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두 딸들에게,
오늘은 2026년 2월 9일, 화창한 월요일이다.
안식년에 집에서 편안히 지내다 보니 사람 만나는 약속이 반갑기까지 하구나. 내 마음도 회복되어 가고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대학원 시절 인연이 있었던 안 형의 청첩장을 받으러 여주에 다녀왔다. 우리 집에서 약 1시간 거리였다. 같은 경기도권이라 이 정도 걸릴 줄 몰랐는데, 생각보다 꽤 멀었다. 매번 형이 우리 집 근처로 와서 만났는데, 올 때마다 내가 여주 한번 가겠다고만 했던 터라, 오늘 휴직자의 시간 여유를 핑계 삼아 겸사겸사 다녀왔다.
안 형을 만난 곳은 그의 집 근처 한식집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형은 별로 달라진 건 없었지만, 군데군데 흰머리가 많이 보였다. 내 시간은 멈춘 것 같은데, 지인들을 만나면 언뜻 시간의 흐름이 느껴진다.
청첩장을 받고 요즘 사는 이야기를 나눴다. 휴직 중인 나는 당연히 부러움의 대상이다. 한식집에서 식사를 마치고 주변 카페로 이동해 이야기를 더 나눴다. 형과의 대화는 항상 철학과 종교, 그리고 읽은 책에 관한 이야기로 채워진다. 내 주변에서 이런 이야기를 나누기에 이 형보다 적합한 인물은 없다. 특히 주된 주제는 '기독교'인데, 형의 예비 형수님이 독실한 교회 누나다. 심지어 장인어른 되실 분은 목사이시다. 안 형은 원래 교회를 다니던 사람은 아니었지만 형수님 때문인지 몇 년 전부터 자연스럽게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나와의 대화가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교회와 관련된 고민이 있을 때면 이 형은 나에게 전화나 카톡을 주곤 했다.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니지 않았다면,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 수많은 고민을 하기 마련이다. 안 형은 아직 스스로 해결되지 않은 수많은 의문에 대해 나와 이야기했다. 나도 스무 살 때부터 '기독교인'이 되었기에 그런 고민에 익숙했다. 특히 '진화론'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그는 교회에서 진화론에 대한 입장이 닫혀 있는 게 너무 답답하다고 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인간으로서 진화론의 논리는 너무나 확실하지 않은가. 나도 그도 진화론이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논리가 아니라는 데 동의했다. 진화론은 '태초'에 대해서는 잘 설명하지 못한다. 이론이야 얼마든지 있겠지만, 전 우주적으로 보았을 때 생명체—특히 지능을 가진 '인간' 수준의 생명체—가 우연으로 만들어진다는 것보다는 신이 있다고 설명하는 게 오히려 더 깔끔하다. 설사 생명이 우연히 생겼다고 하더라도 수십억 년간 안정적인 환경이 꾸준히 제공된다는 게 어떻게 가능할까. 화성에도 물이 있었지만, 수십억 년의 시간 앞에 버티지 못했다. 그것이 당연한 것이다. 엔트로피의 법칙대로 생각하자면 오랜 시간을 거치면 화성과 같이 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반대로 지구처럼 생명이 오랜 기간 번성한다는 건 엄청나게 이상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기독교, 특히 여기서 말하는 개신교계가 진화론에 거부감을 갖는 것은 그 반대논리가 정당해서라기 보단 자신감이 없기 때문이란 생각이 든다.
코페르니쿠스는 1473년 출생한 사람으로, 그가 지동설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는 오히려 교황이 나서서 출판을 권유하기도 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교황청의 권력이 공고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1517년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교황청의 권위가 위협받으면서 여유가 없어졌다. 그 무렵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주장하자, 이를 위협으로 판단한 교황청은 그를 이단자로 배척했다. 그것은 전적으로 교황청이 이전과 같은 자신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기독교계가 진화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지금의 현상도 자신감이 없기 때문이라 하겠다. 어찌됐든 지금도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 믿는 사람이 있는가? 시대가 지나면서 성경에 관한 해석이 달라졌다. 이에 관한 갈릴레이의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성경》에는 거짓이 없으며 《성경》은 잘못될 수 없습니다. 단지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이 간혹 잘못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며 과학을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과학을 가르치지 않는다. 나는 성경을 어느 정도 '신화적'인 문맥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화는 인간의 심리와 의식, 영혼을 다룬다. 그러므로 때로는 과학적으로 말이 안 되기도 하지만, 인간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없다. 그러니 성경이 신화적이라고 해서 성경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성경이 과학적으로 옳다는 관점이 성경의 설득력을 떨어뜨리고 있다. 성경은 어디까지나 사람이 썼다. 하나님이 영감을 주어 쓰게 했다고 해도, 이것은 어디까지나 성경 저자의 인식 능력 내에서 명확한 목적을 갖고 쓰인 것이다. 심지어 지금은 성경이 매우 어려운 책이지만, 당시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원래 수천 년간 텍스트가 아니라 대부분 구술로 내려왔다. 수많은 사람의 머릿속에 들어갈 수 있었다는 건 그만큼 쉬웠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어렵게 읽는 것은 현대인의 관점에서 성경을 해석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수천 년 전 저자들의 인식을 이해해야 한다.
최근 나 역시 진화론에 관해 많은 고민을 했고, 이 진화론적 방법론이 나 자신과 타인, 그리고 사회를 이해하는 매우 강력한 도구임을 깨달으면서 교계에 여전히 남아 있는 진화론에 대한 오해가 더욱 안타깝게 느껴졌다. 심지어 "개신교"는 매우 진화론적 방법론으로 성공한 사례다. 그 존재 자체가 천주교에서 나온 매우 성공적인 돌연변이였으며, 단일하고 수직적인 천주교 구조와 달리 수많은 종파를 허용함으로써 환경 변화에 더 잘 적응하는 구조를 만들어 왔다. 그러니 개신교의 성공 자체가 오히려 진화론적 방법론의 탁월함을 증명하는 것이다.
