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해(16)

장편소설

by 김기현

본가는 여전했다. 내가 결혼 전까지 쓰던 침대도, 책장도, 책도 그대로였다. 십오 년이나 펼치지 않은 추리소설 속 글자가 혹시 어디론가 도망가지는 않았을까, 싶어 무작위로 한 권 꺼내어 펼쳐 봤지만, 글자는 여전히 같은 크기로, 올바른 배열로 존재하고 있었다.

부모님도 얼핏 보기엔 여전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녹아서 작아지는 아이스크림처럼 조금씩 여위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인간의 노화는 인간을 점점 무(無)에 가깝게 만든다.

나는 배낭에서 CD 플레이어를 꺼내 아까 끊긴 부분에서부터 다시 들으면서, 관사에서 가져온 책을 하나하나 책장에 정리했다. 자리가 턱없이 부족했지만, 책 위에 책을 쌓으면 될 일이었다. 나는 내가 살면서 읽어온, 그리 많지 않은 ―약 이백 권쯤― 책을 보면서, 어쩌면 나의 내부는 이 책들의 영향 아래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내 기질의 절반쯤은 나의 부모님이 물려준 것이고 나머지 절반쯤은 이 책들을 통해 형성되었을 것이다. 물론 삶에 필요한 어떤 기교들은 책을 통해 배우는 게 아닌 직접 살을 맞대면서 배우기도 한다. 그러나 기교는 기교에 불과하다. K는 독서가 결국 제 삶에 독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K의 관념 역시도 결국 그가 읽어온 책의 영향 아래 형성된 것이다.

책 정리를 마치고는 부모님을 모시고 장어덮밥을 먹으러 갔다. 학생 때 부모님과 몇 차례 갔던 식당이었는데 여전히 건재했다. 밥알에는 윤기가 돌았고, 장어는 신선했으며, 양념은 지나치지 않고 감칠맛이 돌았다. 해가 진 후에는 운동복을 입고 공원에서 턱걸이를 예닐곱 개씩 다섯 차례쯤 수행하고는 카라반을 들으며 공원을 달렸다. 그날은 술을 마실 마음이 들지 않았기에, 육체가 수면을 강하게 필요로 할 만큼 충분히 달렸다. 그리곤 집으로 돌아와 씻고 잠들었다.

다음날 나는 늦은 아침밥을 먹고서, 오전 내내 침대에 누워 《악령》을 읽었다. 오후에는 중요한 일을 해야 했기에 에너지를 비축해 둘 필요가 있었다. 나는 독서하다가 지치면 커피를 내려 마시며 음악을 들었다. 그렇게 십 분에서 십오 분쯤 휴식하면 정신적 에너지가 회복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마치 축구선수가 전반전을 마치고 후반전을 뛰기 전에 육체를 회복시키는 것과 비슷하다.

나는 고작 두 시간쯤 독서했을 뿐인데 마치 십 킬로미터쯤 달린 것처럼 피로가 몰려왔다. 정신적 피로와 육체적 피로는 그 질감 면에서 다르지만, 활동을 일체 멈추고 에너지를 회복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나는 책을 덮고서 김석훈의 동기인 D에게 전화했다. 통화연결음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나는 다소간의 긴장감을 느꼈다. 잠시 후 그는, “여보세요?”하고 전화를 받았다. 나는 그에게 간단히 인사하고선 내 목소리를 알아듣겠냐고 물었다. 그는, “예. 안 그래도 전화하시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하고 침착한 목소리로 답했다.

나는 차에 올라 인천 송도로 향했다. D는 조금 전의 통화에서, 내가 ‘전화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가 전화를 받았을 때의 반응으로 미루어 보아 그것은 분명한 사실인 듯했다. 그는 분명히 촉이 아주 예민한 것이다. 한편 나는 D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나를 만나기로 한 점을 다소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로서는 약속이 있다는 등의 핑계를 얼마든지 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마치 진작에 나를 만나기로 마음먹은 사람처럼, 흔쾌히 장소와 시간을 정했다.

