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05

by 현재의 선물

이 이야기에 언급되거나 묘사된 인물, 지명 등은 모두 허구적으로 창작된 것이며, 만약 실제와 같은 경우가 있더라도 이는 우연에 의한 것임을 밝힙니다.

첫 화를 읽고 오시면 더욱 몰입감있게 경험하실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그 말을 하는 것이 큰 죄인듯 하였으나, 그러한 심정을 무맥락적으로 공감하고 있던 나이기에 인내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 몇 달 전 쯤에, 사장이 그러더구나. 부도가 났다고. 사실 놀랍지도 않더라. 나이라는 게 옛날이면 떨릴 일을 안 떨리게 바치거든. 그래도 우리 가족 먹여 살려야지, 아무리 너가 돈을 벌어 와도 그 돈 가지고 니 애미랑 나까지 어떻게 먹고 살겠냐. ...... 그래서 바로 회사 나가고, 한 며칠은 밖에 나가 있었다. 나뒹굴었지. 솔직히 당시에는 썩 나쁘지 않더구나. 사실이야. 그래도 어떻게? 우리 가족 밥 먹이려고 일자리를 알아 봤지. 알아보니 문경에 꽤 크게 석탄을 캐는 곳이 있더라고. 그래서 그날로 바로 가서 물어봤지. 그러더니 처음에는 유심히 쳐다 보다가 일 하라고 하더구나. 행운이었어. 그리고 그 뒤로부터 거기로 출근했다. 출근 시간하고 퇴근 시간이 원래 회사보다 짧아져서 너희가 눈치를 못 챘겠지. 지금에서라도 밝히니 마음이 괜찮구나."


아버지는 담담하게 말하면서도 입술의 떨림을 주체할 수 없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가장으로서 회사에서 잘려 석탄 캐러 문경까지 간다는 일을 말하는 데 어찌 그 마음이 편하겠는가. 나라도 그 마음에 공감하고 싶었으나, 도무지 내가 적당한 방도로 말할 길이 생각나지 않았음을 핑계로 댔다. 그리고 아버지는 조금 주춤하더니 아련하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건 말 하려고 했던 건데, 다음 주 중에 문경으로 내려갈 거다.... 그쪽에서도 잠자리를 준다고 하고, 우리 집에서도 거기랑 가깝지가 않아. 차라리 그쪽에서 사는 게 더 나을 것 같더구나. 니 어미한테는 내가 말할 테니, 우선 알고 있어라. 나 없어도 너랑 너 애미는 잘 살 거다."


심히 당혹스러웠다. 아버지의 심란함을 나 역시 알아챘지만 그런다고 달라질 일이 아니었다. 나는 도저히 만류할 생각도 못했으며, 다음 날 아버지는 어머니께 나에게 말씀하신 것과 똑같이 전하셨다. 어머니도 적잖이 놀라셨지만 담담히 받아들이셨다.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기에. 아버지는 그날 이후 일주일이 지날 무렵, 보따리 하나를 싸 들고 문경에 가는 버스에 올랐다. 험한 곳 가는 것도 아니고 버스타면 가는 곳에, 잠자리도 제공하는 곳에 가는데 여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도 나이가 들긴 했다고, 아버지와 인사를 하며 웃어 보였다. 그렇게 아버지는 우리 집에서 떠났다.


아버지가 떠나고, 아버지는 저녁마다 전화를 걸어 오셨다. 소소한 얘기부터 시작하는 잠깐의 통화가 어머니한테는 달달한 모양이었다. 아버지와 통화하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을 때면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끼곤 했다. 그럼에도 아버지가 피곤하실까 어머니는 길게 통화하지도 않으셨으며, 먼저 전화를 걸지도 않으셨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아버지의 통화 빈도는 줄어, 일주일에 한 번에서 보름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까지 바뀌었다.


아버지가 떠나신 지 반 년이 됐을까, 일터에서 집으로 오는 길에 집 앞에 편지 한 통이 있는 것을 보았다. 늘 편지를 보면 누가 보냈을 지 궁금한 터이므로 나는 편지의 뒷면을 빠르게 읽었다.


'[보내는 사람] 김만식'


몇 가지 생각했던 후보지 중 등장하지 않는 당황스러운 이름이었다. 그러나 이름에서 오는 반가움 또한 감출 수 없었다. 나는 편지를 뜯어 그 내용을 천천히 읽어 보았다.


'상철이에게. 상철아 잘 지내냐? 지난 달에 술 먹고 연락이 없어서, 너무 심심하다. 옛날에는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났던 것 같은데, 이제 바빠지니 연락이 도통 잘 안 된다. 무튼, 다름이 아니라, 내가 그저께 영업하러 신문사에 갔거든. 근데 엄청 조그마한 신문사라 그런지 장사가 잘 안 된대. 그래서 거기 사장이 젊은 사람이 열심히 산다고 구독을 되게 싸게 해준대. 그래가지고 어차피 신문도 봐야 하니, 하기로 했어. 근데 또 그 사람이 엄청 고맙다며 지인 한 두 명은 더 해준다네? 그때 딱 너가 생각난 거지. 그래서 말인데, 너 신문 안 볼래? 국남일보. 하겠다고 하면 내가 첫 달은 돈 내주고. 생각 있으면 편지 해라. 나중에 밥 한 끼 먹자. 잘 지내.'


나는 읽으면서도 스멀스멀 나오는 웃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대학 동기인 친구가 영업 하겠다고 신문사에 간 이야기가 재밌지는 않지만, 이렇게 당돌하게 말하는 친구의 용기가 귀엽게 느껴지기는 했다. 나는 이렇게까지 말 하는데 안 하는 것도 도리가 없는 것 같아 바로 친구에게 답장을 써 보냈다. 그리고 며칠 뒤, 우리 집에는 신문이 배달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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