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해

장편소설

by 김기현

다음날 나는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다. 시계를 보니 벌써 여덟 시가 지나고 있었다. 아무런 꿈도 없이 아홉 시간이 훌쩍 지난 것이다. 마치 누락된 듯이. 내가 잠에서 깼다는 사실을 안 수영이 내게, “왜 소파에서 잤어?”하고 걱정스레 물었다. 나는 몸을 일으켜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마트에 들렀는지 한 손에 천으로 된 장바구니를 들고 다른 손에는 가방을 들고 있었다. 그녀는 능숙하게 신발을 벗고 한쪽으로 치웠다. 나는 그녀의 움직임을, 그녀의 얼굴을, 그녀의 눈빛을 흘리지 않고 꼼꼼히 살폈다. 그녀는 “왜?”하고 내게 물었다.

“진짜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뭘?”

“겉모습을 얼마든지 능수능란하게 바꿀 수 있는 외계인이 내 아내를 흉내 낼지 모르니까.”

수영은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능수능란하게 바꿀 수 있는데, 당신이 무슨 수로 진짜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겠어?”

“나는 알 수 있어”하고 내가 말했다. 그리고 나는 몸을 일으켜 수영을 품에 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는 쿡쿡, 웃으며 나를 밀어냈다. 그리곤 “어때?”하고 물었다. 나는 진짜가 확실하다고 말했다. 그녀는 여전히 쿡쿡대며 빵과 달걀을 굽겠다고 말했고, 나는 좋다, 고 답했다. 수영이 옷을 갈아입을 동안 나는 양치하고서 수염을 밀었다. 새로운 칫솔, 새로운 치약, 새로운 면도기와 새로운 면도용 크림이었다. 모두 처음 보는 제품이었음에도, 그 모든 것이 그리 낯설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한 법이니까.

수영이 버터를 녹여 크루아상과 달걀을 굽는 동안 나는 물을 끓여 커피를 내리고, 수영이 마실 우유를 데웠다. 우리는 마주 앉아 빵과 달걀을 먹었다. 나는 커피를 마셨고 수영은 우유를 마셨다. 빵은 매우 고소했고 달걀은 부드러웠다. 커피는 그리 맛있지는 않았지만, 몸을 따뜻하게 데워 주었다. 그녀가 어제 저녁에는 별일 없었냐고 묻기에, 나는 생맥주를 마실까, 하고 호프에 들어갔으나, 금세 문을 닫더라고 말했다. 수영은 웃으며 “벌써 제2의 K를 찾으려는 거야?”하고 물었다. 나는 그러나 잘 안 될 것 같다고 말한 뒤, 의자에서 일어나 K가 선물해 준 CD 플레이어를 켰다. 수영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오, 하고 감탄했다.

“K가 준 작별선물.”

수영은 우유를 마시며 “작별”하고 읊조렸다. 마치 제 삶에 작별이 어디에, 어떤 크기로 존재해 있었는지 시간을 들여 생각해 보는 듯했다.

수영이 잠자리에 들고서, 나는 공원을 달리기로 마음먹었다. 수영은 밖에 나갈 때 열쇠를 잃어버리지 않게 주의하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러고 보면 열쇠로 현관문을 연 지가 도대체 몇십 년만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아마 이십 년은 되었을 것이었다. 나는 운동용 긴 바지와 반소매 운동 티셔츠, 그리고 바람막이를 입고 집을 나섰다. 문을 잠근 뒤 열쇠는 주머니에 꼭 넣어 지퍼를 잠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남자는 내게 Good morning, 하고 인사했다. 나도 가능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와 같은 방식으로 인사했다. 그러나 어쩐지 스스로 자연스럽지 않다고 느껴졌다. 나는 이웃과 소리 내어 인사하던 사람이 아니니까.

