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감정은 언제나 이유가 있었다

나를 지켜온 오래된 전략과의 화해

by 그대로 박희룡

나는 한때 내 감정들이 나를 망가뜨리는 원인이라고 믿었다. 갑자기 해일처럼 밀려오는 불안, 타인의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날카롭게 요동치는 분노, 그리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깊은 허무함까지 말이다. 이런 감정들은 평온한 일상을 방해하는 장애물이었고, 나를 불필요하게 예민하고 복잡한 사람으로 만드는 결함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불편한 기분이 들 때마다 스스로가 싫어져서 묻곤 했다. “왜 나는 남들처럼 평범하지 못할까? 왜 이렇게 쓸데없는 감정들에 휘둘리며 살아야 할까?”

어느 비 내리는 출근길 지하철 안, 창문에 비친 내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수많은 사람 속에 섞여 있었지만, 내 마음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홀로 외로웠다. 그때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졌다. 특별히 나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숨이 가빠지고 심장이 심하게 뛰기 시작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감정은 늘 예고 없이 나를 찾아왔다. 나는 사람들에게 이 당혹스러운 떨림을 들키지 않으려 고개를 숙였고, 거칠게 몰아쉬는 숨을 억지로 참으며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제발, 제발 좀 사라져줘. 나를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둬.’

나는 오랫동안 ‘이유 없는 감정’이 있다고 믿으며 살았다. 내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기에 그저 이를 악물고 견디거나 서둘러 치워버려야 할 골칫거리라고 여겼다. 그래서 감정이 생길 때면 나는 더 바쁘게 몸을 움직여 생각을 멈추려 했고, 다른 생각을 하며 내면의 초라함을 덮었으며, 나약한 나 자신을 매섭게 다그쳤다. 그때까지도 내게 감정은 정중히 마주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하루빨리 해치워야 할 문제이자 부끄러운 흔적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퇴근 후 불도 켜지 않은 방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가슴 깊은 곳에서 무거운 답답함이 밀려오곤 했다. 그것은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 깊은 슬픔이었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거운 무기력이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가 다시는 괜찮아질 수 없는 문제 있는 사람처럼 느껴져 견딜 수가 없었다. ‘남들은 다 밝고 힘차게 잘 사는데, 왜 나만 이렇게 축 처져 있을까?’ 이런 생각은 밤마다 나를 괴롭혔다. 스스로를 비난하는 마음은 큰 아픔이 되어 나를 힘들게 했고, 나는 나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이제 질문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기로 했다. “나는 왜 모양일까?”라는 가혹하고 자기 파괴적인 비난 대신, “이 감정은 대체 무엇으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해 이렇게 애를 쓰고 있는 걸까?”라고 정중히 묻기 시작했다. 그 질문 하나가 내 감정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감정은 나를 망가뜨리려는 적이 아니라 어떻게든 나를 살리려고 애쓰는 내면의 목소리였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된 것이다.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면 아주 불안했던 어린 시절의 어느 저녁이 떠오른다. 집안 분위기가 차가워지고 어른들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질수록 내 어린 나의 마음은 몹시 불안했다. 그때 나는 본능적으로 알게 되었다. 주변 분위기를 누구보다 예민하게 살피는 것만이 이 힘든 환경에서 나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날 이후 내 몸은 아주 작은 위험 신호에도 누구보다 먼저 반응하게 되었다. 남들은 느끼지 못하는 미세한 변화까지 알아채는 예민한 감각은 그렇게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만들어낸 소중한 방어 수단이었다.

나를 그토록 괴롭히던 불안은 갑자기 나타난 불청객이 아니었다. 그것은 위험이나 거절로부터 나를 보호하려 했던 아주 ‘성실한 감각’이었다. 어린 시절 나에게 불안은 큰 문제가 생기기 전 미리 알려주는 신호와 같았다. 불안이라는 마음 덕분에 나는 상황을 빨리 파악해 갈등을 피할 수 있었고, 더 큰 상처를 입기 전에 나를 지킬 수 있었다. 결국 불안은 나를 힘들게 히러 온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나를 살리기 위해 밤낮으로 애썼던 마음의 간절한 신호였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나를 떨게 했던 그 감정이 조금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회의실에서 상사의 목소리가 조금만 낮아져도 나만 눈치채고 긴장할 때가 있다. 동료들은 나를 너무 예민하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몸의 반응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불안했던 어린 시절을 버티며 나를 지키기 위해 몸에 익힌 방법이었던 것이다. 어깨가 굳고 숨이 가빠지는 그 반응은 나를 안전하게 지키려는 마음의 신호가 성실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나는 그동안 나를 위해 애쓰는 이 마음을 고맙게 여기기는 커녕, 왜 또 예민하게 구냐며 비난하기만 했다. 나를 지키려고 애쓰던 내 안의 소중한 마음을 그동안 너무나 모질게 대해왔던 것이다.

