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만 원짜리 유치원 간식이 '고래밥'이라구요?

한국의 정성과 미국의 실용, 그 사이 어딘가에서

by 적응형이방인

미국에 처음 온 한국 엄마들이 겪는 멘붕의 8할은 아마 '먹이는 문제'에서 올 것이다. 나 또한 그랬다.

멸치볶음, 시금치나물, 쇠고기뭇국이 담긴 따뜻한 식판 사진을 보며 흐뭇해하던 한국 유치원과 달리, 이곳 미국 유치원과 초등학교의 식단은 내 상식을 무참히 깨부쉈다.




골드피쉬의 충격, 일상에 스며든 '과자'

미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 둘째 아이가 다니던 사립 프리스쿨은 한 달 원비만 1,700불(약 230만 원)이 넘는 곳이었다. 나름 식단에 신경을 쓴다는 학교였기에 기대가 컸다.


그런데 어느 날 오후 간식 메뉴에 적힌 'Goldfish'라는 단어를 보고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금붕어일 리는 없고 생선으로 만든 피쉬볼인가 싶었지만, 하굣길 아이 손에 들린 건 마트에서 흔히 파는 물고기 모양 과자였다.

한국으로 치면 '고래밥' 같은 과자였달까.


한국 엄마들에게 유치원에서 과자를 먹는 건 '과자 파티' 같은 특별한 이벤트지만, 여기선 평범한 일상이었다. 공립 초등학교 런치 메뉴로 나초가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엄마들이 싸준 스낵박스에 감자칩 한 봉지와 카프리썬 한 통이 전부인 풍경도 흔했다.


미국 국민 간식인 골드피쉬(Gold Fish)


쌀을 주식으로 하는 한국인 입장에서 과자가 식단에 포함된다는 사실은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알고 보니 미국식 간식의 기준은 우리와 많이 달랐다. 크래커처럼 곡류로 만든 일부 스낵은 학교 급식 기준에서는 ‘곡물(Grain)’로 분류되기도 한다.


물론 아무 과자나 다 해당되는 건 아니다. 당분과 나트륨 기준을 충족하고, 다른 식품군과 함께 구성될 때에만 ‘한 끼의 일부’로 인정된다.


그럼에도 과자를 단순한 군것질이 아니라 ‘에너지를 보충하는 식품’으로 보는 시각 앞에서, 내 먹거리에 대한 기준은 조금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한 번은 마트에서 '런쳐블(Lunchables)'이라는 스낵팩을 본 적이 있다. 단어의 뜻 그대로 점심 대용 팩이라기에 기대를 품고 사봤다. 안에는 크래커와 치즈, 터키햄, 오레오쿠키 몇 조각이 전부였다.


이 간단한 조합에 '런치'라는 이름을 붙이는 미국인들에게 점심이란 과연 무엇일까. 혼란스러운 순간이었다.


미국 마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런쳐블 (LUNCHABLES)


'자율'이라는 이름의 신세계

큰아이가 공립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카페테리아'라는 또 다른 신세계가 열렸다. 직접 런치 봉사에 가서 본 메뉴 자체는 생각보다 훌륭했다. 신선한 샐러드바와 제철 과일, 치킨 너겟이 늘 구비되어 있었다.


문제는 메뉴가 아니라 시스템에 있었다. 다양한 음식이 준비되어 있지만, 무엇을 선택하느냐는 오롯이 아이의 몫이었다.


한국 유치원의 점심시간은 음식을 골고루 먹도록 독려하는 '식습관 교육' 시간이라면, 미국의 점심시간은 철저한 '자율의 현장'이다. 무엇을 얼마나 먹든, 혹은 한 입만 먹고 쓰레기통에 버려도 선생님은 개입하지 않는다.


한편 집에서는 구경하기 힘든 스낵들 앞에 선 우리 아이에게 그 결과는 참혹했다. 아이가 밥을 사 먹는 날이면 산처럼 쌓인 샐러드를 뒤로하고 나초와 눅진한 치즈 소스, 통조림 과일과 초콜릿 우유만을 식판에 담아왔다.

자극적인 것들로만 채워진 식판을 보며 나는 2차 멘붕에 빠졌다.



보온 도시락을 포기하다.

"한국 사람은 밥심이지!"라는 생각에 한동안 보온 도시락에 한식 메뉴를 고집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25분도 채 안 되는 짧은 점심시간 동안 아이는 뻑뻑한 뚜껑을 여느라 시간을 다 썼다.

그리고 친구들과 노느라 새벽같이 일어나 정성스레 싸준 도시락의 절반도 못 먹고 가져오기 일쑤였다.


결국 나는 항복을 선언했다. 날씨가 허용할 때는 김밥이나 주먹밥 같은 한국식 핑거푸드를 싸주지만, 텍사스의 뜨거운 여름이 시작되면 나 또한 간단한 도시락을 쌀 수밖에 없었다. 미국식 점심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이제는 빠르게 먹을 수 있는 핫도그나 샌드위치, 미니 햄버거를 싸주기도 한다.


대신 나만의 전략을 세웠다. 점심 메뉴를 일부 타협하는 대신, 아침마다 삶은 계란으로 단백질을 꽉 채우고 저녁에는 반드시 고기가 포함된 든든한 저녁 식사를 준다. 점심의 부실함을 아침과 저녁으로 메우는 나름의 타협이었다.


실제 미국인들도 점심은 빠르고 효율적으로 해결하되, 저녁의 영양가에 조금 더 집중하는 편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제는 미국 엄마들의 정성이 부족해서 그런 점심을 싸주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안다.
그것은 그 환경과 문화 속에서 내린 그들 나름의 최선이었음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문화부터 교육 시스템까지 참 많이 다른 두 나라에서 아이를 키우는 일은 매 순간이 도전이다.


한국의 정성과 미국의 실용 사이 그 어딘가에서,

나는 오늘도 나만의 방식으로 아이의 하루를 든든하게 지켜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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