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욕을 들으며 자라난 딸들이 있다. 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작은 푸념부터 쌍욕까지 같은 여자의 입에서 나왔다. 레퍼토리도 어찌나 비슷한지 대사조차 똑같았다. 그만큼 기억이 선명해서겠지. 그렇게 딸은 엄마의 과거를 공감하고 위로하는 여성으로 커간다.
"뭐라고? 그렇게 말했다고?"
"그걸 참았어? 나 같으면 밥상을 엎었다"
"왜 그때 아무 말도 못 했어?"
"대체 혼자서 그 시간들을 어떻게 견뎠어?"
엄마의 말들은 내 안에 죄책감과 연민, 분노, 슬픔을 심었다.
그 감정들이 자라면서 나도 함께 자랐다.
"너 때문에 버텼지"
"딸 하나 보고 꾹 참았지"
"딸 앞에서 싸우기 싫어서 참았지"
'너 때문에 살았다'는 그녀의 생이 가여워지기 시작하면서 딸의 인생은 변한다. 엄마가 안쓰러워지고 불쌍해지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더 이상 엄마는 나의 보호자가 아니었다. 내가 꼭 지켜줘야 할 것 같았다.
입덧이 심했다던 엄마는, 피까지 토해내 가죽 밖에 남지 않았던 엄마는, 살려 달라며 병원에 입원 좀 시켜달라고 했다고 한다. 겨우 6인실에 입원을 시켰다던 나의 아비는 보호자 동의서를 쓰면서 화를 냈다고 한다. 씩씩거리며 볼펜을 집어던지던 그 순간을 엄마는 잊지 못한다.
물만 먹어도 토하는 엄마를, 6인실에 두고서 오지 않았다고 했다. 같은 병실을 쓰는 환자의 가족들이 병문안을 왔다. 과일이며 통닭이며 전 같은 음식을 싸들고서 왔다고 했다. 그러면 엄마는 커튼을 치고 조용히 쓰레기통을 붙잡고 웩웩거렸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열여섯이었다. 그때는 분노가 먼저였다. '미친 거 아니야?' 화부터 났다. 그러다 스물셋이 됐다. 같은 이야기를 들어도 내 감정이 같지 않았다. 고독함과 슬픔이 더 크게 느껴졌다. 병실에 혼자 앉아있는 엄마의 모습이 눈앞에 선명히 그려졌다. 절절한 외로움이었다.
커튼 바깥으로 웃고, 떠들고, 먹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내 귀에도 들리는 것 같았다. 잠깐이라도 지금의 모습으로 그녀의 과거를 스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얼굴 모르는 지나가는 '행인 1'로 나타나 간호사를 불러주고 싶었다. 커튼을 열고 들어가 토하는 그녀의 등이라도 두들겨 줄 수 있었으면 했다. 어떻게 아빠라는 사람이 그럴 수 있어? 감정이 요동쳤다.
시간이 더 흘러, 서른다섯의 내가 입덧을 하던 어느 날. 남편의 다정함 앞에 나는 무너졌다. 아니 이렇게 잘해줘도 힘든데. 하루가 지독히도 길게 느껴지는데, 아무리 울어도 토해도 시간이 늘 제자리인데. 밥 짓는 냄새만 맡아도 속이 울렁거리는데. 나는 24시간 내내 이것저것 다 시키면서도 괴로워 죽겠는데. 어떻게 아무도 오지 않는 병실에서 혼자 버텼는지. 가슴이 미어졌다. 남편을 앞에 두고 말없이 엉엉 울었다.
"엄마, 나는 엄마가 이렇게 와서
다 챙겨줘도 너무 힘든데 혼자 어떻게 했어?"
"그냥, 어떻게든 버텨서 낳고 싶었어
그래서 딸 이렇게 만났잖아."
나를 돌봐주러 온 엄마에게 넌지시 물었다. 그러면 담담하고도 당연한 마음이 돌아온다. 정말 어떻게 버텼을까? 아기가 태어나면 엄마는 더 잘 견딜 수 있게 되는 걸까. 나조차도 기억하는 6살, 8살, 12살들의 순간들은 어땠을까.
그래서 엄마에게 결코 솔직할 수 없다. 엄마의 병으로 인해 나에게 불안장애가 생겼다거나, 어떤 악몽을 꾼다거나, 응급실 화장실에서 코피가 터졌다거나 하는 것들을. 감정들이 겹겹이 쌓여 어느 순간부터 숨기게 되버린 나의 속마음을.
숨긴다고 해서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엄마와 나 사이에는 여전히 말하지 못한 마음이 흐르고 있었다.