거리는 쌀쌀했지만, 춥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분명 한낮에는 잠시나마 포근하다고 느낄만한 날씨였다. 다행스럽게 집의 건너편에는 아주 큰 공원이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공원은 로열 보타닉 파크였다― 있었다. 나는 아주 농밀한 산소를 들이마시며 서서히 달리기 시작했다. 벌써 아홉 시가 넘었음에도 공원에는 달리는 사람이 많았다. 무선 이어폰을 끼고서 혼자 묵묵히 달리는 러너, 친구인지 자매인지 알 수 없으나 서로 말을 주고받으며 달리는 러너, 대여섯 명이 그룹이 되어 빠른 속도로 달리는 러너, 개와 함께 속도를 맞춰 달리는 러너 등 모두 제각각이었다. 과연 수영의 말대로였다. 나는 수많은 러너를 보며, 정말 이 공원 혹은 이 도시 어딘가에는 러너들을 끌어당기는 자력 같은 게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자력은 다름이 아닌 나무에 있을지도 몰랐다. 노거수들이 발산하는 산소가 사람들로 하여금 뛰고 싶게 만드는 것이다. 나는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사람들을 관찰하며 무턱대고 길을 따라 이십 분 정도를 달렸다. 곧 폭이 좁고 긴 강이 나타났고 오리가 트랙 위를 걷는 것이 보였다. 오리는 열댓 마리씩 무리 지어 유유히 산책했다. 나는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그들은 반응이 없었다. 나는 나중에야 내가 그들에게 한국어로 인사했음을 깨달았다. 그들이 한국어를 알 리는 없었다.

나는 사십 분쯤 달렸을 때, 이제 갓 성년의 길로 접어든 것으로 보이는, 키가 큰 금발 머리의 청년이 공원에 비치된 식수대 앞에 서서 허리를 구부려 물을 마시곤,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를 따라 식수대에서 물을 몇 모금이나 마셨다. 깨끗한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갈증이 즉각 해소되는 차가운 물이었다. 이후 나는 이십 분을 더 달려서 한 시간을 채우고서 맥박이 정상으로 돌아오는 것을 느끼며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그제야 내가 다른 나라에, 다른 도시에, 정확히는 멜버른에 왔음을 깨달았다.


7

나는 집으로 돌아와 몸을 깨끗이 씻어내고 옷을 갈아입은 뒤, 도요타의 중고차 가게로 향했다. 이왕이면 걸어서나 대중교통으로 통근할 수 있는 직장을 구하는 게 좋겠지만, 발길이 쉬이 닿는 곳에는 언제나 사람이 몰려들기 마련이다. 게다가 나는 당장에 생활비를 버는 것을 넘어, 앞으로 오랜 기간 나의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해 줄 직업을 가져야 했다. 수영은 내게 찬찬히 영어를 공부하면서 이 주에서 삼 주쯤 휴식한 뒤에 일을 구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지만, 나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아내가 일하고 있는 상황에서 가만히 집에 앉아 책만 읽을 수는 없는 노릇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나는 리듬이 안 잡히면 갈피를 못 잡는 성격이기 때문에, 일거리가 필요했다. 중고차 가게에 도착한 나는 특별히 따져보지 않고서 소형 SUV를 선택했다. 어느 도로에나 있을 것 같다는 게 그 이유였다. 안내인은 차의 세부적인 부분을 확인시켜 주고서, 계약을 마치면 원하는 곳에 차를 가져다줄 수 있다고 말했다. 나는 계약서를 시간을 들여 꼼꼼히 따져 읽고 서명한 뒤, 그 길로 공항으로 돌아가 기존의 렌터카를 반납했다. 집에 돌아올 때는 버스에 올랐다.

나는 집에서 과일주스를 한 잔 마신 뒤 밖으로 나왔다. 그날은 해가 지기 전에 도시를 충분히 살펴볼 계획이었다. 나는 지도를 확인하여 플린더스 스트리트역 방면으로 길을 따라 걸었다. 맞은편에는 내가 달렸던 로열 보타닉 파크가 있었고, 도로 가운데에는 트램이 다니는 철로가 있었다. 이편에는 전쟁 박물관이, 다음에는 아트홀이 나왔다. 아트홀 부근에는 여러 인종의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그들을 관찰하느라 조금도 지루할 틈새가 없었다. 그중에는 백인이 제일 많았는데, 그들은 모두 키가 컸다. 특히 백인 여성들은 백칠십 센티미터가 훌쩍 넘는 이들도 많았다. 동양인들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그들은 친구와 대화하거나 통화를 하면서 영어를 구사했는데, 이곳에 이삼 년 살았다고 해서 내뱉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나는 아마 이곳에서 태어나 자란 동양인들도 적지 않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어떤 이들은 인종의 구분이 무의미할 만큼 특별한 인상을 띄고 있었다. 아마 이 도시에는 진작에 여러 인종이 모여들었고, 인종을 초월하여 만나 결혼한 이들이 자식을 잉태하여 낳고 키운 것의 결과일 것이다.

