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시대를 만든 거인의 어깨
1939년 1월 1일, 캘리포니아 팔로알토의 어느 허름한 차고.
동전 하나가 허공을 갈랐다.
앞면이 나오면 '휴렛-패커드(Hewlett-Packard)',
뒷면이 나오면 '패커드-휴렛(Packard-Hewlett)'.
짤랑.
바닥에 떨어진 동전은 빌 휴렛(Bill Hewlett)의 손을 들어주었다.
단돈 538달러. 중고 드릴 프레스 하나.
오늘날 '실리콘밸리'라는 거대한 제국의 역사는, 바로 이 3.6미터 너비의 좁은 차고 안에서 시작되었다.
스탠퍼드 대학의 프레드 터먼(Fred Terman) 교수는 두 제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동부로 가서 취직하지 말고, 여기서 너희만의 것을 만들어라."
그 조언을 믿고 덤벼든 두 청년, 빌 휴렛과 데이브 패커드(Dave Packard).
차고에서 뚝딱거려 만든 첫 제품은 'HP 200A'라는 오디오 발진기(Audio Oscillator)였다.
첫 번째 큰 손님은 놀랍게도 월트 디즈니.
영화〈판타지아(Fantasia)〉의 웅장한 입체 음향 시스템, 세계 최초의 서라운드 사운드를 구현하려면 정밀한 오디오 테스트 장비가 필요했다.
디즈니 측 음향 엔지니어는 HP 200A를 보고 몇 가지 개선을 요청했고, 휴렛은 그 자리에서 수정본을 만들어냈다.
이것이 바로 'HP 200B'.
디즈니는 대당 71.50달러에 8대를 구매했다.
당시 200달러가 넘던 경쟁사 제품의 거의 반값이었다.
미키 마우스의 마법 뒤에는, 실리콘밸리 1세대 엔지니어들의 혁신이 숨어 있었던 셈이다.
"사람들은 좋은 일을 하고 싶어 한다. 적절한 환경만 주어지면 반드시 그렇게 할 것이다."
패커드의 이 믿음은 'The HP Way'라는 경영 철학으로 굳어졌다.
원문 PDF (HP Development Company)
https://www.hp.com/hpinfo/abouthp/histnfacts/publications/measure/pdf/1977_07.pdf
사장이 결재판 뒤에 숨지 않고 현장을 어슬렁거리며 직원과 수다를 떠는 경영,
MBWA(Management By Wandering Around).
부품 창고의 자물쇠를 뜯어버려, 엔지니어가 주말에도 집으로 부품을 가져가 연구할 수 있게 만든 신뢰,
오픈 도어(Open Door).
오늘날 구글의 무료 점심이나 넷플릭스의 자유로운 휴가 정책 같은 실리콘밸리 특유의 자율 문화.
딱딱한 양복 대신 셔츠 차림으로 일하고, 서로를 친근하게 이름(First name)으로 부르는 분위기.
모두 이 작은 차고에서 태어났다.
우리에게는 PC제조회사로 유명한 HP.
그들이 만든 최고의 '히트 상품'은 제품이 아닌, '실리콘밸리'라는 생태계의 DNA일지도 모른다.
AI의 클라우드 비용과 지연, 내 개인정보가 '어딘가'로 흘러가는 찜찜함.
그래서 사람들은 다시 자기 기기 안에서 끝내는 길을 찾는다.
HP가 내세우는 'AI PC'는 이 흐름을 타려는 선택이다.
다만 냉정해져야 한다.
HP는 아쉽게도 AI 시대의 중심에서 한 발 비켜서 있다.
성숙기에 접어든 PC 시장, 마이크로소프트·인텔·퀄컴이 쥔 표준.
NVIDIA, OpenAI, Google 같은 AI시대의 새 주역들.
그래도 한 줄기 빛은 있다.
온디바이스(On-Device) AI가 본격화되면 전력, 발열, 메모리 대역폭 같은 물성이 다시 승부를 가른다.
'웃돈을 주고도 못 사는 제품'이 '가격 말고는 큰 차이가 없는 제품'이 되는 날이 올 것이다.
다만 그 파도 위에서 HP가 2039년 100주년까지 살아남을지, 역사 속으로 퇴장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럼에도, 한 가지는 변하지 않는다.
AI가 태어난 고향 실리콘밸리.
그 생태계를 낳은 '아버지' 중 하나가 바로 HP였다는 사실.
미래가 어떻게 흘러가든, 그 공적만큼은 기억해도 좋지 않을까.
역사는 나선형으로 돈다.
거대함에서 시작해 다시 가장 작은 '나'의 공간으로.
오늘 당신의 마음속 작은 차고에서 시작될, 그 무모하고 엉뚱한 도전이.
언젠가 세상을 울리는 마법의 시작이 되기를.
538달러가 아니어도 괜찮다.
중요한 건 동전을 던지는 용기다.
최대한 신중하게 조사하고 팩트 체크를 거쳤지만, 역사를 다루다 보니 놓친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혹시 옥에 티를 발견하신다면 너그럽게 댓글로 알려주세요. 여러분의 조언이 모여 더 좋은 글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