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은 처음이라

런던의 여름

by 한그루


스페인 출신의 트레이너 루시아로부터

2주 동안 프런트 오피스 트레이닝을 받았다.


루시아는 까칠했지만,

내가 손님 앞에서 흔들릴 때마다

능숙하게 틈을 메우곤 했다.

흔히 말하는 '웃는 얼굴'은 아니지만

담배를 피울 때마다 늘 비흡연자인 나를 데려나가서

흡연자 직원들에게 날 소개 했다.


담배 연기 속에 서 있는 시간은 꽤나 고역이었지만,

그 덕분에 하우스 키핑, 시설팀, 예약팀, 그리고 세일즈팀까지

거의 모든 직원의 얼굴을 익힐 수 있게 되었다.


그녀의 스파르타식 트레이닝 덕분이었는지,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나는 한 달도 되지 않아 팀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하루 300건이 넘는 체크인, 체크아웃도 문제없었다.




오후 4시.

한바탕 체크인을 치르고 조용해진 로비.

창밖 너머로 런던이 펼쳐졌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속도로 스쳐가고,

구름은 바람을 따라 느리게 흘렀다.


대리가 되어야 한다는 압박,

과장이 먼저 되어야 한다는 초조함,

돈은 얼마를 모아 뒀는지,

결혼할 준비는 얼마나 됐는지,


이런 걱정을 해본지가 언제였던지.

하루 최대치까지 삼키던 두통약조차

언제부터 내 삶에서 사라졌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어쩌면

이렇게 사는 삶도 충분히 괜찮겠구나.


높은 자리가 아니더라도,
더 많은 것을 짊어지지 않더라도,
조금 덜 벌더라도.


이렇게 나답게 숨 쉬며 사는 삶 역시
충분히 가치 있었다.


새벽출근을 하고 오후 3시에 마치는 날은

친구들과 공원에서 맥주를 마셨다.

햇살이 따뜻한 오후,

잔디밭에 앉아 친구들과 끝도 없이 수다를 떨었다.


쉬는 날에는 미술관에서 오디오 가이드를 들으며

하루 종일 머무르기도 했고,

마리아를 만나 집 근처 펍에서 저녁을 먹으며

느긋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마치 나의 지난 20대에게 보상이라도 해주듯

그 시절 일에만 매달리느라 누리지 못했던 순간들을,

이제야 하나씩 살아내고 있었다.


그렇게 어느덧 런던의 여름에 푹 빠져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호텔에는

내가 예전에 그토록 가고 싶었던

그 항공사 승무원들이 런던비행이 있을 때마다 묵었다.


체크인을 하며 그들을 보았다.

완벽한 유니폼과 흐트러짐 없는 미소 뒤로,

쉽게 감춰지지 않는 피로가 드리워져 있었다.

짧은 체류 동안

바쁜 시내를 구경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체로 조용히 머무르며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다시 비행을 위해 떠나는 얼굴엔
피곤함이 엷게 남아 있었다.


체류지에서 여행하는 낭만은

생각보다 크지 않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러다 어느 날,

한 승무원의 체크아웃을 하던 중

짧은 대화를 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런던에 산지 오래되었냐고 물었다.

나는 8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녀는 나에게 말했다.


"So London is your everyday life.

That sounds so lovely. Take care of yourself. Hope to see you next time."

"그럼 늘 런던에 있는 거네요.

정말 근사하네요. 늘 건강 조심해요. 우리 다음에 봐요."


나에겐 그저 흘러가는 일상이었지만,

한때 내가 그토록 동경했던 삶을 사는 그녀는

지금의 내 모습을 멋지다고 말했다.


그 순간, 지금 이 자리가 참 감사하게 느껴졌다.


처음 엔젤역에 낑낑대며 짐 다섯 개를 끌고

도착했던 날 밤,

낯선 방에 누워 많이도 울었다.

'나는 대체 왜 여기까지 온 걸까.'

혼자서 쫓기듯 도망온 이곳에서.


그토록 바라던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어쩌면 이렇게 소중함을 느끼기 위해

런던까지 오게 된 건 아닐까?

이 길밖에 없다고 믿으며,

혹여 손가락 사이에라도 새어 나갈까 두려워

온 힘을 다해 움켜 쥐고 있던 것을 내려놓자,


그제야 보였다.

세상은 내가 알던 것보다

훨씬 더 흥미로운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을.


오래도록 움켜쥐고 있던 것만이 정답은 아니었나 보다.




영국은 처음이라,


지독한 겨울에 지쳐,
이곳에도 여름이 온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하지만 긴 겨울이 찾아오면
도시의 밤을 따뜻하게 밝히는 불빛이 있다는 것도,
그제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새, 그 지독했던 겨울마저
기다려지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한그루입니다.


지금까지 [영국은 처음이라]를 함께 읽어주시고 응원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영국에서의 처음 2년은 제게 참 많은 변화를 안겨주었습니다. 그 시간 속에는 미처 다 전하지 못한 이야기들도 여전히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연재는 여기에서 마무리하고,

앞으로의 이야기들은 [유오롸잇 위클리] 매거진에서 주제별로 이어나가려 합니다.


영국에 처음 도착했던 날부터

낯선 도시에서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던 시간까지,

이 연재를 통해 제 삶의 한 조각을 기록할 수 있어 참 감사했습니다.


무엇보다 긴 시간 함께해 주시고 응원해 주신 여러분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더 깊고 좋은 이야기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한그루 드림.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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