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고른 말은 마음 깊은 곳까지 간다.
작가는 말한다.
돈 한 푼 들지 않는 사소한 언어들이
누군가의 하루에 아름다운 파문을 남긴다고.
· 고르고 고른 말 / 홍인혜
· 미디어창비
아래부터 나오는 이야기는 책 '고르고고른말'의 아주 약간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실 에세이에 스포일러라는 표현이 어울릴지는 모르겠다. 연속적으로 사건이 이어지는 것도 아니고 등장인물이 쥐고 있는 갈등이 반복되지도 않으니까. 하지만 이 책은 스포를 당하지 않는 편이 좋다. 어쩜 이 단어를 이렇게 활용했지? 아니 어떻게 이 문장을 이렇게 표현했지? 처음 맛보는 작가식 표현에 감탄하는 맛이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스스로를 말에 기대어 사는 언어 생활자라 표현한다. 말이 취미이자 특기라고 했다. 나는 여기에 감히 한 가지 타이틀을 더 붙이고 싶다. 말에도 분명 맛이 있다고 하니까, 말맛을 참 잘 쓰는 요리사라고. 요리라는 것은 어떤 순서로 어떤 재료를 넣느냐에 따라 맛이 바뀌니까. 작가는 적재적소에 필요한 재료를 쏙쏙 꺼내어 쓰는 장인이다. 그렇게 완성된 요리와도 같은 문장은 감칠맛을 너무 잘 내서 미친 여기 맛집이네! 하며 사진을 찍고 지인들에게 추천을 하고 두고두고 그 맛을 음미하게 만든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라는 CM송은 동화 같은 문장이다. 생각보다 말하지 않으면 사람들 잘 모른다. 정확하게 마음을 표현할 단어를 찾지 못하면 어떤 관계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한다. 그렇기에 말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과의 관계가 얼마나 동화 같고 소중한지 모르겠다.
세상 모든 빨강이 같은 빨강이 아니듯이
말도 아다르고 어다르다.
'말이 생겨나다'와 '말이 태어나다'는
분명히 다른 감정을 전달한다.
이 책에서 작가가 건네고 듣고
나누었던 말들은
감정의 색상 코드와도 같다.
미묘하게 다른 말맛을
정교하고도 치밀하게 표현했다.
그러니까 오늘 내 기분은 #A566FF 보다는 #E8D9FF야 라고
말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색상 코드표를 보고
완벽하게 어울리는
색 조합을 찾아내는 것처럼
완벽하게 마음에 박힐 단어를 구사한다.
지금부터는 나의 마음을 콕이 아니라
쿡 찌른 몇 가지 문장과
그 문장을 마주했을 때 감정을 담았다.
*피부에 내려앉은 계절의 기념품
→ 햇살이 남긴 기념품이라니! 주근깨 없는 사람이 약간 서운해질 정도의 황홀한 표현이다. 이를테면 보조개가 있는 이에게 신이 당신이 너무 예뻐 한번 더 만지느라 생긴 거라고들 하는 것처럼.
*불안은 밀려들었다 쓸려나가며 영혼의 지형을 바꾼다
→ 나도 태생적으로 한 불안한 사람으로써....불안한 감정은 정확하게 이런 느낌이다. 예정 없는 거친 파도처럼 밀려들어왔다가 홀연 모든 것을 다 쓸고 가버려 남아있는 일상과 기분을 다 바꿔버린다. 하려고 했던 것들을 해내지 못하도록 모든 것을 쓸고 나간다. 어떻게 이렇게 정교하게 묘사했을까 내 불안을. 속을 다 들켜버린 느낌이었다.
*결국 나누고 싶은 것은 말도 안 되는 사소함이었다
→ 본디 사소함이라는 것은 보잘것없는 편인데 그 작디작은 것이 말도 안 되게 더 작다는 표현이 정말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걸 나누고 싶다는 것도. 이 문장이 들어간 에피소드를 공감하는 이들이 많을 거란 생각을 했다.
*사람마다 마음보가 다르기에
→ 세상에 마음보라니! 심보가 아니고 마음보라니! 유레카! 이 문장 역시 앞부분의 엄청난 문장(가장 좋아하는 꼭지) 뒤에 등장하여 찰떡같이 어울렸다. 언어는 정말 신비롭다.
*나의 세계는 기지개를 켠다
→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는 나의 새로운 세계. 정말 근사한 표현이 아닌가. 앞으로 살며 무언가를 배우게 될 때마다 떠오를 문장이다.
밑줄을 그은 구간은
이 외에도 셀 수 없이 많다.
하나하나 적으며 씹고 뜯고 맛보고 싶었다.
세상 사람들 이 표현력 좀 맛보세요!
하지만 역시
이 책에 나오는 문장들은
선스포 당하지 않는 게 좋겠다.
에피소드 서론 본론 결론을 통째 읽고서
직접 그 충격을 경험하길 바란다.
이 글은 책을 읽고 나서가 아니라
놀라운 무언가를 보았을 때
기록한 일지에 가깝다.
내가 살면서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었던가?
문장마다 뜯어보고 싶고
이렇게까지 컬처쇼크를 받은 책이 있었나?
이 책은 온통 그런 단어와 표현으로
범벅되어있다.
엄청나게 놀라운 이야기가 가득하다.
작가는 확실히 언어가 특기다.
언어 기술자고 요리사고 마술사다.
책을 넘기면서
자주 웃고 한 번은 눈물이 핑 돌았다.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기까지
말을 고르고 골라본 사람이라면
나는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인데
타인이 생각 없이 던진 말에
상처 받아본 이라면
반드시 읽어봤으면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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