나는 플린더스 스트리트역이 있는 사거리에 도착해 가만히 서서 역 건물과 세인트폴 대성당을 번갈아 구경했다. 두 건물 모두 상당히 고풍스러운 멋이 있었다. 일시적으로 멋을 내고 금세 빛을 잃고 마는 건물과는 성격이 달랐다. 건축에 참여한 이들이 자부심을 품고 공을 들인 것이 분명하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성당에서 영앤잭슨으로, 영앤잭슨에서 플린더스 스트리트역으로, 혹은 그 반대로 바삐 움직였다. 나는 그들이 무엇을 위해 이렇게 바삐 움직여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목적을 잃고 멍하니 서 있다가, 띵, 하고 출발을 알리는 트램의 소리를 듣고 트램을 따라 걸었다. 그리고 퀸즈 브리지 앞에 있는 카페에 들어가 뜨거운 커피를 마셨다. 솔직히 정말 맛없는 커피였지만, 일렁이는 야라 강과 퀸즈 브리지 위를 지나가는 트램, 그리고 날아다니는 새를 보는 것은 정말 흡족했다. 새는 심심해 보이는 나를 위해 때때로 품을 들여 물살을 가르며 활공했다. 정말 멋이 있었다. 여태 새의 자유로운 날갯짓을 보면서 단 한 번 감동한 적이 없는 나도, 저러한 활공을 한 번이라도 해본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루한지도 모르고 뜨거운 커피가 완전히 식을 때까지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치 달지 않고 고소한 맛이 뛰어난, 갓 구운 따뜻한 빵을 먹는 것과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한 시간쯤 카페에 머문 후, 수많은 인파를 뚫고서 빅토리아 주립 도서관까지 걸었다. 거리에는 악사가 넘쳐났다. 싱어가 있었고, 바이올리니스트도 있었고, 단소같이 생긴 악기를 연주하는 이가 있었다. 아쉽게도 색소폰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도서관 앞에는 사십 마리쯤 되는 비둘기가 잔디에 앉아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회색 비둘기와 백색 비둘기가 조화롭게 섞여 있었고, 대체로 성격이 온순해 보였다. 그들만큼이나 다양한 피부색의 사람들은 제각각 벤치나 잔디에 앉아 있고 또 서 있었는데, 앉아 있는 이들은 하염없이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고, 서 있는 이들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보였다. 나는 건물로 들어가 계단을 올랐다. 엘리베이터가 있었지만, 대칭으로 된 고풍스러운 계단을 오르는 일은 전혀 힘들거나 지루한 일이 아니었다. 도서관의 중심부는 정팔각형의 형태로, 여덟 개의 면에는 고서들이 꽂혀 있고, 이십 미터도 넘는 층고 끝에는 파란 하늘을 볼 수 있는 천창이 있었다. 효율성 면에서는 어떤지 알 수 없지만 분명 이곳에서 무언가 작업한다면 상상력을 최대치로 발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도서관 이용객들은 대체로 노트북을 켜놓고 무언가 과제나 업무에 몰두하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지루하다는 듯이 삐딱한 자세로 앉아 핸드폰을 보고 있기도 했다. 진지한 태도로 독서에 임하는 이는 찾을 수 없었다. 나는 팔각형의 구조를 따라 천천히 책을 살펴본 뒤 《The immigrant》라는 책을 꺼내어 앉아 읽었다. 호주의 이민 역사를 다룬 책이었다. 모르는 단어가 끊임없이 튀어나와 아예 핸드폰을 사전 삼아 켜 놓은 뒤 읽어야 하는 실정이었지만, 문장을 이해했을 때는 마치 퍼즐을 맞추는 것 같은 쾌감이 있었다. 나는 영어 공부와 다름없는 독서를 하다가 허기를 느끼곤 시간을 확인했다. 한 시간쯤 흘러 있었고, 고작 열세 페이지쯤 읽었을 뿐이었다. 나는 책을 제자리에 꽂고 도서관에서 나와, 집에 돌아가는 길에 발견한 피자 가게에 들어가 마르게리타 피자를 두 조각 먹었다. 한국의 피자와 달리 토핑이 적고 치즈가 많았다. 치즈는 아주 고소했고 바질 향이 풍부했다. 매우 훌륭한 피자였다. 피자 가게에서 나온 뒤에는 마트에 들어가 배러 먼데라는 생선과 저렴한 화이트 와인을 두 병 샀다. 영앤잭슨에서 플린더스 스트리트역 방면으로 건너가자, 두 명의 사내가 길가에 책을 쌓아 놓고 팔고 있는 듯 보였다. 가까이 가보니 대부분 페이퍼백이었지만, 중고는 아닌 듯 보였다. 분명히 새 책들이었다. 그럼에도 책은 모두 무료(Free)라고 쓰여 있었다. 내가 한 사내에게 왜 책을 무료로 나눠 주냐고 묻자, 그는 그것이 신의 뜻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책을 훑어보니 책은 모두 지저스 크라이스트와 관련한 책들이었다. 그는 내게 중국인이냐고 물었다. 나는 웃으며 한국 사람이라고 답했다. 그가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북한에 가보았느냐고 묻기에, 나는 그건 아주 위험한 일이라고 웃으며 답했다. 나는 진열된 책을 살펴본 뒤, 《Steps to Christ》라고 적힌 얇은 책을 한 권 골라 이것을 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그는 그 책은 아주 좋은 입문서라고 칭찬하며 비닐백에 넣어주었다. 나는 고맙다고 인사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생선과 와인을 냉장고에 넣으면서, 벌써 이 도시에 꽤 적응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곧 내가 이 도시에 온 지 아직 스물네 시간도 안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체감하는 시간이란 이토록 얼마든지 들쭉날쭉한 것이다.

