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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탄만두 May 25. 2022

말로 낸 상처에도 피가 나야 해

 최근 큰 스트레스를 받은 엄마는 잠도 자지 못하고 먹지도 못하고 깨어 있는 시간 동안 계속 계속 괴로워했다.


그동안 다양한 불행을 함께 지나왔고, 때마다 잠을 잃고 입맛을 잃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뭔가 달랐다. 엄마는 심장이 심하게 빠르게 뛰고 호흡이 가쁘고 팔다리가 떨려 아무것도 못하겠다고 했다. 억울한 상황을 겪었던 순간이 계속 떠오른다면서 이런 경우 어느 병원에 가야 하는지 알아봐 달라고 했다.


어느 병원을 예약할까 고민하다가 원인이 분명한데 약물 처방이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엄마는 누군가의 '말'로부터 마음이 크게 다친 상태였다. 만약 그게 팔, 다리, 살갗이었다면 부러졌거나 뜯어졌거나 피가 났을 거다. 다만 말로 받은 상처였기에 다친 부위를 정확하게 집어서 약을 바르게 어려웠을 뿐.


해결 방법을 알았지만 불가능에 가까웠다. 상처 준 사람이 '상처의 말'을 언급하며 본인의 잘못을 인정하고 '속상했겠다','미안하다'로 공감해줘야 해소될 문제였기에. 그래서 심리상담센터를 찾기로 했다. 마음이 다쳤으니 마음 전문가에게 치료받아야 해.


상담센터는 병원이 아니니까 약물 처방도 되지 않고 단 한 번의 상담으로 효과가 없을 확률이 높았다. 그래도 이게 맞는 것 같았다. 엄마가 거부감 없이 동행해주어 다행이었다. 상담을 위해 사전에 2시간 넘게 작성한 신청서를 본 선생님이 사건을 객관적으로 적으려고 엄청 노력하신 것 같다며 나의 의도를 알아봐 주셨다.


왜냐면 객관적으로 누가 봐도 억울한 상황이 맞거든. 사건 현장에 나도 있었기 때문에 엄마가 겪고 있는 억울함과 분노는 정당했다. 비유하자면 걸어가다가 냅다 자동차에 치어서 병원에 온 거다. 아프니까. 일상생활이 안되니까. 애석하게도 치고 간 사람은 일상을 살아가겠지만.




80여분의 상담을 받았고 상담받는 엄마 표정은 글쎄. 크게 시원해 보인다거나 운다거나 그런 일은 없었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말하는 걸로 시원하려면 누구에게도 말 못 하는 속마음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 모녀는 비밀이 그리 많지 않다.  


내가 기대했던 것은 센터에 방문하는 과정 그 자체였다. '마음이 아프니 이 부위를 치료하러 가야지' 생각하는 과정에서 엄마의 마음에 변화가 있길 바랐다. 생각이 멈추지 않고 이어지는 것을 '반추'라고 하는데, 소가 여물을 되새김질하는 것과도 같은 뜻이다.  


우리는 '반추 끊어내는 몇 가지 방안'을 배웠다. 개중에는 이미 알고 있던 것도 있었고 완전히 새로운 방법도 있었다. 과연 이걸 엄마가 잘 해낼 수 있을까. 상담이 끝나고도 반신반의했다.


센터에서 나와 엄마 집으로 향했다. 상담 과정에서 이해 못 한 부분이 있냐고 물으며 다시 한번 엄마가 이해하기 쉽게 최대한 설명을 했다. 엄마는 그제야 '아 그게 그 말이었구나!' 했다. 함께 저녁을 먹고 집에 돌아와서는 내일은 엄마에게서 '잘 잤다'는 전화가 오기를 기도하며 잠에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엄마에게서 연락이 왔다.


- 엄마 어제는 잠을 좀 잤어?

- 어제는 3시간 정도 잤어. 그런데 꿈을 꿨는데 말이야…

- 응 무슨 꿈? (일단 1초라도 잤다는 사실에 안도)


- 사람들이랑 같이 어디를 걸어가는데 목에 뭐가 계속 걸린 것처럼 아픈 거야. 못 걸어가겠어. 그래서 내가 목에 뭐가 있는 것 같다고 말을 하니까 주변에서 또 나보고 뭐가 있냐고 예민하다고 그러더라?

- (꿈에서도 또!)


- 근데 분명히 뭐가 꼭 있는 기분이었어. 너무 불편한 거야. 그래서 내가 목구멍에 손을 넣어서 만지니까 뭐가 잡히대? 그래서 그걸 억지로 잡아서 꺼내니까 딱딱한 유리조각 같은 게 나와.

- 헉!!!!


- 근데 아직 이물감이 남아있어서 한번 더 헛구역질도 하고 손을 또 넣어서 잡아 꺼냈어. 그러니까 또 뾰족한 유리조각 같은 게 하나 더 나오는 거야. 엄청 날카롭고 딱딱했어. 그제야 사람들이 내 주변에 몰려와서는 이런 게 목에 들어있었냐면서. 얼마나 아팠냐면서 다들 놀라는 거야.

- (이때 눈물이 날 뻔했다)


- 주황색 하고 보라색. 얇고 뾰족한 유리조각이었어. 그걸 빼내니까 얼마나 시원해. 그리고 사람들이 그제야 내 말을 믿어주고 인정을 해주더라고.


맙소사. 엄마의 무의식이 달라졌구나. 기분이 너무 좋았다. 그제야 마음에 놓였다. 돈이 아깝지 않네, 스위치 바꾸듯 바로 나아지진 않겠지만 언젠가 끝이 나겠구나. 깜깜했던 일상에 한 줄기 빛이 드는 기분이었다.


매일 아침 엄마에게 '잘 잤어?'라는 연락을 하며 답장이 올 때까지 마음을 졸인다. 언젠가 그녀가 까무러치듯 늦잠을 잤다는 말을 해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만일 나에게 초능력이 주어진다면 말로 내는 상처에도 피가 나도록 인체 구조를 바꿀 거다.


어떤 사람들은 말로 받는 상처의 통증을 몰라도 너무 모르니까. 종이에 손 끝만 베어도 아파할 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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