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미국 땅에서 나를 잃지 않게 해 준 가장 다정한 이웃
아이들과 미국 집으로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어느 주말 오후였다.
차고 문을 열어둔 채 앞마당에서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 우리 아이들과 또래로 보이는 남매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갔다.
영어가 편하지 않았던 그때.
잠깐 망설였지만, 결국 먼저 말을 걸었다.
“안녕! 우리 이 집으로 이사 왔어. 근처에 살아?”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외로움이 나도 모르게 먼저 손을 든 순간이었다.
자전거를 멈추고 조용히 웃으며 인사하던 그녀.
그녀가 바로 K였다.
K와 나는 정말 다른 사람이다.
나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에너지가 올라가는 쪽이고,
K는 관계를 천천히, 조심스럽게 쌓아가는 사람이었다.
처음엔 우리가 이렇게 가까워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녀가 없는 미국 생활을 상상하기 어려워졌다.
K는 어린 시절, UN에서 일하던 일본인 아버지를 따라 여러 나라를 옮겨 다니며 자랐고, 학창 시절부터는 미국에 정착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아시안으로서의 감각을 잃지 않으면서도, 미국 안에서 살아가는 아시안의 위치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방인으로 살다 보면 겪게 되는 미묘한 순간들.
말은 통하지만 완전히 이해받지 못하는 느낌,
사소한 표현 하나에도 괜히 위축되는 순간들.
나는 그걸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됐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없는 부분을 자연스럽게 채워줬다.
나는 사람들 사이에 먼저 들어가 분위기를 만드는 역할을 했고, K는 그 옆에서 조용히 자리를 지키며 관계를 이어갔다.
어느 날, 그녀가 초대해 준 모임이 끝나고 그녀가 말했다.
“I really admire your energy. You make people feel welcome.”
난 네 에너지가 참 좋아. 사람들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힘이 있어.
나는 늘 영어가 부족한 나를 챙겨주는 그녀에게 고마웠고, 그저 내가 편한 방식대로 행동했을 뿐이었다.
이렇게 K는, 내가 이곳에 적응하는 과정을 조용히 도와준 사람이었다.
내가 영어로 말을 하다가 애매하게 멈추면 그녀는 자연스럽게 문장을 이어주었고, 내가 놓치고 지나가는 표현이나 뉘앙스를 부담스럽지 않게 다시 짚어주었다.
아이들 학교에서 오는 메일이나 커뮤니티 규칙 같은 것들도 그녀 덕분에 훨씬 편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별거 아닐 수 있는 것들이 나에게는 매번 작은 장벽이었는데, 그걸 하나씩 낮춰준 사람이었다.
우리가 서로를 더 잘 알게 되었을 때,
미국에 오고 정체된 것 같은 내 삶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던 때가 있었다.
늦은 밤 아이들을 재우고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다.
"내가 지금 이 곳에서 잘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어"
그녀에게 바로 답장이 왔다.
“You’re doing better than anyone I’ve seen here.
You’re really carving out your own path.
You’re different from others I’ve known.”
여기서 내가 만난 누구보다 잘 해내고 있어.
너는 너만의 길을 만들어가고 있는 사람이고,
내가 알던 다른 사람들과는 달라.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잠깐 말을 잇지 못했다.
이곳에서의 나는 늘 부족한 쪽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누군가는 전혀 다르게 보고 있었다는 사실이
조금 낯설면서도 묘하게 힘이 되었다.
K는 꾸밈없고 수더분한 사람이다.
그녀의 구체적인 배경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된 건, 우리가 알게 된 지 한참 뒤의 일이었다.
어느 날 우연히 학창 시절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녀가 미국 아이비리그 출신이라는 걸 알게 됐다.
내가 먼저 물어보지 않았다면, 아마 여전히 모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걸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는 듯, 늘 겸손한 태도로 사람을 대했다.
만약 내가 그런 배경을 가졌다면, 아마 쉽게 꺼내 보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때 다시 한번 느꼈다.
그녀가 얼마나 깊이 있는 사람인지를.
사람의 깊이는, 배경보다 태도에서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는 걸.
요즘 우리는 아침마다 같이 뛴다.
한동안 운동을 쉬었던 K는 숨이 금방 차오르고,
나는 그에 맞춰 속도를 조금씩 늦춘다.
말이 많지 않아도 괜찮다.
같은 속도로 숨을 고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여름 주말이면 우리는 아이들을 데리고
놀이터가 있는 동네 펍에 간다.
아이들이 밖에서 뛰어노는 동안,
우리는 맥주 한 잔을 사이에 두고 앉는다.
평소에는 조용한 K도
그 시간만큼은 마음을 조금 더 연다.
나는 그 시간이 좋다.
특별한 이야기가 없어도
그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시간이라서.
최근 미국 집 계약이 끝나가면서 고민을 많이 했다.
동네 시세가 내려간 덕분에, 같은 비용이면 더 좋은 조건의 집으로 옮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이곳에 조금 더 머물기로 했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그중 하나는 분명 K와 그녀의 가족이었다.
좋은 집은 언제든 다시 찾을 수 있지만,
이렇게 편안하게 이어지는 관계는 쉽게 생기지 않는다.
특히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입장에서는 더 그렇다.
내일 아침에도 우리는 운동화를 묶고 마주 설 것이다.
내가 조금 앞서 나가면 그녀는 조용히 따라올 것이고,
그녀의 숨이 가빠지면 나는 자연스럽게 속도를 늦출 것이다.
아마 우리는 계속 이렇게
각자의 속도로, 비슷한 방향으로 지내게 될 것 같다.
그 정도면, 이곳에서의 삶은 충분히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