나는 양치하고서 커피를 내렸다. 아직 오후 다섯 시였음에도 벌써 창밖은 검었고 저 너머의 마천루는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래, 이곳은 겨울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별로 춥지는 않지만, 분명히 겨울인 것이다. 그리고 겨울은 낮이 짧고 밤이 긴 법이다. 그것은 물론 지구와 태양의 관계성 탓이지만, 그러한 과학적 설명보다 조금 더 이를 직관적으로 설명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예컨대 겨울은 실외에서 시간을 보내기에 적합한 계절이 아니므로, 인간으로 하여금 얼른 실내로 돌아가게끔 재촉하는 것이다.

나는 책장에서 테네시 윌리엄스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꺼내어 소파에 앉았다. 책에서는 아주 오래된 헌책방에서나 날법한 퀴퀴한, 그러나 전혀 기분이 불쾌하지 않고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는 냄새가 났다. 책은 아마 인쇄된 지 오십 년은 되었을 법한 낡은 종이였음에도, 어디 한 군데 찢어진 데 없이 잘 관리되어 있었다. 아마 앞으로도 잘 관리한다면 향후 오십 년은 더 읽을 수 있을 듯 보였다. 나는 손바닥보다 조금 큰 책을 아무렇게나 펼쳐 보았다. 나는 벌써 그날만 석 잔째인 커피를 마시며 1막 1장을 펼쳤다. 고어가 많은 탓에 지문은 이해하기 어려워 대화문만을 읽어야 했다.

수영이 깨어난 건 내가 커피잔을 거의 비웠을 때였다. 그녀는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나를 신기한 듯이 바라보았다.

“아주 자연스러운데?”

“그래?”

“응. 벌써 여기 몇 달 산 사람 같아.”

