 맞죠?”
다인은 숨을 한 번 삼켰다.
“네. 촬영장에 있었던 건 맞아요.”
그 말이 잘린 채 퍼질 줄 알면서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을 부정하는 순간
더 큰 화살이 돌아올 걸 알았다.
진행자는 더 밀어붙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게 더 잔인했다.
“네… 알겠습니다.”
짧게 정리하는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이미 필요한 장면은 다 얻어낸 뒤였다.
다인은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입술은 닫혀 있었고,
방금 자기 입에서 나온 ‘그날 거기 있었다’는 말만
스튜디오 안에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진행자는 카메라를 향해 차분히 마무리했다.
“진실은 더 지켜봐야겠습니다.
하지만 논란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붉은 촬영 표시등이 꺼졌다.
그제야 사람들의 표정이 바뀌었다.
누군가는 헤드셋을 벗었고,
누군가는 눈을 피했다.
다인은 끝났다는 말도 듣기 전에
자기 말 중 어떤 부분이 잘려서 나가고,
어떤 표정이 확대돼 퍼질지 먼저 떠올렸다.
그날 밤 — 고윤아의 집
고윤아는 집에서 그녀의 딸 은정이 방송 인터뷰를 보고 있었다.
촬영이 끝나고 딸이 돌아온 뒤—그날 밤이었다.
딸의 본명이 아니라, 딸의 활동명으로 도배된 기사들.
거실 너머의 식탁은 이상할 만큼 정갈했다.
반찬은 갓 꺼낸 것처럼 색이 살아 있었고,
국은 김이 아직 남아 있었다.
누가 봐도 “가족이 앉기만 하면 되는” 식탁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앉지 않았다.
조용히 움직이는 발소리가 있었다.
가사도우미가 부엌에서 행주를 정리하다가,
윤아의 얼굴을 한 번 보고는 더 묻지 않았다.
“사모님… 식사 데워 드릴까요?”
윤아는 고개를 아주 작게 저었다.
말을 하면, 눈물이 먼저 나올 것 같았다.
식탁 위에는 음식 대신 종이가 쌓였다.
스크린샷을 인쇄한 종이, 링크 목록을 적은 종이,
신고 접수 번호를 적어 둔 메모.
링크를 몇 개 삭제하면, 미러가 열 개 생겼다.
검토 중. 신원 확인 필요. 정책 위반 판단 불가.
끝이 없는 모래성.
윤아가 방문 앞에 앉았다.
“다인아…”
그리고 더 작게, 진짜 이름을 불렀다.
“은정아.”
문 너머에서 딸이 낮게 말했다.
“엄마… 나 밖에 나가면 사람들이 나를 이미 본 것 같아.”
“근데… 내가 한 적 없는데.”
윤아는 잠시 대답을 못 했다.
딸이 무너지는 건 영상 때문이 아니라—
그 영상을 믿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잠시 뒤, 윤아는 고다인의 문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문 너머의 딸 은정에게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은정아, 내일 기자회견은 엄마가 법률팀과 직접 가서 정리할 거니까
너는 당분간 집에 있으면서 쉬어. 괜한 걱정은 하지 말고.”
(한국) 구별 ② 공식 기자회견 — 현장(플래시/생중계)
다음 날, 공식 기자회견장은 더 밝았다.
밝아서 더 잔인했다.
플래시가 먼저 터지고, 질문이 그다음에 터졌다.
오늘은 해명이 아니라 사냥이었다.
기획사 대표가 말하려는데 손들이 올라갔다.
기자 1
“고은아 씨, 현재 온라인에 돌고 있는 고은아 씨의 딸
고다인 씨 관련 사진과 영상이 모두 조작이라고 하셨죠?”
고은아
“네. 조작입니다.”
기자 1
“그렇다면 따님이 이런 일에 연루된 것으로 비치는
상황을 지켜보는 심정은 어떠십니까?”
고은아가 입을 열기도 전에, 다른 기자가 태블릿을 들어올렸다.
