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나는 본가로 돌아와 의자에 앉아 《악령》을 읽으려 했으나 전혀 집중할 수 없었다. 내 머리는 김석훈에 관한 생각에 저당 잡혀 있어 도저히 한 문단도 제대로 읽어나갈 수 없었다. 나는 밖으로 나가 걸었다. 하늘에는 아주 두꺼운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다. 도심의 소음을 흡수할 것 같은 아주 밀도 높은 구름이었다. 나는 잠시 소리가 없는 세계를 상상했다. 그건 아무래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불필요한 말은 하지 않고, 필요한 말은 글로 전한다. 클랙슨 소리 같은 걸 듣지 않고 조용히 운전한다. 음악이 사라져 버리는 건 누군가에게는 ―분명 K 같은 사람들에게는― 큰 고통이겠지만, 아무래도 나로서는 상관없다. 음악이 없는 세계라고 할지라도 클랙슨이 없고 불필요한 말이 없는 세계라면 누군가에게는 반드시 환영받는 세계일 것이다. 나는 한 시간쯤 걸었고, 눈에 보이는 스타벅스에 들어가 따뜻한 아메리카노와 루꼴라 샌드위치를 먹었다. 그리고 또다시 삼십 분쯤 걸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재즈를 삼십 분쯤 들은 다음, 운동복으로 갈아입고서 공원을 달렸다. 무선 이어폰은 꼈지만, 음악은 틀지 않았다. 아무래도 나는 음악을 원하는 마음의 크기가 작아, 일정량 이상은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다. 나는 그저 아직 더운 초저녁 아래에서 땀을 흘리며 규칙적으로 발을 내딛고 호흡했다. 그리고 그 리듬이 익숙해져 의식을 최소한으로 남겨두고 무의식에 잠겼을 때, 나는 내가 김석훈에게 호주에 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음을 떠올렸다. 나는 당직 근무를 서고 있었고, 김석훈은 나의 부관이었다. 나는 전역을 신청했지만, 병사들에게는 내가 전역한다는 사실도 가능하면 알리지 않고 있었다. 내가 먼저 병사들 앞에 나서서 전역한다고 말하는 것이, 나는 어쩐지 좀 부박하다고 느껴졌던 것이다. 그러나 그날 새벽 김석훈은, “중대장님 혹시 전역하십니까?”하고 내게 물어봤다. 나는 그가, 내가 소대장들과 주고받는 대화를 엿듣게 된 것으로 생각했다. 나는 거짓말할 이유가 없기도 하여, 다음 달 말일에 전역하게 될 것이라고 사실대로 답해 주었다. 그 뒤로 무슨 대화를 나누었던가? 그는 내게 어떤 이유로 전역하느냐고 물어봤고, 나는 호주에 있는 아내에게 갈 것이라고, 다소 건조하게 답했던 것 같다. 그 이상의 대화는 아무래도 기억나지 않았다. 인간의 기억은 필요한 것만 남기고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것은 자연 도태되게 내버려 두는 체계니까. 아마 나의 내부에서는 불필요한 대화라고 치부했던 것이다.
나는 달리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만 원이 조금 넘는 스카치위스키와 얼음이 담긴 플라스틱 컵을 샀다. 본디 달린 후에는 이런 독한 술은 어울리지 않는 법이지만, 그날은 어쩐지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고 효율적으로 취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나는 집에 도착한 뒤 몸을 깨끗이 씻은 후에, 방에 혼자 앉아 플라스틱 컵에 스카치위스키를 부어 조금씩 마셨다. 음악도 듣지 않고 책도 읽지 않았다. 대신 김석훈의 발인 날 보았던 눈동자가 검었던 여자애를 떠올렸다. 그 애의 통곡 소리가 내 귀에 또렷하게 들려왔다. 그때는 그저 뭉툭하게만 들렸던 그 소리가, 이제는 선명하고 날카롭게 내 방에서 울렸다. 마치 부드러운 피부에 날카로운 바늘이 닿는 것 같았다.
나는 호주로 떠나기까지 며칠을 반복해서 보냈다. 처음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여름의 색채가 선명해짐에 따라 달리는 시간을 초저녁에서 이른 아침으로 옮겼다는 것뿐이다. 나는 여섯 시에 일어나 달리고 돌아와 씻고, 아침을 먹은 뒤에 잠시 낮잠을 잤다. 낮잠을 자고 일어난 뒤에는 책을 읽었고, 저녁이 되면 부모님을 모시고 바깥에서 밥을 먹고 돌아왔다. 저녁에는 맥주를 두세 캔 정도 마시면서 영어를 공부하거나 수영과 통화하고 잠에 들었다. 특별히 흥분될 일은 없지만, ―누군가가 보았을 때는 다소 지루해 보일지 모르겠다― 아주 만족스러운 며칠이었다.
