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의 글(131호 2020 겨울호)
원래는 두 편을 써두었습니다. 편집부장 일을 도우며 쓰는 마지막 ‘편집자의 글’이기 때문입니다. 부족함으로 인해 끼친 폐가 많았지만 독자 선생님들이 보내주신 응원과 격려에 보답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조금 더 공을 들여봤었지요. 마감을 앞둔 지금, 그 글들을 관두고 다시 키보드를 만지고 있습니다. 올해 대학수학능력시험에 출제된 문제를 둘러싼 논란을 접했기 때문입니다.
매년 수능이 끝나면 모든 국민과 함께 풀어보는 문항이 하나씩 생기기 마련이죠. 때론 이게 마치 희생양 찾기 같다는 느낌도 받습니다. 중복 답안, 출제 오류인 경우도 있지만 때때로는 너무 어려운 문항(그 난이도가 곧 지성을 측정하는 좋은 평가도구는 아닐 것입니다)이 보통 화제가 되니까요.올해 2021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는 4교시 ‘한국사’ 20번이 그 화제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이 문제를 둘러싼 논란은 여러 측면의 지점에서 변주/확대/굴절되어 몇일간 지속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나타난 논란의 층위와 반응을 톺아보는 것은 한국 사회의 다양한 면모를 살피는 일이기도 할 겁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드리면서 2020년 겨울호의 구성을 함께 소개해 드릴게요.
수능 「한국사」 20번에 대한 문제 제기는 정파적 공격과 이념적 시비에 기반한 것이었습니다. 문제제기의 수준을 의심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요. 시간이 흐르면서 각종 공론장에서는 ‘문제의 수준’을 둔 공박을 이어갔습니다. 점차 언론 기사의 표제도 ‘수능이 장난인가요?’, ‘수능 한국사 20번 보너스 문제 논란’와 같은 문구로 바뀌어 있었죠. 이른바 일부 학력고사 세대와 일부 수능 세대는 적어도 이번 사안에 관련해 공고히 단결 했던 것 같습니다. 몹시도 흥분된 목소리로 말이죠.
물론 현실적으로 해당 문제가 적절했으냐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해볼 여지가 없진 않습니다. 선지 중 하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전근대사(고려, 조선 등)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적어도 변별도의 관점에서는 문항이 정말 ‘수준 이하’일지도 모릅니다. 설령 절대평가의 문항이라 할지라도 말이죠.
하지만 해당 문항의 적절성 유무가 이 문제의 할 본질일까요? 상대평가를 지향하는 객관식 시험이 역사교육을 어떻게 왜곡시키는지에 대해서는 너무도 오랫동안 봐왔습니다. 한때 모 대학은 입시전형에서 고등 ‘국사’ 과목을 필수 응시과목으로 지정하였었죠. 그 덕에(?) 수능 ‘국사’ 과목의 문항은 극강의 변별도를 자랑해왔습니다. 그 변별을 위해 얼마나 많은 수업이 변질되었던가도 새삼 떠올려보게 됩니다. 극단적인 상대평가인 공무원 선발시험의 ‘국사’ 과목의 황당한 난이도 조정 문항은 매년 이슈가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속칭 ‘킬링문제(등급, 등수의 변별력을 높이기 위한 문항)’는 누구를 위한 것일까요? 수능 ‘한국사’ 절대평가 문항은 수능의 자격고사화(절대평가)라는 큰 흐름을 반영하는 단면일 뿐입니다. 그 연장선에서 논의가 이루어져야 타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각 인터넷 커뮤니티, 언론사 기사에서는 이런 측면에서 이번 문제를 다루지 않았음은 물론, 심지어 수능 ‘한국사’ 시험이 절대평가 과목이라는 점 자체를 언급한 예도 거의 없었습니다. 교육적 함의를 살피기를 포기한 우리 공론장의 씁쓸한 단면입니다.