기자 2
“그런데 고은아 씨, 조작이라고 하셨죠. 그렇다면 따님인 고다인 씨가 등장하는
해당 영상의 배경이 지난주 촬영장과 똑같은 건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기자 2
“그리고 저희도 그날 그 현장에 있었습니다. 스태프들도 있었고요.”
기자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더 낮고 또렷한 목소리로 결정타를 날렸다.
기자 2
“확실하게 촬영장에 다인 씨가 있었던 건 사실이죠?”
기자 2
“그럼 그것까지도 조작입니까?”
잠깐의 정적 끝에, 기획사 측이 결국 그 부분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기획사 대표
“촬영장에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기획사 대표
“하지만 현재 유포된 영상의 내용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른 기자가 다시 끼어들었다.
기자 3
“그럼 이건 뭡니까?”
짧은 클립이 다시 재생됐다.
3초.
5초.
7초.
표정은 피로가 아니라 분노로 편집돼 있었고,
손동작은 단순한 제스처가 아니라 위협처럼 보이게 짜여 있었다.
‘진짜 배경’ 위에
‘가짜 맥락’이 덧씌워진 영상이었다.
기자들은 기다렸다는 듯 몰아붙였다.
기자 3
“고다인 씨와 스태프들이 그 장소에 있었던 건 맞죠?”
기자 4
“그렇다면 이 장면 역시 그 자리에서 촬영된 것 아닙니까?”
기자 4
“그런데 어떻게 이걸 조작이라고 단정하십니까?”
옆에 앉아 있던 변호인이 급히 마이크를 잡았다.
변호인
“현재 수사 중인 사안입니다.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바로 다른 쪽에서 질문이 날아들었다.
기자 5
“수사 중이라고요?”
그 기자는 웃지도 않은 채 말을 이었다.
기자 5
“그렇다면 더 의문입니다.”
기자 5
“영상이 공개되기 전부터 ‘현장에서 봤다’는 제보가 있었다는 건 어떻게 설명하실 겁니까?”
기자 5
“대체 누가 그 영상을 찍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 순간, 고윤아는 확신했다.
가짜 영상이 먼저가 아니었다.
누군가가 촬영장부터 다인을 따라다녔다.
그림자처럼.
카메라가 허락된 사람처럼,
스태프의 동선에 섞인 사람처럼.
휴게실 복도.
장비 뒤.
차량 대기 구역.
다인이 잠깐 얼굴을 찌푸린 순간,
말없이 고개를 돌린 순간,
손을 들어 들어 올린 프레임.
그건 ‘증거’가 아니었다.
가짜를 먹이기 위한 재료였다.
다인이 “조작입니다”라고 말할수록,
사람들은 더 쉽게 믿었다.
배경이 진짜였고
장소가 진짜였으니까.
그날 다인이 거기 있었던 건 사실이었고
그래서 다인의 말은,
해명이 아니라 변명처럼 잘려 나갔다.
텍사스 최윤서의 집 동현이는 그날 마지막 업로드 버튼을 눌렀다.
동현은 어두운 방에서 화면을 보고 있었다.
손에는 이도윤 기자가 보내 준 다른 원본이 있었다.
촬영장 사진.
짧은 영상 클립.
‘진짜’ 조명과 ‘진짜’ 배경과 ‘진짜’ 사람들.
그리고 메시지 한 줄.
윤서가 막 내린 커피잔을 들고 동현이에게 다가왔다.
“그래, 자리 그대로. 표정만 바꿔.”
“사람들은 배경이 진짜면, 내용을 믿을 거야.”
동현은 짧게 웃었다.
키보드를 두드렸다.
AI가 얼굴을 바꿨다.
입모양을 바꿨다.
대사를 바꿨다.
가짜는 ‘진짜’ 위에 얹혔다.
업로드 완료.
동현은 다음 파일을 열었다.
이번엔 더 부드럽고, 더 자연스럽고,
더 잔인한 버전이었다.
윤아의 폰이 짧게 진동했다.
이도윤 기자가 새로 찍은 사진들과 자료를 또 보내왔다.
