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인의 배신자들, 반도체 제국의 씨앗을 심다

AI시대를 만든 거인의 어깨

by TEUM Lab

1957년 9월, 캘리포니아 마운틴뷰.

윌리엄 쇼클리의 연구소에서 일하던 젊은 엔지니어 여덟 명이 동시에 사직서를 냈다.


트랜지스터의 아버지로 불리던 노벨상 수상자 밑에서 일한다는 건 꿈같은 기회지만,

그들이 마주한 현실은 달랐다.


8인의 배신자들(Traitorous Eight).

실리콘 밸리의 역사는 애정을 담아 그들을 이렇게 부른다.


줄리어스 블랭크, 빅터 그리니치, 장 오에르니, 유진 클라이너, 제이 라스트, 고든 무어, 로버트 노이스, 셸던 로버츠. 평균 나이 서른도 안 된 물리학자들과 엔지니어들.


이들의 ‘배신’이 실리콘밸리의 생태계를 바꾸게 된다.



길을 내고, 층을 올리다

여덟 명은 페어차일드 카메라 앤드 인스트루먼트의 투자를 받아 페어차일드 반도체(Fairchild Semiconductor)를 세웠다. 야심차게 올린 간판은 결국 투자자의 이름이 되었지만, 그들은 개의치 않았다.


하긴, 이름이 중요한 건 아니다.

정말 중요한 건 ‘무엇을 만들었나’가 아니라 ‘어떻게 만들었나’였다.

페어차일드의 첫 번째 히트작은 더 좋은 제품이 아니라, 더 잘 만드는 방법 그 자체였다.


먼저 장 오에르니가 길을 낸다.

오염을 막기 위해 덮어 두던 보호막을 걷어내는 대신, 그 위에 회로를 ‘쌓아 올리는’ 발상. 당시 상식을 뒤집는 역발상이었다.


그리고 로버트 노이스가 그 길 위에 한 층을 더 올린다.

작은 판 하나에 여러 부품을 함께 만들고, 그 안에서 선으로 연결하는 방식. 오늘 우리가 ‘반도체 칩’이라 부르는 집적회로가 여기서 태어난다.


비슷한 시기, 경쟁사에서는 잭 킬비도 같은 문제를 풀고 있었다.

서로 다른 길을 걸었지만, 대량생산에는 노이스의 방식이 더 잘 맞았다. 결국 두 회사는 경쟁만이 아니라 협력이라는 선택지도 함께 받아들인다.


그래서 반도체의 태동은 “천재 한 명이 세상을 바꾼다”는 서사가 아니다.

한 사람이 길을 내고, 다음 사람이 층을 올리고, 또 다른 사람이 부딪치며 표준이 된다.

수많은 발상이 층층이 쌓이며 산업 자체가 태어난다.


74LS244_F_8314_annotated_sm.jpg 오에르니의 플래너 공정으로 만든 초기 트랜지스터 [출처: Robert.Baruch / CC BY-SA 4.0]


떠나고, 세우고, 경쟁하는 생태계

페어차일드는 곧 ‘회사’라기보다 ‘계보’에 가까운 존재가 되었다.

인재가 모이고, 배우고, 떠나 또 회사를 세우는 진화가 반복된다.


1968년 7월 18일, 노이스와 무어는 인텔(Intel)을 창업.

반도체 메모리라는 새로운 시장을 겨냥한 도전은, 이듬해 앤디 그로브(Andy Grove)가 합류하면서 마이크로프로세서의 시대를 연다.


1969년에는 페어차일드 영업 출신인 제리 샌더스가 AMD를 세웠고, ‘8인’ 중 한 명인 유진 클라이너는 벤처캐피털 클라이너 퍼킨스(Kleiner Perkins)를 공동 창업해 실리콘밸리의 자금줄을 열었다.


페어차일드 출신들이 세운 회사는 수십, 수백 개로 불어나고, 사람들은 이 계보를 “페어칠드런(Fairchildren)”이라 부른다.


오늘날에는 구글이 이 진화의 계보를 전승한다.

구글 브레인 출신들이 OpenAI를, OpenAI 출신들이 다시 Anthropic을 세웠듯,

떠나고, 세우고, 경쟁하는 순환.


실리콘밸리의 DNA는 여전히 작동한다.



AI시대에도 역사는 돌고 돈다

아무리 똑똑한 AI 모델도 혼자서 숨을 쉴 순 없다.

같은 모델이라도 어떤 하드웨어 조합으로, 어떤 배치 전략으로, 어떤 전송 방식으로 굴리느냐에 따라 비용과 사용자 경험이 달라진다.


기술 생태계의 역사는 진자 운동을 닮았다.

1950년대에는 한 회사 안에서 모든 걸 수직 통합해야 속도가 났다.

2010년대부터는 정반대.

설계는 엔비디아, 제조는 TSMC, 메모리는 SK하이닉스와 삼성. 분업과 모듈화가 성능을 끌어올린다.


그런데 지금, 진자가 다시 반대로 흔들리기 시작한다.

애플은 직접 칩을 설계하고, 테슬라는 AI 반도체를 내재화하고, OpenAI마저 자체 칩 개발을 검토한다.

수직 통합의 귀환.


어떤 방식이 정답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움직이는 순환'이 기술의 역사를 발전시켜왔다는 것만은 자명하다.




지금 우리가 'AI의 시대'라고 부르는 이 국면도, 언젠가 누군가의 작은 퇴사서에서 시작된 일로 기록될까.

다음 "배신자들"은 지금 어디에서, 어떤 것들을 준비하고 있을까?


최대한 신중하게 팩트 체크를 거쳤지만, 방대한 역사를 다루다 보니 놓친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혹시 옥에 티를 발견하신다면 너그럽게 댓글로 알려주세요. 여러분의 지적이 모여 더 좋은 글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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