하지만 이번 회보에서는 한국 역사교육의 진정한 ‘수준’을 살필 수 있는 원고들로 가득합니다. <수업이야기>에서는 특집으로 두 가지 수업사례를 묶어 소개했습니다. 최근 중,고등학교에서는 교사가 적극적인 수준에서 내용 요소를 재구성하여 커리큘럼을 만들 것을 요구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유학기제의 주제선택활동이나 고등학교의 ‘전문교과’를 통한 역사수업이 그것입니다. 전자는 이재호 선생님이 후자는 맹수용 선생님이 귀한 사례를 나눔해주셨습니다. 역사과 교육과정 재구성의 상상력을 확장하는 멋진 두 사례를 만나보시길 바랍니다. 이런 도전에 주저하지 않는 좋은 역사 교사들의 사연들을 만나볼 수 있는 것이 회보의 장점이겠죠. 「뒷담회-회보 읽는 독자 간담회」에서 지난 가을호를 읽고 세 명의 역사교사가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특히 이번 호에서는 예비교사 한 분도 함께하여 특별한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셨으니 일독하시길 권합니다. 만화를 통해 좋은 교사의 농도 짙은 고민을 선보여주시는 한민혁 선생님의 「똥굴레 교사의 작은이야기」도 꼭 읽어주시고요. 우리 역사교사들이 진정한 ‘수준’을 높이기 위한 노력, 진심, 실천, 분투가 이 원고들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앞서 이번 문항이 ‘변별도’가 많이 부족한 문항임을 이야기해 드린 바 있습니다. 하지만 전혀 엉뚱하게도 이번 문항은 몹시도 어렵고 까다로운 문제였음이 여실히 드러난 대목도 있었죠. 남북기본합의서를 의미하는 해당 문항의 지시문을 두고 ‘왜 문재인 정권의 통일 정책을 수능 문항으로 출제하는가?’라고 문제제기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현 정권의 치적을 홍보하고 미화하려는 문제를 풀게 할 수 없다고 외치는 일부 정치인과 정당, 커뮤니티의 이야기들을 보면서 우리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요. 역사교육을 정파의 시선으로 바라보려는 그들의 ‘파당적 교감신경’에 대해 분노하면서도 부족한 문해력 교육의 실태에 대해 안타까워 하는 역사 선생님들의 마음이 떠올랐습니다.
다행스럽기도 이런 수준의 황당한 공세가 주목받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이런 관점에서 비판을 제기한 기사들이 오보라는 것이 밝혀지는 데는 반나절도 되지 않았으니 까요. 그런 점에서 회보 <역사교육>은 더 깊은 공부와 고민의 지점들을 역사 선생님들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 사회가 더 나은 논쟁을 할 자격과 권리가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역사이야기 지면에서 준비한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과의 대담(‘역사교사가 묻고 지성이 답하다’)은 꼭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인간의 불완전함을 닮은 체제, 그래서 더 사랑스러운 민주주의」라는 제목이 주는 느낌만큼이나 큰 위로와 힘을 받으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박상민 선생님이 <동아시아를 발견하다>를 읽고 꼼꼼히 남겨주신 서평도 꼭 읽어주시길 바라고요. 이건주 선생님과 인종주의를 연구하는 역사학자 염운옥 교수가 함께 만들어 간 수업 혁신의 기록, 「초협력교실」의 원고도 일독을 권합니다. 「고민보다GO」에서는 특성화고에 초임 발령을 받아 교육적 지평을 넓혀가기 위해 노력하는 김민범 선생님의 이야기와 만나실 수 있을거에요.
모 언론에서는 ‘수능 문항이냐 통일 교육이냐’는 표제로 수능 한국사 20번을 비판하기도 하였습니다. 비판이라 부르기에도 황당한 문제제기였죠. 남북화해 협력정책을 역사과 수능 문항으로 출제한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었으니까요. 사실 이 기사의 표제에는 혐북(嫌北) 정서와 굴절된 대결 의식을 조장하려는 나쁜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1020, 2030 세대의 반PC정서(정치적 올바름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견해에 대한 반발심)를 사회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흐름을 극복하는 수업을 고민해야 하는 것은 우리 역사교사들이 만주하고 있는 어려운 숙제겠죠. 보편적 평화와 인권이라는 주제가 빈정거림과 쿨한 외면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될테니까요.