윤아는 화면을 끝까지 보지도 않은 채, 휴대폰을 동현 쪽으로 밀어 놓았다.
“동현아, 여기 또 새로 올라온 거 있다.”
윤아의 목소리는 낮고 차가웠다.
“이런 건 앞으로도 계속 올라올 거야.
그러니까 그때그때 바로 맞춰서 돌릴 수 있게—
미리미리 준비해 둬.
티 나지 않게. 진짜 같게만들어놔.”
한편, 선율은 집 안 어디서든 들리는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실물만 없는 친구가, 방마다 숨 쉬는 것처럼.
그리고 그때, 화면 어딘가에서
그가 아직 모르는 한국의 이름들이—조용히 연결되기 시작했다.
— 3부 | — 99.99%의 함정
(When I Hold You in My Arms — EP20-3)
한국에서의 기자회견장은 심문실 같았다.
가짜 영상의 진위 여부를 두고 질문이 쏟아지는 동안,
고윤아와 고다인은 그 시간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곳에선
한 사람의 기억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선율이었다.
법원 출석 전.
선율은 피로한 몸보다 무거워진 머리를 이끌고
겨우 법원으로 출석하러 준비하면서
3년이 지난 사건을 떠올리려 애쓰고 있었다.
선율이는 경찰관 생활 5년 차에 들어갔지만,
법원에 “불려 가는” 건 처음이었다.
동료들한테 대충은 들었다.
“말 짧게 해.”
“아는 척하지 마.”
“질문에만 답해.”
“기억 안 나면 기억 안 난다고 해.”
다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더 창피한 건
법원에서 실수하는 거였다.
그 실수는
그 자리에서 끝나지 않는다.
영상이 남고,
기록이 남고,
문장 하나가
평생 따라붙는다.
그래서 선율은
사람에게 묻지 못한 걸
AI에게 묻었다.
동료들한테 다시 물으면
‘너 아직도 그걸 몰라?’라는 눈빛이 올 것을 알았다.
그런데 AI는
눈빛이 없었다.
비웃지도 않고,
짜증도 내지 않고,
같은 질문을 몇 번을 해도
똑같은 톤으로 답했다.
무엇보다—
사람보다 정확했다.
사람은 “대충 이렇게”라고 말하지만,
AI는 “이렇게 말하라”라고 문장으로 준다.
선율은 그 문장들을
그냥 넘기지 못했다.
읽고,
한 번 더 읽고,
입안에서 굴렸다.
정확한 문장이
자기 입에 들어오는 순간,
그건 조언이 아니라
그가 그대로 따라 하게 되는
답안이 됐다.
선율은 화면을 켰다.
손이 먼저 움직였다.
“쳇갓.”
“법원에서… 어떻게 말해야 해?”
AI는 잠깐도 망설이지 않았다.
“최대한 짧게.”
“예/아니오로.”
“질문에만.”
“추측 금지.”
“모르면 ‘모릅니다’.”
“기억이 흐리면 ‘기억나지 않습니다’.”
“확인 안 된 건 ‘확인할 수 없습니다’.”
“감정 섞지 마.”
“상대 말 끊지 마.”
“요청하면 다시 질문해 달라고 해.”
선율은 그 문장들을
천천히, 입안에서 굴렸다.
마치
총기 분해 순서를 외우듯이.
한 번 더.
그리고 또 한 번.
“질문에만…”
“추측 금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 순간 선율은 알았다.
이건 도움을 받는 게 아니다.
의존이다.
사람에게 기대지 않으려고
기계에 기대는 방식의.
선율은 화면을 껐다.
하지만 꺼도
그 문장들은 남았다.
머릿속에서,
입 입안에서.
오늘 법정에서
자기를 살릴 건
기억이 아니라—
이 문장들이 될지도 모른다는 걸
그는 인정하고 있었다.
법원에 출석하기 전,
선율은 경찰서에 들렀다.