송도는 신도시답게 전반적으로 깔끔하고 세련된 도시였지만, 어딘가 피상적인 느낌이 있었다. 일단 아파트를 짓고서, 이 정도 규모의 아파트에는 이 정도 크기의 상가가 필요하겠군, 하고 세운 뒤 뚝뚝 자른 신도시의 모습은, 언뜻 그럴듯해 보일지라도 언제라도 단번에 사라질 것 같은 환영 같은 느낌이 있는 것이다. 조금 더 운전하여 다리를 건너 D와의 약속 장소에 가까워지자, 아파트가 대숲의 대나무만큼이나 빽빽했다. 하늘을 올려다보아도 하늘은 조각만 했고, 천편일률적인 건물의 외관 탓에 주변을 살피는 일은 금세 지루해지고 말았다.

나는 공원 주차장에 차를 대고 걸었다. D는 내게, 주차장에 주차하고 공원을 걷다 보면 서로 만나게 될 것이라고 단언했다. 불확실한 약속이지만, 그렇다고 그로서도 공원에 처음 오는 나에게 특정 위치를 일러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나는 급할 게 없다고 생각하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공원에는 선선한 바람이 출구 없는 핀볼 기계 속 핀볼처럼 계속 돌아다니고 있었고, 아이와 함께 산책 나온 엄마들과, 강아지와 산책하는 이들이 생기 넘치는 표정으로 초여름을 만끽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오 분쯤 걷자, 나의 눈에 공원 벤치에 앉아 있는 D가 보였다. 그 역시 나를 알아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례 같은 건 하지 않았지만, 대신 구십 도로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는 진청색의 면바지 위에 크림색의 반소매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그렇게 입고 있으니 휴가 나온 군인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아마 머리칼을 스타일링한 탓일지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고마워. 휴가 중인데도.”

D는 아닙니다, 하고 답했다. 내가 그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앉자, 그 역시 뒤따라 제자리에 앉았다. 그는 양팔을 허벅지에 기대어 자세를 낮추곤, 양손을 맞잡았다. 마치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듯이. 혹은 바닥에 떨어진 무언가를 보려는 듯이.

“아마 내가 무엇을 물어보려는지 이미 너도 알고 있겠지?”

“네.”

D가 너무 단호하게 말하는 바람에, 나는 추진력을 잃고 말았다.

“이리저리 말을 빙빙 돌려봐야 소용없겠군.”

“혹시 제가 먼저 하나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나는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중대장님께서는 이제 전역하셨는데, 왜 아직도 석훈이의 일에 미련을 가지고 계신 겁니까?”

“물론 나는 전역했지. 문을 닫고 돌아서려고 하면 얼마든지 그럴 수도 있어. 나는 특별히 따뜻한 사람은 아니니까. 그러나 적어도 석훈이가 왜 그런 말을 남기고 떠났는지 알아야 하지 않을까? 혹은 알려고 노력은 해야 하지 않을까?”

D는 미동도 없이, 여전히 양팔을 허벅지에 기대고 땅을 바라보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말했다. “나는 너희가 석훈이가 자살하는 데 원인을 제공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했어.”

D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랬다면, 너희는 헌병대 수사관에게 무언가 언질을 줌으로써 석훈이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나에게 씌웠을 거야. 하려고 하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겠지. 석훈이가 생전 생활관에서, 나에 대한 불만을 제기한 적이 있다는 말 한마디만 툭 던져놓아도, 헌병대에서는 그럴듯한 그림을 그려낼 테니까. 그런데 너희는 그러지 않았어.”

D는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는 잠시 시간을 두고 나서 말했다.

“석훈이가 저희 동기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던 건 사실입니다. 쉽게 말해 그는 외톨이였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석훈이가 자살하는 데 있어서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고 해도 부인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건 우리가 이곳에서 올려다볼 수 있는 좁은 하늘처럼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석훈이는 그보다 복잡한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복잡한 문제?”