호주로 떠나기 전날에는 처리해야 할 일들이 몇 가지 있었다. 나는 배낭을 열어 여권과 국제운전면허증, 유심 카드가 제대로 있는지 확인했고, 삼 년 정도 탄 SUV는 세차하여 아버지에게 넘겨드렸으며, 핸드폰에는 비행기에서 볼 수 있도록 《Once upon a time in America》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괴물》을 넣어두었다. 마지막으로 K가 선물해 준 CD 플레이어와 CD를 챙기고선, 여느 때와 같이 맥주를 마시고 잠에 들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나는 부모님과 인사하고 공항을 향하는 전철에 올랐다.
6
나는 기내식으로 나온 삼치구이를 먹고서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괴물》을 보았다. 다시 보아도 정말 뛰어난 영화였다. 영화에 나오는 모든 배우의 연기가 놀라운데, 그중에서도 안도 사쿠라의 연기는 정말 인상 깊다. 그녀가 비 오는 산에서 아들 미나토를 부르는 장면에는 단순히 기교로 흉내 낼 수 없는, 상황에 몰입한 배우만이 자아내는 가슴 벅찬 울림이 있다.
나는 영화를 다 보고서 화장실에 갔다 왔다. 기내 승객들은 대부분 잠들지 못하고 좀이 쑤신 듯 뒤척였다. 잠에 들기를 포기한 승객들은 일행과 담소를 나누거나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는 승객은 몇 없었다. 나는 캔 맥주를 한 캔 주문해 마시며 《Once upon a time in America》를 보았다. 역시 매우 훌륭한 영화였다. 제아무리 뛰어난 감독일지라도 인생에 한 번이나 두 번밖에 만들 수 없는, 제 안의 재료와 에너지를 모두 쏟아부은 듯한 영화였다. 나는 영화를 절반쯤 보고서 두 번째 기내식인 피자를 먹고 빨려들 듯이 잠들었다. 꿈에서는 내가 아직 군인이었고, 거울을 보니 젊은 시절 드 니로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 옆에는 안도 사쿠라가 서 있었다. 그런 꿈이었다.
비행기에서 내렸을 때는 오후 일곱 시쯤 되었는데, 멜버른의 저녁 하늘은 한국의 자정만큼이나 캄캄했다. 어둠이 드리운 지 아주 오래된 듯 보였다. 나는 수영에게 전화해 호주에 도착했음을 알렸다. 그녀는 자신은 출근 준비 중이라 아마 만나긴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열쇠는 리셉션에 맡겨 둘 테니 이름을 말하고 찾으면 돼”하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알겠다고 답했다.
나는 예약했던 자동차를 수령하고 차에 올랐다. 운전석이 우측에 있는 건 그다지 어색하지 않았는데, 도로에 올랐을 때 몇 번이나 방향지시등 대신 와이퍼를 켠 탓에 무척이나 당황했다. 다행인 것은 멜버른의 운전자들은 꽤 친절하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함부로 경적을 울리지 않았고, 방향지시등을 켜면 쉽게 자리를 내어주었다. 나는 삼십 분간 운전해 목적지에 도착하여 리셉션에서 열쇠를 수령한 뒤, 주차장에 진입해 주차했다. 주차장에는 각 호수에 따라 주차 자리가 지정되어 있어 편리했다.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얼굴이 작고 수염이 짙은 한 남자는 내게 Hello, 하고 인사하며 미소 지었다. 나는 마찬가지로 미소 지으며 인사했다. 내가 내릴 때가 되어 캐리어 두 개를 바깥으로 빼는 동안 그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지 않게 잡아주었다. 나는 고맙다고 인사했고, 그는 No, problem, 하고 신사다운 태도로 답했다. 나는 새로운 나라에 왔음을 실감했다. 그러나 아직 호주에, 멜버른에 도착했다는 감각은 선명하지 않았다.