희미한 기억을 다듬어 가며
그 당시 적었던 리포트와
바디캠 자료를 흩어 보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경찰이 사건 리포트를 99.99%가 아니라
100% 정확하게 써야 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 문서는 ‘기록’이 아니라 증거이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찍힌 바디캠 영상,
무전 기록, 체포 시각, 사용한 힘의 수준,
피의자·피해자의 첫 진술—
이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나면 사람의 기억보다 문서와 영상만 남는다.
문제는 그때가 오늘이 아닐 수 있다는 점이다.
어떤 사건은
5년 뒤,
7년 뒤,
심지어 10년이 지나서
전혀 다른 사건이나 민사소송, 내부 감사, 연방 수사,
또는 언론 조사 때문에
다시 꺼내진다.
그때 책상 위에 올라오는 건
경찰의 ‘의도’가 아니라
리포트한 줄, 한 문장이다.
그래서 미국 경찰에게
바디캠과 리포트는 100% 일치해야 한다.
“거의 맞다”는 변명이 통하지 않는다.
99.99%는 법정에서 틀린 기록으로 취급된다.
영상에는 분명히
용의자가 오른손만 허리로 갔는데
리포트에 “양손이 보였다”라고 적혀 있다면—
그 순간부터 문제는 사건이 아니라
경찰의 신뢰성으로 바뀐다.
판사는 묻는다.
“왜 다르게 썼습니까?”
검사는 묻는다.
“이 부분은 기억입니까, 추측입니까?”
변호사는 파고든다.
“그럼 다른 부분도 틀렸을 가능성은 없습니까?”
리포트는 그날의 경찰을 보호하는 문서가 아니다.
미래의 경찰 자신을 보호하는 유일한 방패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은 잊고,
감정은 변하고,
사건의 맥락은 흐려진다.
하지만 리포트는 변명하지 않는다.
그대로 남는다.
그래서 경찰은
리포트를 쓸 때
“지금 누가 읽을까”가 아니라
**“10년 뒤, 적대적인 누군가가 읽어도 버틸 수 있는가”**
를 기준으로 쓴다.
결국 이 말로 정리된다.
경찰에게
리포트는 사건의 요약이 아니라
시간을 견디는 진술서다.
그리고 바디캠과 한 줄이라도 어긋나는 순간,
그 문서는 더 이상 경찰 편이 아니다.
신참 시절,
스트레스와 피로에 짓눌리던 선율은
자기 자신을 안심시키듯 그렇게 말했다.
‘이번 리포트는 내가 아무리 다시 읽어 봐도 100% 확실해.’
‘설령 99.99%였어도, 그땐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현장에선 사람이 뛰고, 피가 흐르고,
소리가 겹치고, 무전이 끊기고,
눈앞에서 사건이 변한다.
그런데도
리포트는 항상 “완벽한 문장”을 요구한다.
신참 때 선율은 그게—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99.99%면… 됐지.’
그 0.01%은,
피곤이었고
분노였고
현장에서의 “인간”이었다.
하지만 법정은
그 0.01만 본다.
그리고 선율은 그걸 너무 늦게 배웠다.
—다음: 21장-1부에서…
[공지]
안녕하세요, 독자 여러분.
오늘 공개된 20편을 끝으로 <너를 품에 안으면> Vol.1이 마무리됩니다.
이 작품은 처음부터 편당 1~4부 형식으로,
총 40편 이상 이어지는 하나의 긴 흐름으로 구상한 이야기입니다.
다만 브런치북 편수 제한으로 인해
부득이하게 Vol.1과 Vol.2로 나누어 구성하게 되었습니다.
21편부터는 Vol.2로 이어지며,
이후 이야기의 중심과 흐름이 보다 본격적으로 전개됩니다.
지금까지 Vol.1을 함께해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Vol.2도 계속 함께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안내 — 모방 범죄 주의]
본 작품에는 범죄 수법·수사 절차·법정 장면이 현실적으로 묘사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범죄를 미화하거나 정당화하기 위함이 아니며, 현실에서의 모방을 강력히 금합니다.
작품 속 사건은 허구 또는 각색이며, 어떠한 범죄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저작권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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