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됐지만 따뜻했던 기억
내게는 찾고 싶은 사람이 한 분 있다. 고등학생 시절, 학교 도서관을 지키고 계셨던 사서 선생님이다.
국어 수업을 맡기도 하셨다. 그 시절의 도서관은 학생들이 많이 찾지 않는 곳이었다. 책 읽는 학생들로 붐비는 공간이라기보다는 어쩌면 세상에서 살짝 멀어져 있는 작은 섬 같은 곳에 더 가까웠다.
도서관 봉사활동을 하겠다고 이름을 올린 것도 사실은 책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곳에는 선생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선생님 자리 뒤편에는 커다란 창이 있었고, 오후가 되면 햇살이 그 창을 통해 부드럽게 흘러들어왔다. 그 아래에서 선생님은 늘 잔잔한 표정으로 책을 정리하거나 학생들을 맞이하셨다.
나는 대출과 반납을 도와드리다가도, 슬쩍 다가가 선생님께 재잘거리곤 했다. 책 이야기, 수업 이야기, 가끔은 아무 의미 없는 잡담까지도. 도서관은 그렇게 우리만의 작은 대화실이 되었다.
특히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내가 선생님께 핸드드립 커피를 내려드리던 순간이다.
주전자에서 가늘게 떨어지던 물줄기, 커피 향이 서서히 퍼지던 공기, 그리고 고맙다고, 봉사활동 점수를 더 주겠다며 웃으시던 선생님의 얼굴. 그 장면은 이상하리만치 또렷하게 남아 있다.
마치 오래된 필름 사진처럼 색은 바랬지만 분위기만은 선명한 기억이다. 그 오래된 기억을 꺼내면 내 마음은 잠시 따뜻해진다.
선생님은 내 글을 알아봐 주신 분이기도 하다. 내가 처음으로 쓴 시가 교내 대회에서 금상을 받았을 때, 선생님은 내게 말씀하셨다.
"이런 비유를 쓰는 학생이 있는 줄 몰랐어. 표현이 정말 좋다."
그 말은 누군가에겐 단순한 칭찬일지 몰라도 나에게 달랐다. 숨겨져 있던 나를 찾아내 주는 것 같았다.
전교생 앞에서 시를 낭독하던 날의 긴장감, 단상 아래에서 바라보시던 선생님의 모습은 아직도 선명하다.
하지만 졸업은 빠르게 일상을 바꾸었다. 회사에 들어가고, 돈을 벌고, 살아내느라 바빴다. 그렇게 좋아하던 글과 책들과는 멀어졌고, 문장 대신 작업 보고서가 내 하루를 채웠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그리고 지금 나는 다시 글을 쓰고 있다. 문장을 붙들고 씨름하다 보면 문득 그때가 떠오르곤 한다. 도서관 창가의 햇빛, 커피 향, 그리고 내 시를 읽고 감탄해주시던 선생님. 아마 나는 그 기억을 아직까지도 온전히 가슴에 품고서 완전히 잊은 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 한마디가 아주 오래 천천히, 내 안에서 식지 않고 남아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선생님을 찾고 싶어졌다. 그때의 학생이 아직도 글을 쓰고 있다고, 선생님이 건네주신 말이 오래도록 남아 있다고, 꼭 한 번 말하고 싶어졌다. 졸업한 고등학교의 홈페이지를 뒤져 보았다. 너무 오래된 시간 탓에 선생님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친구들에게 연락을 돌려 보았지만 선생님의 성함조차 정확히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다. 기억은 또렷한데, 정작 선생님의 성함은 흐릿했다.
그러다 문득 오래된 메일함을 열어 보았다. 그 안에서 한 통의 메일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양성평등 글짓기 2-5 박00'
심장이 조금 빨리 뛰었다. 혹시 이 메일을 받으신 분이 그 선생님일까? 확신은 없었지만 그 가능성 하나에 기대어 나는 메일을 쓰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선생님."
그 한 문장을 쓰는 데 이상하게도 오래 걸렸다. 혹시 다른 분이면 어쩌지, 이미 나를 기억 못하시면 어떡하지. 그런 생각들이 몇 번이고 키보드 위의 내 손을 멈춰 세웠다. 그래도 결국 나는 메일을 보냈다. 아주 오래전, 나를 한 번 믿어주었던 사람에게 닿기를 바라면서.
지금 나는 답장을 기다리고 있다. 혹시 이 글이 선생님께 닿지 않더라도 괜찮다. 이미 나는 알고 있다. 누군가의 짧은 한마디가 먼 미래의 나에게 용기를 줄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시절의 도서관과 한 잔의 커피, 한 사람의 말이 지금의 나를 다시 책상 앞으로 돌아오게 했다는 것을.
그래도 가능하다면.
선생님, 그때의 학생이 선생님의 칭찬을 가슴속에 품고 다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선생님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라고 꼭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