그러고 보니 이번 겨울호에서는 공교롭게도 분단, 평화통일과 관련된 원고들이 많이 소개되었군요. 이 주제들을 다루는 방식, 표현 방식이 다양해서 더 풍성하게 읽으실 수 있을 것 같아요. 안민영 선생님의 「소소한 미술사 이야기」에서는 ‘월북화가’ 임군홍의 <가족>을 통해 진한 여운을 남기는 이야기를 풀어가주셨습니다. ‘역사이야기’ 지면에서는 이용기 교수님, 정욱식 소장님의 연재글과 만나보실 수 있는데요. 각각 한국전쟁에 대한 성찰적 접근, 바이든 정부 출범 이후 한반도 정세를 다루어주셨습니다. ‘책 이야기’의 저자인터뷰 코너 「만나書」에서는 <26일 동안의 광복>을 집필하신 길윤형 기자와의 깊은 대화가 준비되어 있고요. 또한 같은 지면에서 이동기 교수의 신작 <비밀의 역설>을 읽고 진지한 고민을 정리해준 오승호 선생님의 서평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다는 점도 잊지 마셔요.
‘상대평가와 이를 위한 변별력 있는 문항’을 출제하는 것은 정말 불가피한 현실일까요? 만일 그렇다면 ‘살아있는 역사교육’은 그저 몽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상(理想)을 몽상인 양 취급하거나 ‘대안’을 모색하는 노력을 현실감각이 부족한 것으로 여기는 세태가 있는 것도 사실이고요. 1,2등급의 경계를 가를 날카로운 ‘킬링 문제’들 속에서 일말의 교육적 고민이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과연 있을까요? 20번 논란을 나누던 우리의 공론장 속에서 진정으로 역사교육을 고민한 목소리가 낮고 작았던 이유가 무엇인지를 곱씹어보게 됩니다.
이번 겨울호에서는 역사교육과 관련한 진정한 고민과 걱정의 목소리들을 담으려 노력했습니다. 기획 「코로나 시대의 역사교육 3편 – 전망과 제언, 뉴노멀 역사수업의 자격」에서 강화정 선생님께서 던지는 질문과 제언은 코로나 시대의 역사수업을 준비하는 선생님들에게 큰 도움이 되실 거라 믿습니다. 아울러 이번 겨울호에서는 올해 역사교육계에서 큰 화두였던 ‘역사부정/부인’의 문제를 여러 원고들을 통해 전면적으로 다루고자 노력했습니다. 특집 ‘교실 속 역사부정 2편’에서는 김육훈 선생님의 특별기고와 공부모임 ‘역사부정에 대응하는 역사교육’에서 정리해주신 교사 리서치&분석 원고를 실었습니다. ‘역사이야기’ 지면에서 「역사교사를 위한 영화수업」을 연재해주시는 최은 영화평론가님도 이번에는 역사부정과 관련 깊은 영화들을 중심으로 글을 써주셨고요. ‘역사부정’을 주제로 열린 하반기 직무연수를 열심히 수강하신 권유진 선생님의 꼼꼼한 연수후기를 통해 역사부정 문제와 관련한 다양한 강연의 이야기들을 엿보실 수도 있겠군요. ‘역대급’이었던 그 직무연수의 기획자이자 전역모 연수부장으로서 대활약하신 고진아 선생님의 인터뷰를 담은 「장콩 선생이 만난 팔도교사」도 일독을 권합니다.
이번 논란을 통해 내년도 수능 「한국사」의 문항은 조금 더 어려워질지도 모르겠네요. 매년 기상천외해지는 역사과 선택과목들의 ‘킬링문제’의 기교도 더욱 자신감(?)이 붙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과연 ‘살아있는 역사교육’은 입시라는 현실이 일소되기만을 기다려야 할까요? 수능 시험이 없어지거나 모든 시험이 ‘절대평가’가 된다면 그때는 비로소 우리가 꿈꾸는 역사교육을 위해 팔을 걷어붙일 수 있는 걸까요?
적어도 많은 역사 교사들은 ‘바로 오늘’부터 시작할 것입니다. 오지 않을 그날을 하염없이 기다리기엔 선생님들과 아이들이 만나는 하루 하루가 너무나도 소중하기 때문이죠. ‘부조리’ 그 자체에서 기꺼이 시작하고 방향을 모색하는 일, 사실 언제고 늘 역사 교사의 몫이었습니다. 막스 베버는 ‘정치’에 대해 정의하면서 ‘열정과 균형감각 둘 다를 가지고 단단한 널빤지를 강하게 그리고 서서히 뚫는 작업’이라고 했습니다. 많은 이 땅의 역사 선생님들이 그런 자세와 마음가짐으로 수업을 고민하고 아이들과 만나고 계실 테지요. <역사교육>은 앞으로도 그런 역사 선생님들의 벗이 되기 위해 더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