나는 수영이 마실 커피를 내리기 위해 물을 끓였다. 수영은 내게 오늘 하루는 어떻게 보냈는지 물었다. 나는 공원을 달린 뒤 중고차를 계약했고, 공항으로 가 렌터카를 반납하고 돌아왔으며, 야라 강 위를 날아다니는 새를 바라보면서 커피를 마셨고, 빅토리아 주립 도서관에서 책을 한 시간쯤 읽은 뒤에, 맛있는 마르게리타 피자를 먹고 장을 봐 집으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그리고 삼 초쯤 지난 뒤에 무료로 받은 책을 집어 들며 이 책은 길에서 무료로 나누어 주었다고 자랑스러운 듯이 말했다.

“대단해.”

“내일은 몇 군데 일을 알아볼 예정이야.”

그녀는 “어떤 일?”하고 물어보며 소파에 앉았다.

“일단 일 년쯤은 닥치는 대로 아무 일이나 해볼 생각이야. 그 과정에서 무언가 제대로 하면 좋겠다, 싶은 일을 찾게 되지 않을까?”

수영은 나의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이미 말했지만, 천천히 해도 좋아. 당신은 불과 얼마 전까지 군인으로서 성실히 일해 왔으니까.”

나는 끓는 물을 조심스레 드립백에 부었다. 고소하면서도 향긋한 향이 포근한 기운을 품고 퍼졌다.

“어때? 한국이 그리운 마음 같은 건 들지 않아?” 내가 물었다.

“솔직히 말해 앞으로도 그런 마음은 들 것 같지 않아.” 그녀는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곳에서의 삶에 막연한 기대를 하고 있는 건 아니야. 이곳에서의 삶도 결국 권태로워질 것이고, 나쁜 경우 어떤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그때가 되면 그때의 지혜로 헤쳐 나갈 수 있을 거야. 게다가 너를 선택한 것도, 이곳을 선택한 것도 나니까. 어떤 일이 생기건, 나는 타인을 탓해서는 안 될 거야. 그런 점에선 정당하다고 생각해.”

나는 드립백을 거두어 버리고선, 커피를 그녀 앞에 가져다주었다. 그녀는 미소로 화답했다.

“이곳을 달려보니 어때?” 그녀가 물었다.

“달리기 시작한 지도 벌써 오륙 년이지만, 새롭게 느껴졌어. 더 가볍고 더 상쾌했어. 그건 노거수들이 발산하는 산소 덕분일까?”

“그럴 거야. 이곳의 나무들에게는 분명히 그런 힘이 있어. 나는 한국에서 달려보지 않아 비교해서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이곳에서 달릴 때면 분명 자연의 힘을 실감해. 생명력이라는 단어 말고는 다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힘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그녀의 옆에 앉았다.

“내일 저녁은 같이 밖에서 먹자. 같이 가고 싶은 데가 있어.”

“물론 좋아”하고 나는 답했다. “오늘은 생선을 사 왔으니까, 생선을 구워줄게.”

창밖에는 어김없이 완전한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도저히 여섯 시라고 보기는 어려운, 밤새들을 빼고는 모두 잠에 든 자정처럼 보이는 농밀한 어둠이었다.

“어둠이 참 빨리 찾아오지?” 그녀가 말했다.

“분명히 그런 것 같아.”

“여기 사람들은 어둠이 찾아오면 일찍 집으로 들어가. 어떤 사람들은 공원을 달리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바에 들어가 저녁 겸 와인이나 맥주를 몇 잔 마시기도 하겠지만, 딱 그뿐이야. 아홉 시, 열 시만 되어도 거리는 텅 비어.”

“한국과는 분명히 다른데.”

“맞아.” 그녀가 말했다. “한국과는 분명히 다르지. 당신은 이제 이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해. 지난 일은 뒤에 두고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나는 이제 다음 스텝을 밟아나가야 한다. 지난 일은 뒤에 두고서.

우리는 배러먼디를 구워서 저녁을 먹었다. 매우 부드럽고 맛이 좋은 생선이었다. 수영은 밥을 먹었고, 나는 밥 대신 화이트 와인을 절반쯤 마셨다. 식사를 마친 수영이 출근 준비하는 동안, 나는 설거지를 한 후에 남은 화이트 와인을 마시면서 어제 보았던 코미디 드라마를 이어서 보았다. 어디까지나 이들의 언어에 익숙해지기 위함이었다.