“석훈이가 통화하는 모습을 보고 저희 동기들은 석훈이에게 여자친구가 있다고 짐작할 수 있었지만, 아무도 확신하지는 못했습니다. 석훈이가 여자친구와 관련된 질문에는 절대 함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넉 달쯤 전, 저는 외박 나갔다가 석훈이가 여자친구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석훈이도 외박 나온 참이었죠. 저 역시 그랬지만, 석훈이도 저를 마주칠 것으로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곳은 일반 병사들이 흔히 외박 때 가는 지역에서 많이 벗어난 곳이었으니까요. 그러나 그렇대도 저와 마주친 석훈이는 무척이나 당황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마치 죄를 저지른 사람처럼 여자친구를 숨기는 듯한 모습도 보였습니다. 부대에 복귀한 뒤에는 제게 오늘 본 것을 비밀로 해달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군인이 외박에 나와 여자친구를 만나는 게 부끄러운 일도 아닌데, 말입니다. 중대장님은 석훈이 발인 날을 기억하십니까?”

나는 물론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날 유난히 많이 울부짖던 여자애를 기억하실 겁니다. 피부가 하얗고 눈동자가 검은, 스무 살쯤 되는 여자애 말입니다. 그 애가 석훈이 여자친구입니다. 친척 동생이기도 하고요.”

나는 무슨 말인가 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말이 형성되지 않았다. D는 고개를 들어 바람에 휩쓸리는 나뭇잎들을 바라보았다. 바람은 마음껏 돌아다녔지만, 역시 공원 밖으로는 나가지 않기로 약속한 듯했다.

“장례식 첫날 저는 그 여자애를 보고 그 애가 제가 일전에 보았던 석훈이의 여자친구임을 단번에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그 애가 석훈이의 친척 동생인 줄은 몰랐습니다. 어느 정도 만난 여자친구라면 장례식장에 올 법하니까요. 하지만 저는 애써 제 시선을 피하는 그 애가 수상쩍게 여겨졌고, 그 애가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를 유심히 들은 결과, 그 애가 석훈이의 친척 동생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어른들은 아무도 모르고 있던 건가?”

“제 눈엔 그렇게 보였습니다.”

“그게 석훈이의 죽음과 상관이 있을까?”

“헌병대 수사관을 통해 석훈이가 ‘내가 죽으면 중대장님 때문이다’라고 말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저는 처음에 당황했습니다. 그럴 리가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장례식장에서 그 애를 본 뒤로 곧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석훈이는 죽음을 생각하면서도 치부를 들키는 게 무서웠던 겁니다. 그래서 친구라는 사람에게 괜히 중대장님 이야기를 들먹였을 겁니다. 그렇게 하면 자신이 죽었을 때 사람들의 시선은 중대장님한테 집중될 것이고, 중대장님에게 얼마쯤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겠지만, 중대장님에 대한 평판은 문제가 없으니 결국 근거 없는 추문으로 끝날 것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중대장님은 결국 문제없이 전역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테니까요.”

나는 친척 동생과 사귀었다는 사실이 그 정도로 깊은 치부가 될 수는 없지 않냐고 솔직하게 물었다. D는 아주 천천히 호흡을 내뱉었다. 그런 다음 아주 깊게, 산소가 발끝까지 전달될 정도로 집요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닐 겁니다. 저는 석훈이가 죽기 한 달쯤 전부터 유난히 초조해했고, 예민해졌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쯤 그에게 그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발생했던 건 아닌가, 하고 나름대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일?”

“더 이상 둘의 관계를 숨길 수 없게 된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게 아닐까, 하고 저는 생각하는 겁니다.

그는 거기까지 말하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지가 없는 완고한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이 내게 구십 도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이 이상 추측하는 건 망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겠지요. 따라서 제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여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그는 뒤돌아 걸었다. 나는 그가 나의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는 한 번도 뒤돌아보는 일이 없었다. 마침내 그가 나의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바는 다 했다는 확신이 들었다. 물은 나오지 않았지만, 물이 나오지 않으리라는 사실은 알아낸 것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차장을 향해 걸었다. 수영의 목소리가 내 안에서 들려왔다. 네가 할 일은 여기까지야. 나는 자그맣게 되뇌었다. 맞아, 내가 할 일은 여기까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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