집은 매우 깔끔했고 충분하게 넓었다. 집에서도 신발을 신는 서구 문화의 영향을 받은 건지, 집 내부에는 전실(前室)이 없어 어색했지만, 나는 새로운 도시에 온 사람이니 새로운 문화에 적응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방과 화장실을 둘러보았다. 방에는 퀸사이즈의 침대가 하나, 그리고 옷을 걸 수도 있고 개켜 보관할 수도 있는 옷장이 하나, 침대 양옆으로는 작은 협탁과 등이 하나씩 있었다. 화장실에는 세탁기가 있었고 세면대와 변기, 그리고 샤워할 수 있는 공간이 나란히 있었다. 욕조가 들어갈 만큼은 아니지만, 절대 좁다고 할 수 없는 공간이었다. 거실 끝에는 발코니도 있었는데, 그곳에는 빨래 건조대가 놓여 있고 수영이 집에서 입는 파자마와 그녀의 운동복이 보기 좋게 널려 있었다. 나는 새삼 이곳이 한국과 다른 공간임을 실감했다. 아무래도 한국에서는 빨래 건조대 같은 것은 잘 쓰지 않으니까.
나는 캐리어와 배낭을 열어 짐을 정리했다. 옷은 옷장에 넣고, 우리의 사진을 인화해 넣어둔 앨범은 거실 책장에, CD 플레이어는 티브이 옆에 두었다. 러닝슈즈를 신발장에 넣으려고 보니, 수영이 내가 신을 샌들을 사놓았음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이미 우리의 생활에 필요한 것을 꼼꼼하게 준비해 둔 것이다. 나는 그곳에 내 몸을 끼워서 맞추기만 하면 되었다. 나는 밖을 좀 돌아다녀야겠다, 싶어 히터를 끄고서 겨울용 면바지에 맨투맨 티셔츠, 바람막이를 걸치고 집을 나섰다.
집 근처에는 불빛이 거의 없었다. 이미 사람들이 잠자리에 들기로 마음을 먹은 모양이었다. 나는 혹시라도 헤매지 않기 위해 블록을 세며 숙소 근처를 걷다, 생맥주를 취급하는 작은 호프에 들어갔다. 그러나 호프는 벌써 가게를 마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직원으로 보이는 동양인의 여성이 내게 다가와 가게를 닫을 거라고(We are closing the store now) 말했다. 그녀는 키가 작고 눈이 컸으며 눈동자가 유난히 검었다. 나는 알겠다고 답한 뒤 가게를 나왔다. 그리고 다소 우울한 기분으로 근처의 작은 마트에 들어가 저렴한 레드와인 한 병과 마카다미아, 그리고 포테이토 칩을 사서 집으로 돌아갔다.
현관문을 열자, 집에는 전과 다르게 냉기가 돌았다. 고작 삼사십 분간 히터를 꺼두었을 뿐이었는데. 호주의 겨울이란 그렇듯 은근한 모양이었다. 나는 히터를 켜고 소파에 앉았다. 히터가 윙윙대며 따뜻한 공기를 발산했다. 나는 여전히 현실을 정확히 짚을 수 없다, 고 생각했다. 나는 비행기가 정확히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앉아 있다, 착륙하는 대로 내렸을 뿐이다. 내가 탄 비행기가 어떤 차원을 통과하여 나를 제2의 세계로 데려다 놓은 것은 아닐까? 그리고 제2의 세계에는 진짜 수영이 아닌, 그녀의 복제 인간이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은 그녀의 그림자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머그잔에 와인을 따라 마셨다. 그리고 마카다미아와 포테이토 칩을 씹었다. 내일이 되면 알 일이다, 나는 그렇게 되뇌었다. 내일 아침이면 수영이 이곳에 올 것이고, 나는 그녀를 보면 그녀가 진짜인지 아닌지 단번에 알 수 있다.
와인을 한 병 다 마시고 나자, 참을 수 없이 잠이 쏟아졌다. 나는 서둘러 몸을 일으켜 양치하곤 불을 끈 뒤 다시 소파에 돌아와 누웠다. 수영이 없는 침대는 아직 내 자리가 아닌 듯했다. 나는 파도처럼 덮치는 잠을 받아들이며, 이 땅에 처음 발을 들였을 사피엔스들에 대해 생각했다. 약 사만 년 전 사피엔스들은 현 인도네시아에서부터 아주 힘겹게 노를 저으며 새로운 대지를 찾아 나섰을 것이다. 배를 뒤집을 듯한 바람과 거센 파도에 맞서고, 한밤의 고독한 어둠과 고래의 울음소리가 자아내는 공포를 이겨내어 마침내 이 대륙의 땅을 밟았을 때, 그들은 마침내 새로운 땅에 왔음을 실감했을 것이다. 새로운 땅에는 그렇게 닿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고작 비행기를 열 시간쯤 탔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