수영이 준비를 마치자, 우리는 함께 집을 나섰다. 거리는 컴컴하고 고요했다. 오토바이가 아닌 자전거가 피자나 햄버거 따위를 싣고 천천히 자전거 도로를 지났고, 자동차들은 경적을 울리는 법 없이 조용히 갈 길을 갔다. 바람은 고요하게 불어와 나무를 흔들었지만, 나무는 잠에 들었는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또한 아침과 달리 새들이 큰소리로 지저귀지 않는 것을 보니, 그들도 저녁 시간만큼은 에티켓을 중시하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손을 잡고 걸으며 어두운 밤 특유의 차갑고 촉촉한, 게다가 산소가 농밀한 공기를 기분 좋게 들이마셨다.

“만약에 말이야.” 그녀가 말했다. “같이 일하는 예쁜 여자가 일 끝나고 같이 저녁 먹자고 하면 어떡할 거야?”

“안타깝지만, 집에 아내가 기다리고 있어서요, 하고 말해야지.”

“안타깝다는 말이지?”

나는 입술을 깨무는 아내를 보며 웃었다. 그녀가 다니는 병원은 집으로부터 걸어서 십오 분 거리에 있었다. 나는 그녀가 병원 건물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본 뒤, 어제 갔었던 호프로 향했다.

호프에 들어가자, 어제 보았던 일본인으로 보이는 종업원이 나를 다소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녀는 내게 구십 분 뒤 가게를 마감할 것이고, 육십 분 뒤 주문이 마감이라고 친히 설명해 주었다. 나는 충분하다고 답한 뒤 카운터 석에 앉았다. 가게에 나를 제외한 손님은 세 명의 남자와 한 쌍의 커플뿐이었다. 커플은 다소 진중한 태도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남자들은 다소 흥분하여 떠들고 있었지만, 모두 그다지 취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나는 어쩌면 이 도시에서는 지나치게 취하는 일이 타인에게 폐가 된다고 여길지도 모른다고 판단했다. 나는 우선 생맥주를 한 잔 주문한 후 이후에 안주를 주문해도 되겠냐고 물었는데, 종업원은 이곳에서는 꼭 안주를 주문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주었다. 나는 고맙다고 말했다. 잠시 후 그녀는 생맥주를 가져다주며 내게 여행 중이냐고 물었다. 나는 일하러 왔다, 고 간략하게 답했다. 그녀는 미소 지으며 자신도 일하러 왔다고 말했다. 내가 그녀에게 내 생각에 당신은 일본인인 것 같다고 정중하게 말하자, 그녀는 이번에도 미소 지으며 맞다고 답했다.

“제 발음이 서투르기 때문이겠죠?”

그녀가 묻기에, 나는 그저 인상으로 추측한 것뿐이고 영어 실력이라면 당신이 나보다 좋은 것 같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미나코, 라고 소개하며 내게 한국에서 왔냐고 물었다. 내가 어떻게 알았냐고 묻자, 그녀는 한국 남자들은 친절하다고 답했다. 나는 사실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말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대신 나는 당신들이 제일 친절하지 않냐면서 웃었다. 그녀는 해말갛게 웃으며 일본어로 고맙다고 인사했다.

생맥주는 다소 무거웠다. K가 내려주는 생맥주에 비하면 맛없는 맥주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가격은 상상 이상이었다. 맥주 한 잔의 가격이 화이트 와인 한 병의 값과 같았다. 나는 앞으로는 이러한 맛없는 생맥주조차 특별한 날이 아니면 맛볼 수 없게 되었다고 다소 우울하게 생각하며 맥주를 마셨다. 그리고 미나코라는 이름에 대해 생각했다. 어쩐지 익숙한 이름이라고 생각되었다. 나는 내가 읽은 일본 소설이나 보았던 영화에 그러한 이름이 등장한 적이 있는지 잠시 생각했지만,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건너편에 있는 미나코에게 이곳에 온 지는 얼마쯤 되었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이제 이 년 차에 접어들었다고 답했다. 예상한 대로 그녀는 이곳에 꽤 적응한 사람이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영어를 그렇게 자연스럽게 구사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미나코는 내게 대학생이냐고 물었다. 나는 손을 내저으며 나는 이미 서른 살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얼마쯤 놀란 것 같았다. 나는 아무래도 서른 살이나 되어 아르바이트하러 오는 외국인이 얼마나 되겠나, 하고 다소 씁쓸하게 생각했다. 그녀가 내게 한국에서 무슨 일을 했느냐고 묻기에, 나는 사실 군인이었다고 말해 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한국 남자는 모두 군대에 가지 않느냐고 말했다. 나는 웃으며 맞는 말이라고 답했다. 우리의 대화에는 분명 다소간 오류가 있었겠지만, 그건 그런대로 나쁘지 않았다.