분노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동안 내게 분노는 무조건 참아야 하는 나쁜 것이었고, 화를 내면 관계가 깨질까 봐 두려워 무조건 피하려고만 했다. 하지만 분노는 이유 없이 찾아오지 않았다. 누군가 내 마음의 경계선을 넘었을 때, 나를 지키기 위해 울리는 경고음이었다. “여기까지는 안 돼!”라고 말하며 나를 보호하려 했던 정직한 신호였던 것이다. 다만 나는 화를 표현하는 법을 배우지 못해 그 마음을 안으로만 삼켰지만, 밖으로 나가지 못한 분노는 결국 내 안에서 우울한 마음이 되었고 나 자신을 힘들게 하고 있었다.

지독한 무감각과 허무함도 이제는 이해하게 되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상태는 나를 망가뜨리려는 벌이 아니라, 마음이 내린 ‘잠시 멈춤’ 신호였다. 감당하기 힘든 슬픔이나 스트레스가 너무 오래 지속될 때 우리 마음은 스스로 감각을 꺼서 나를 보호한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던 그 시간 덕분에 나는 고통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 무감각이 있었기에 나는 매일 출근을 하고 일상의 할 일을 해낼 수 있었다. 나를 힘들게 했던 무기력은 사실 내가 완전히 쓰러지지 않도록 지켜주던 마지막 방패였던 셈이다.

슬픔도 마찬가지다. 내게 슬픔은 나약함의 증거가 아니라 그것은 내가 진심으로 사랑했지만 지키지 못한 것들, 소중히 여겼던 것들을 위해 마음이 전하는 가장 솔직한 인사였다. 슬퍼할 시간도 없이 앞만 보고 달려와야 했던 어린 시절의 나에게 뒤늦게 찾아온 슬픔은 메말랐던 마음을 채워주는 위로였던 것이다. 억지로 참아왔던 눈물을 흘리며 나는 비로소 상처 입은 나를 위로할 수 있었다. 슬픔은 나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마음을 깨끗하게 해주는 따뜻한 과정이었다.

나는 이제 내 안의 모든 감정을 나를 지키기 위해 애쓴 노력으로 바라본다. 감정들은 나를 망가뜨리려 찾아온 적이 아니었다. 가장 힘들었던 시절의 나를 살려내기 위해 본능적으로 선택한 최선의 방법이었을 뿐이다. 상담실에 앉아 처음으로 내 감정들에게 말을 건넸다. “나를 지켜주느라 정말 애썼구나. 그동안 너희가 나를 공격한다고만 생각해서 미안해 그리고 끝까지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이것은 타인에게 받는 위로보다 훨씬 더 깊은, 나 자신에게 건네는 진심 어린 사과였다. 비로소 내 안의 싸움이 멈추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네가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분명히 있었어, 너는 결코 지나치게 반응을 한 게 아니야. 너는 힘든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해 적응하고 있었던 거야. 너의 예민함은 너의 결함이 아니라 너를 살린 힘이었어.”

이해한다는 것이 밀려오는 감정을 마법처럼 순식간에 사라지게 하지는 않지만, 감정을 대하는 나의 태도를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 이전의 삶이 감정과의 소모적인 힘든 싸움이었다면 이제는 감정과 진솔하고 따뜻한 대화가 시작된 것이다. 감정을 섣불리 고치려 하기 전에, 그 감정이 나를 지키기 위해 어떤 역할을 해왔는지 먼저 알아주어야 한다. 그런 이해가 밑바탕이 되어야 비로소 우리는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삶의 선택을 할 수 있는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

감정은 언제나 나름의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그 숨겨진 이유를 따뜻한 시선으로 알아주는 순간, 내 안의 거친 감정들은 더 이상 외롭게 싸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평온해진다. 바로 그때 우리 마음은 진정한 회복을 시작할 준비를 한다. 나는 이제 내 감정을 밀어내거나 억지로 누르지 않으려 한다. 대신 그 투박하고 정직한 손을 잡고 나란히 함께 걷기로 했다. 감정의 이유를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어제보다 조금 더 단단해진 마음으로 내일을 맞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