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01

by 현재의 선물

이 이야기에 언급되거나 묘사된 인물, 지명 등은 모두 허구적으로 창작된 것이며, 만약 실제와 같은 경우가 있더라도 이는 우연에 의한 것임을 밝힙니다.


아직도 그때가 생생하다. 나뭇잎들이 거두어져 앙상한 나뭇가지를 내민 가로수들이 점차 햇빛을 받아 자라나는 것 같았고, 파란 하늘 아래 형형색색의 옷을 입은 청춘남녀들은 몸을 비비대며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젊음이란 매혹적인 가치에 잠시 현혹당한 것 같았다. 슬피 우는 뻐꾸기와 푸른 버들숲이 나돌던 한가로운 흥취를 맛보고 싶었다. 그러나 이는 나의 상상 속의 사건이었으며, 제3세계에도 속하지 못한 나만의 외로운 생각이었다. 한편으로는 그 아름답던 청춘을 바친 나의 일생 일부가 가엽게 여겨질 수 있다고도 생각했지만, 오롯이 그것이 나를 위한 것만이 아니었기에 금방 접어 두었다.


나는 가로수를 보며 했던 방정스런 생각들과 내 머릿속을 정리하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내 집은 일터서부터 아주 가까운 거리다. 빵집을 끼고 모퉁이를 돌아 대략 오십에서 칠십 걸음 정도면 도착할 수 있는 현대의 평범한 집이다. 나는 일터에서 집으로 왔다갈 때면 늘 무니초 학생들이 그린 어설프지만 어여쁜 벽화와 그 순수함이 묻어나는 아기자기한 장식품들을 눈여겨보는데, 참 인상적이다. 간혹 학교가 늦게 끝나 집으로 갈 때 들리는 아이들의 목소리와 가방 안 필기구와 책들이 뒤엉켜 내는 화음들도 듣기 싫지 않다. 이런 탓에 나는 종종 나에게 '과거가 그립니?'라고 자문하기도 한다. 하지만 늘 돌아오는 답은 '아니'였으므로, 이런 것에 의미를 두는 것보다 차라리 인간의 자연스러운 회상 정도로 받아들이자고 타협한다.


내가 집에 들어서자 사랑스러운 복순이가 나를 맞이했다. 나를 위해 꼬리를 흔들고 어깨춤을 추며 흥을 돋우는 광대처럼..., 복순이가 볼 때 내가 많이 우울해 보였나, 괜스레 나는 콧소리를 냈다.


복순이는 월남자들이 대거 서울로 올 때 그중 어떤 사람이 피난 중에 버린 강아지였는데, 아버지께서 주워 와 우리 맘대로 키우게 됐다. 사실, 아버지한테 들은 말이라 진짜 버렸는지, 잃어버렸는지, 아버지가 훔쳐오셨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우리 복순이는 참으로 귀엽고 듬직하게 생겼다. 아버지 말로는 공기 좋은 시골에서 올라온 개라 나중에 삶아 먹으면 죽여준다나 뭐라나.... 물론 내가 무조건 반대하겠지만, 사람 일은 모른다고, 늘 복순이를 안아 주며 눈치를 잘 살피고 있다. 언젠가 독립하는 날 복순이를 데리고 나가 오봇이 살겠다고.


한편, 대문 소리가 났는지 어머니가 나와 고생 많았다며 내 어깨에 걸린 서류가방을 들어주셨다.


"밥 차려 놨으니까, 빨리 씻고 와서 밥 먼저 먹어!"


집으로 들어와 옷을 벗고 몸을 정돈한 후 먹는 식사 한 끼는 이로 말할 수 없는 감정으로 이루어진다. 며칠 전 직장에서 할 일 없이 사전을 보다가 발견한 단어인데, '상서롭다'라는 단어가 딱 그러하더라. '복되고 길한 일이 일어날 조짐이 있다'. 단어의 어감부터 생김새, 의미까지 모든 것이 좋았다. 하루를 안전하게 마무리했다는 안도감과 기분 좋은 그 감정까지 마냥 행복한 것 같았다. 아무도 방해할 수 없는 나의 하루라는 소유물은, 밤을 지냄으로써 다시금 나만의 버-전을 창조해 내었다.


오늘은 일터로 가는 길에 회사로 출근하러 버스를 기다리는 아버지를 보았다. 후줄근하지만 격식이 느껴지는 정장을 입으신 아버지. 십여 명이 버스를 기다리며 9, 13-1, 15, .... 여러 대의 버스가 몰려와 몇 명씩을 태우고 간다. 아버지는 혹여 본인이 탈 17번 버스를 노칠까 노심초사하며 오는 차마다 창문에 크게 쓰인 번호를 보셨다.


'아버지 배가 많이 나오셨네.... 운동이라도 하셔야 되는 거 아닌가? 오늘 집에 들어오시면 같이 집 근처 운동장이라도 한 바퀴 뛰자고 할까? 그래도 건강하신 게 어디냐....'


아버지는 늘 몇 십 년을 버스를 타고 다니셨다. 걸어서는 사십여분 걸린다고 하시던데, 예전에 버스는 많이 타고 가보았지만 걸어서 가본 적은 없어 정확하게는 모르겠다.


오늘도 아버지와 함께 출근한다는 이 기분을 언제 느낄까 생각했던 대학생 시절이 떠올라 갑작스레 아련해졌다. 오래간만에 출근하는 아버지를 보아, 아버지가 버스 타고 가시는 것만 보고 나도 일터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오 분이 지났을까, 저 멀리 11, 16-1, 17번 버스가 순서대로 오는 것이 보였다. 17이라는 숫자가 보이자 나도 모르게 약간의 설렘이 느껴졌다. 11번 버스부터 멈춘 후, 뒤따라 오는 두 버스도 천천히 속도를 늦췄다. 아버지는 11번 버스 뒤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나는 순간 당황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