나는 생맥주를 다 마신 후에 두 번째 생맥주를 주문했다. 그리고 그녀가 내게 맥주를 가져다주었을 때, 나는 그녀에게 당신은 어느 도시에서 살았냐고 물었다. 그녀는 요나고에서 태어나 쭉 자랐다고 답했다. 이어서 그녀는 내게 요나고라는 도시를 아냐고 물었다. 나는 사실 잘 모르겠다고 솔직하게 답했다. 그녀는 돗토리현 내에 있는 작은 도시라고 보충 설명해 주었는데, 나는 돗토리현이라는 지명이 분명 예전에 읽었던 소설에 언급되었었음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어쩌다 호주에 오게 되었는지 물었다.

“좋아했던 남자가 있었거든요. 그에게서 도망친 거예요.”

사정은 모르지만, 일본에서 호주까지 도망칠 필요가 있었을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주위를 한 차례 둘러보았다. 그녀는 딱히 해야 할 일이 있는 것 같지 않았고, 그녀가 잠시 손님이랑 대화한다고 해서 문제 삼을 사람도 없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에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해 줄 수 있는지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주방에서 물을 한 컵 가져와 한 모금 마셨다.

“그는 제가 일하던 어학원의 원장님이었어요. 매우 온화하고 지혜롭고, 또 성실하고 윤리적인 사람이었죠. 그는 주변 사람을 늘 소중하게 대하고 세심하게 배려했어요. 늘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이고 존중했죠. 그러나 그는 사람을 가까이 두고 친밀하게 교류하는 종류의 인간은 아니었어요. 그 편보다는 오히려 타인과 어울리지 않는 고독한 인간에 가까웠죠. 그는 분명 혼자만의 시간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는데, 그럼에도 누군가 그의 고독을 깨고 그를 불러내면, 그는 늘 미소 지으며 문을 열고 나왔어요. 그는 어린 학생이라고 절대 함부로 대하지 않았어요. 학부모를 대하는 태도와 어린 학생들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지 않았죠. 같이 저녁을 먹으러 오가는 길에, 오래전 학원에 다닌 적이 있는 학생과 마주치면 늘 친절한 태도로 인사하며 안부를 묻곤 음료수라도 한 잔 사 주는 그런 사람이었어요. 저는 그런 그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러나 이는 분명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는 결혼했고 아이도 있었어요. 저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그를 좋아한 거예요. 그러나 누군가를 일단 좋아하고 나면, 그런 마음은 떨쳐내기 쉽지 않죠. 특히 매일 같이 얼굴을 봐야 하는 경우는 더더욱이요. 그러나 저는 그가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고 난 이후부터 그를 좋아하는 마음만으로 그의 아내와 그의 아이들에게 죄를 짓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그를 떠나야겠다고 마음먹었죠. 대학 생활을 했던 도쿄로 돌아가서 생활하는 것도 하나의 선택지였어요. 그러나 도쿄에 가보았나요? 그곳은 정말 암울해요. 오직 실용성이라는 기준 아래 지어진 기계적 도시일 뿐이죠. 저는 정말 요나고를 떠나고 싶지 않았어요.”

“그러나 결국 떠나게 되었군요.”