대화에서 기억에 남는 두 번째는 김 박사님의 근황이다. 김 박사님은 내가 대학원 때 직접 수업에서 배웠던 분으로, 우리 분야에서 큰 성취를 이룬 분이었다. 과학자로서 나의 롤모델이었고, 이분이 센터장으로 연구센터를 이끌 때 센터의 수준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그런데 그분이 최근 초기 치매 증상을 겪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안 형 말로는 연구원 내부에서 정치적인 스트레스를 말년에 많이 받으신 것이 영향을 끼쳤을 거라 추측했다. 누구보다 총명하던 그는 정말로 치매와 어울리지 않는 사람 같았다. 은퇴 후 비로소 여가를 즐길 시기에 이르렀을 때 찾아온 비극이라 이루 말할 수 없이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왜 커리어 말년에 그토록 큰 스트레스를 겪었을까 생각해보았다. 어쩌면 그는 젊은 시절 이뤄낸 큰 성과에 스스로 발목이 잡힌 것은 아닐까. 2006년 그는 아르곤의 분자량을 재정의하는 논문을 썼는데, 그 논문은 지금까지 1,300건 이상 인용을 받으며 엄청나게 히트했다. 그의 40대, 장밋빛 미래가 보장된 듯 보였다. 실제로 40대에 센터장으로서 이룬 성과도 대단했고, 센터 내에서 그를 지지하는 연구원들도 많았다. 내가 대학원에 들어갔던 2015년경 그는 연구원의 원장 후보로도 거론되는 거물이었다. 그러나 결국 별다른 자리를 얻지 못한 채 커리어를 마치게 되었다. 나도 그 자세한 내막은 모른다. 정확히 어떤 지점에서 그가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알지 못한다. 그저 추측할 뿐이다. 어쩌면 근본적인 스트레스의 원인은 그가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다고 스스로 생각한 것이 오히려 그를 힘들게 만든 것은 아닐까.
이것은 내 경험에서 나온 추측이다. 나 역시 회사에서 나름대로 좋은 성과를 많이 거뒀다고 스스로 생각했고, 여러 높은 분들도 인정해주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나에게 만족할 만한 자리가 주어지진 않았다. 나는 스스로 느끼기에 계속해서 권한 없이 겉도는 사람으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내가 그 성과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지 않았다면 그것이 스트레스를 주는 요소였을까? 아니다.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나의 괴로움은 모두 나의 헛된 기대로부터 온 것이었다. 기대는 곧 독과 같다. 이 독은 서서히 나를 좀먹고 기쁨을 앗아가고, 기운을 앗아간다. 결국 이 기대로 인해 나는 우울증과 번아웃에 빠져간 것이다.
나는 여기서 에픽테토스의 태도를 해독제로 처방하고자 한다. 그리고 너희들도 평생 에픽테토스의 태도대로 살길 권한다. 에픽테토스는 삶의 한계를 받아들임으로써 진정한 자유를 얻으라고 가르친다. 세상만사가 내 뜻대로 이뤄지기를 허황되이 바라지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 내 힘이 미치는 일에 집중하여 최선을 다하라 말한다. 회사에서 인정받아 높임받는 일이 과연 내 권한일까? 그것은 애초에 바라선 안 되는 것이다. 오히려 적절한 기여를 한 뒤 떠나길 바라는 마음을 갖는 게 더 바람직하다. 마치 노자의 말처럼 말이다.
富貴而驕, 自遺其咎.
(부귀이교, 자유기구)
부귀와 교만은 스스로 재앙을 취하는 것이다.
功遂身退, 天之道.
(공수신퇴, 천지도)
공을 이루면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도이다.
인간사의 결국은 허망하다. 그것은 그 과정에서만 나름대로 우리에게 기쁨을 준다. 그 과정 자체가 우리에게 보상이지, 그 결과로 얻는 재물과 명예는 우리에게 좋은 것이 아니다. 이것은 도리어 재앙이다. 따라서 우리는 좋은 것만 취하자. 과정에서 얻는 기쁨만 취하고 빠져나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나는 나의 마음을 지키고, 건강을 지키고, 기쁨을 지킬 수 있다. 이보다 더 나은 삶의 방식이 무어란 말인가. 재물과 명예를 추구하지 말고 더 많은 자유를 추구하렴.
되도록 여가다운 여가를 충분히 누리는 삶이 좋은 삶이다. 얼마 전 돈 잘 벌던 70대 의사가 정신없이 돈을 벌다가 문득 자기가 70이 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매우 슬퍼하며 후회했다는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세네카가 한 말 그대로지 않은가.
"누구나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 정신없이 바쁘게 지내지만 남은 인생을 준비한다는 미명하에 현재의 삶을 소비하고 있다."
우리는 야망이라는 헛된 꿈에 너무 많은 시간과 정신을 소비하고 있다. 우리의 진정한 인생은 바로 여가에 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우리 인생의 시간이라 할 수 있다.
우리 딸들은 부디 너무 바쁘게 살지 말렴. 때로는 바쁘게 살아야 할 때도 있지만, 그것이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하지 않도록 주의하렴. 아빠는 그걸 잘 못했단다. 도리어 너무 최선을 다하지 말고, 힘을 아끼며 사용했으면 좋겠다.
쓰다 보니 말이 너무 길어진 것 같구나. 오늘은 이만 줄이도록 하마.
사랑을 담아서
아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