그녀는 우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정말 요나고라는 조용하고 소박한 도시에서 자란 온화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게 좋았어요. 도쿄로 떠나 그곳에서 자란 부잣집 아이들을 가르칠 생각을 하니 우울하더군요. 그렇다고 아예 가본 적도 없는 도시에 가고 싶지는 않았고, 그럴 만한 명분도 없었어요. 이런저런 이유를 대면서 그에게서 떠나는 것을 미루었죠. 저는 무엇보다 그에게서 떠나고 싶지 않았던 거예요. 저는 어느 날 학원을 마치고서 그에게 맥주를 사 줄 수 있냐고 물었어요. 맥주 같은 걸 마시고 싶었던 건 아니고, 그를 시험하고 싶었던 거죠. 그는 맥주를 사 주는 건 어렵지 않지만, 같이 마셔주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말하더군요. 역시 그다웠어요. 그는 그런 사람이에요. 자신이 한 번 약속한 관계에 금이 갈 행동 따위는 안 하는 그런 남자죠. 저는 그에게 학원을 그만두겠다고 말했어요. 그제야 그는 다소 당황했어요. 제가 그 순간 쾌감을 느꼈다고 하면, 부끄러운 일이겠죠? 나무같이 단단한 그를, 저로 인해서는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것 같던 그를 조금이라도 흔들었다는 데에서 쾌감을 느낀 거예요. 그는 어두워진 얼굴로 잠시 생각하더니, 혹시 불편 사항이 있으면 말해 달라, 만약 급여 문제라면 급여 인상을 고려하겠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제 월급은 결단코 적지 않았어요. 오히려 제가 일하는 환경과 시간을 고려하면 많았죠. 저는 그러한 문제가 아니라고 말했어요. 그리곤 대뜸 그에게 안겨봐도 되냐고 물었어요. 물론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죠. 비난받을 일이에요. 그러나 저는 그가 거절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그저 나에게 사랑을 줄 수 없는 그가 미워, 한번 할퀴고 싶었던 것뿐이죠. 그의 도덕성을 흔들고 싶었어요. 만약 그 순간 그가 저를 안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제가 여전히 그를 좋아했을까요? 제가 좋아한 그의 모습은 옳고 그름이 분명하고 삶이 일관되며 윤리적인 삶을 추구하는 모습이었는데도? 여자란 그렇게 모순적인 존재예요. 한없이 지고지순한 사랑을 원하지만, 내 남자가 나로 인해서는 금기가 깨졌으면, 하는 그런 불순한 마음을 가지고 있죠. 하지만 역시 그는 완고한 태도로 안 된다고 말했어요. 그리곤 아주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저를 보더군요. 저는 그에게 확 안겼어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그에게서 절대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 양팔을 꽉 감쌌죠. 그러나 그는 제게 힘을 쓰지 않았어요. 그저 나를 몇 차례 토닥이더니 부드럽게 떼어냈죠. 그뿐이었어요. 저는 그 길로 도망쳐 나왔어요.”

그녀는 거기까지 말한 뒤 한숨을 쉬었다. 나는 남은 맥주를 입 안 가득 흘려 넣고는 천천히 삼켰다.

“사람은 누구나 가장 힘든 시기에 결단력을 발휘하는 법이죠. 저는 그동안 막연하게 꿈꾸었던 해외 생활을 계획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미소 지은 뒤, 나의 잔이 빈 것을 보고 한 잔 더 마시겠냐고 물었고, 나는 고맙지만 괜찮다고 답했다. 나는 계산을 치르고 그녀와 인사한 뒤 가게에서 나왔다. 밖은 말할 것도 없이 컴컴했다. 말하자면 심해와 같은 어둠이었다. 나는 D의 이야기를 떠올렸고, K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리고 K를 떠올렸다. 어두컴컴한 지하에서 혼자 재즈를 들으며 과거를 반추하고 있을 그를. 나는 그에게 무언가 한마디를 해줬어야 하는 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온전한 이해 아래 있는 위로가 아니라면 침묵이 나은 법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주 강한 멜버른의 바람이 내 앞을 막아섰다. 나는 양손으로 내 몸을 끌어안으며 집을 향해 걸었다. 이번에는 김석훈이 떠올랐고, 얼굴도 모르는 K의 아내가 떠올랐다. 그들은 마음대로 나의 상념을 휘젓고는 정리하려는 마음도 없이 사라졌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시작이야, 하고 누군가 내게 말했다. K의 목소리였다. 네, 이제 시작이죠. 나는 하릴없이 답했다. 그리고 발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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